소설리스트

학사신공-1001화 (758/2,000)

1001화. 천변환면(千變換面)

*

천변환면은 손수건처럼 얇았고 손끝으로 은은하게 온기가 전해졌다. 견문이 풍부한 한립도 어떤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가죽 면구(面具)에 새겨진 콩알만 한 은색 주술문자들이었다. 주술문자의 정체를 알아본 한립은 미세하게 표정이 달라지며 힐끗 류수아를 보았다.

이에 류수아가 의아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한 형, 이전에 이런 물건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채 선배님의 독문 보물인데 어찌 본 적이 있겠습니까.”

한립은 놀란 내색을 하지 않고 가볍게 답했다.

“그럼 어째서 그런 눈빛을…….”

“하하, 재료가 워낙 특이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하여 그랬습니다. 나름 주워들은 것이 많다고 여겼는데 도저히 어떻게 제련한 것인지 모르겠군요. 선자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셨군요. 저도 제련법은 모르지만, 사부님께서 희귀한 일곱 가지 영수의 가죽을 하나로 융합해 천변환면을 제련한다고 말씀해 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덕분에 식견을 넓혔습니다.”

한립은 아무렇지 않게 면구의 은색 주술문자를 손끝으로 문질러 보았다. 겉모습과 달리 속마음은 요동치고 있었다. 천변환면의 은색 주술문자는 놀랍게도 금궐옥서의 은과문이었다.

‘이것이 채류앵의 독문 보물이라면 그녀 역시 금궐옥서의 잔본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이 때 류수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단한 보물이기는 하지만 면구를 쓴다고 바로 변신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상의 혈육(血肉)과 가죽을 얻어야 완벽하게 변신에 성공할 수 있지요.”

“홀로 돌아다니는 암수를 찾아 죽이면 그만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아까 그놈이 딱 적당합니다!”

그 말에 석곤이 눈을 번뜩이곤 노란빛으로 변해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류수아가 머뭇거리다 그를 놔두었다.

“석 형 홀로 가게 두어도 괜찮겠지요?”

석곤이 토둔술을 써서 사라지자, 여인이 한립을 향해 작게 물었다.

“선자께서도 별 탈 없을 거라 여겼기에 가게 놔둔 것 아닙니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의식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는데 다른 요수는 없었습니다. 석 수사도 자신이 있으니 나섰을 테지요.”

반 시진 후, 석곤이 사라졌던 지면에서 노란빛이 반짝이곤 석곤이 다시 튀어나왔다. 그는 한립과 류수아를 향해 씩 웃어 보이고 소매 속에서 거무튀튀한 물건을 꺼냈다. 새까만 암수 가죽이었다.

“류 수사, 이 정도면 쓸 만하겠습니까?”

석곤이 우쭐거리며 물었다.

“상처 하나 없이 잘 구해오셨군요. 구결은 전수해 드릴 테니 바로 천변환면을 사용해 보십시오.”

여인이 가죽을 살펴보고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여 한립과 석곤에게 천변환면 구결을 알려주었다. 잠시 후, 류수아가 전음을 멈췄고 석곤은 가죽을 허공으로 던진 후 법결을 날렸다.

파앗.

천변환면이 은빛으로 변해 암수 가죽으로 스며들었다. 은색 주술문자가 가득한 가죽이 서서히 우락부락한 석곤 위로 떨어져 내렸다.

은빛이 번지고 요수 가죽에 둘러싸인 거한이 암수로 변했다. 새까만 털이며 날카로운 발톱까지 모든 것이 진짜 암수와 똑같았다.

“묘합니다! 아무 변화도 없는 것 같은데 이렇게 완벽하게 변하다니요.”

암수로 변한 석곤이 자신의 앞발을 들어 보고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만한 효과를 내지 못했다면 저도 꺼내놓지도 않을 것입니다.”

류수아가 미소 지었다.

“잘 쓰겠습니다, 류 수사. 암수삼림을 통과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새까만 암수가 사람 말을 하며 히죽거렸다. 한립도 석곤의 변화를 보고는 면구에 대한 믿음이 커졌다.

“류 선자와 저는 아직 암수 가죽을 구하지 못했지만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일단 이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도중에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암수를 발견하면 처리하는 것으로 하지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최대한 서둘러 이동하시지요.”

한립의 말에 류수아가 즉시 동의했다. 그들은 이렇게 조용히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석곤은 이미 암수로 변했지만 그래도 입에서 노란 구름을 뿜었다. 구름에 둘러싸인 그는 희미한 노란 기운으로 변해 어둠 속에서 거의 보이지 않았다.

류수아는 허리춤에서 옥패를 꺼내 커다란 생쥐(鼠)로 변신시켰는데, 그녀가 밟고 서자 하얀빛이 뿜어져 나와 그녀를 감싸고 투명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립의 청죽봉운검은 정련을 마쳐 극히 정순한 나무 속성 보물이 되었다. 숲처럼 나무 속성 영기가 짙은 곳에서 둔술을 펼치면 자연스럽게 기운이 섞여 따로 은신술을 펼치지 않아도 되었다.

소매 속에서 작은 푸른 비검을 불러낸 한립은 둔광을 일으켜 날아갔다. 순식간에 주변과 동화된 그는 소리 없이 허공을 갈랐다.

* * *

며칠 후, 늘씬한 암컷 암수가 낙엽이 가득 쌓인 땅 위를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옆 거목에서 난데없이 남색 기운이 흘러나와 암수를 덮쳤다. 암컷 암수는 기겁해 날카롭게 괴성을 지르며 앞발에서 검은 빛을 뿜었다.

그러나 남색빛이 빙글빙글 돌아 거대한 빛구슬로 변해 암수를 뒤덮어 버렸고, 날카로운 발톱도 남색 빛구슬을 갈라내지 못했다.

곧 거목에서 하얀빛이 반짝이고 류수아가 빠져나왔다. 남색 빛구슬을 향해 중얼중얼 주술을 외는 중이었다.

류수아의 조종을 받은 빛구슬을 커다란 남색빛의 장막으로 변했고 그녀도 곧 하얀빛으로 변해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암수가 주저하지 않고 달려들며 세 개의 검은 그림자 괴수를 불러냈다.

휘릭!

류수아가 평온히 입을 벌려 남색 실 뭉치를 뿜어냈다. 남색 실들이 그물을 형성해 암수와 검은 그림자 화신들을 잡으려 했고, 암수도 물러서지 않고 입에서 검은 빛기둥을 분출하는 동시에 앞발을 마구 휘둘렀다.

쿠르릉!

장막 속에서 검은빛과 남색빛이 충돌하며 굉음이 울렸지만 보호막이 소리와 충격을 차단해 밖으로는 거의 새어 나오지 않았다. 빛의 장막 바깥, 푸른빛과 노란 기운이 번득이고 허공에 한립과 석곤이 소리 없이 떠올랐다.

“거참, 어째서 꼭 암컷 암수여야 한다는 것인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류 수사께서 고집을 한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석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한립은 동요 없이 답했다.

“뭐, 류 수사도 여인이니 꺼리는 바가 있겠죠. 그건 그렇고 한 수사께서 이틀 전 마주친 암수를 그냥 보내준 것도 저는 이상했습니다. 어째서 그러신 겁니까?”

장막 안을 들여다보던 석곤이 묘한 눈빛으로 한립을 돌아보았다.

“그 암수는 이미 몸에 상처가 많았습니다. 그런 가죽을 구해봐야 제대로 변신할 수 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한립은 빛의 장막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랬군요. 저는 그날 부상당한 암수가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있어 한 형께서 자비를 베푼 줄 알았지 뭡니까! 하기야 우리 같은 수도자들이 어찌 그런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겠습니까. 의미 없는 일이지요.”

석곤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한립은 그저 가만히 웃고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때 빛의 장막 안에서 둔중한 울림이 느껴졌다.

지켜보던 한립은 눈을 가늘게 떴고 석곤도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곧바로 빛의 장막이 갈라지고 류수아가 나타났는데 그 옆에 축축하게 젖은 암수가 엎어져 있었다.

한립이 의식으로 요수를 훑자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훌륭한 솜씨입니다. 류 수사의 물 속성 신통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몰랐습니다. 저보다 더 빨리 암수를 잡아오시고요.”

석곤이 놀란 기색을 지우고 칭찬의 말을 건넸다.

“아직 변변치 않은 실력입니다. 제가 어찌 석 형에 비하겠습니까.”

손을 뻗어 암수를 허공에 띄운 류수아가 빙긋 웃음 지었다.

“하하, 그 정도가 변변치 않은 실력이면 제 실력은 뭐 내세울 수준도 아니겠습니다! 류 선자까지 암수 가죽을 취했으니 이제 한 수사만 남았군요. 더 깊숙이 들어가기 전에 하루빨리 대책을 세우셔야 할 텐데요.”

“안심하십시오. 저도 목숨이 달린 일이니 만전을 기할 것입니다.”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웃어 보였다.

* * *

사흘 후, 구불구불한 계곡 가에서 일반 암수보다 몸집이 큰 암수가 푸른빛의 장막 안에 갇혀 있었다. 한립이 그 위에 떠서 수결을 바꿀 때마다 빛의 장막이 미세하게 깜빡거렸다.

옆에서 빛의 장막을 지켜보는 류수아와 석곤은 표정은 달랐지만 똑같이 크게 놀랐다. 푸른빛의 장막이 실체가 있는 것처럼 안을 엿보려 해도 그들의 의식을 전부 튕겨내 버렸던 것이다.

푸른빛의 장막은 다름 아닌 한립의 춘려검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이 수결을 풀고 소매를 털었다.

웅.

푸른빛의 장막이 흩어져 수십 자루의 푸른 비검으로 떠올랐고 손바닥만 하게 줄더니 검들은 물고기 떼처럼 몰려들어 그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검진이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암수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것을 본 류수아와 석곤이 슬쩍 시선을 마주치며 한립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한립도 그것을 알았지만 모른 척하고 암수 시체 옆으로 내려갔다.

“이제 저도 암수 가죽을 구했으니 마음 놓고 암수삼림을 가로지를 수 있겠습니다.”

“그야 당연하지요. 헌데 한 형께서 명성이 자자한 검진 신통을 지니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살피려 해도 안 되더군요. 의식을 차단하는 능력만으로도 어째서 검진을 그리 대단하다고 하는지 알겠습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암수를 검진 안으로 유인해 죽일 때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미세한 진동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검진 신통이라니, 성계 아래 급으로는 수사를 상대할 자가 없겠습니다.”

류수아가 쓴웃음을 지었고, 석곤은 진심어린 목소리로 찬사를 늘어놓았다.

“하하, 두 분께서 제 얼굴에 이리 금칠을 해주시니 민망할 따름입니다. 선배님들의 총애를 받는 두 분이 어찌 검진의 위력을 두려워하시겠습니까. 지금까지 보여준 실력이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립은 웃음을 흘리며 그들의 정곡을 찔렀다.

그 말에 움찔한 석곤이 한립을 마주보며 웃었다.

“에이, 한 수사의 신통도 만만치 않지요! 서로 치켜세우는 것은 그만두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이틀 정도 더 가면 정말 암수들이 우글우글대는 암수삼림 중심부로 들어섭니다. 아무리 변신을 했다고 해도 조심해야 합니다.”

“앞으로는 홀로 돌아다니는 암수라 해도 웬만해서는 공격해선 안 되겠죠. 천변환면의 금제가 평범한 암수들은 속여도 삼안암수의 경우 분명 흘러나오는 기운을 눈치챌 테니까요. 의식 역시 너무 멀리까지 펴트려서는 안되고요. 일단 법력을 이용해 싸움을 시작하면 더 이상 기운을 숨길 수 없으니 모두 명심해 주십시오.”

류수아도 표정을 굳히고 진지하게 당부했다.

“어쩔 수 없이 손을 써야 되면 지금처럼 시간을 끌 수 없겠군요. 세 사람이 일시에 공격해서 단시간에 상대를 죽이고 자리를 떠야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겠습니다.”

침음하던 석곤이 덧붙였다.

“셋이 힘을 합친다면 평범한 암수를 처리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겠으나 고계 암수를 마주치면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고계 암수에게 걸린다면 어쩔 수 없이 원자신광 합격술을 써야겠지요.”

한립의 물음에 류수아가 웃으며 답했다.

“아, 깜빡 잊을 뻔했습니다! 우리 셋이 원자신광 합격술을 발휘하면 고계 암수도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요.”

그 말에 석곤이 눈을 빛내며 박장대소 했다.

“그래도 고계 암수 떼의 추격을 받지 않으려면 최대한 피해 다니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한립이 걱정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세요, 한 형. 저와 석 형도 당연히 조심할 것입니다. 그럼 모두 암수 가죽을 얻었으니 변신하고 바로 출발하실까요? 모여 다니면 너무 눈에 띄니 서로 거리를 두고 날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류 선자 말씀대로 하지요! 저 먼저 출발합니다!”

석곤이 바로 수결을 맺어 새까만 가죽에 은빛을 쏘아 흡수시켰다. 그러자 우람한 사내는 검은 가죽에 둘러싸여 순식간에 암수로 변해 화살처럼 튀어나갔다.

한립과 류수아도 지체 없이 술법을 펼쳐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뉘어 날아갔다. 그들은 각자의 보물을 활용해 은신을 했기에 어둑한 나무 그림자 속에서 찾기 어려웠다.

그 후, 그들은 암수의 흔적이 보이면 멀리 피해갔고 절대 문제가 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