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000화 (757/2,000)
  • 1000화. 다양한 종족들

    *

    어느 호수 위, 하반신은 물고기 꼬리를 하고 상반신은 사람의 모습을 한 이족인 남녀가 나란히 떠 있었다. 그리고 9개의 금색 눈을 지닌 괴물고래가 놀라운 기운을 발산하며 그들과 대치중이었다.

    사내의 눈동자는 은백색이었지만 여인은 금빛 눈동자를 지녀 왠지 모르게 괴물고래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 때 고래가 길게 포효하며 9개의 눈을 사납게 번득였다. 분명한 적의였다.

    그런데 곁의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던 이족 여인이 괴물고래와 비슷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괴물고래는 깜짝 놀라 눈을 깜빡거리며 머뭇거렸고, 그것을 본 여인은 긴장을 풀고 더욱 크게 포효를 이어갔다.

    그녀의 소리가 이어지자 괴물고래는 돌연 거대한 몸을 움직여 이족인 남녀를 중간에 두고 빙글빙글 돌더니 원래 자리로 돌아가 짧은 소리를 냈다.

    이족인 여인이 그 소리를 듣고 희색을 비추었다. 그녀가 몸을 날려 등에 타는데도 괴물고래는 노하는 기색 없이 얌전하게 있었다. 여인을 태운 괴물고래가 남색빛을 반짝이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고, 물고기 꼬리를 지닌 사내가 그 뒤를 따랐다.

    * * *

    암수는 광한계에서 강한 축에 속하는 요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상고흉수도 홀로 성년 암수 떼와 겨루기를 꺼려했다. 능력이 낮보다 밤에 몇 배는 강화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암수삼림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루 중 3분의 2가 밤이었고 낮이 극히 짧았다. 그 안에 암수 수천마리가 살고 있었고 성년 암수의 비율도 낮지 않았다.

    그렇기에 만금령과 팔흉해의 상고흉수들도 암수삼림을 건들지 않았다. 암수들은 암수삼림을 자기 집처럼 활개치고 다녔고, 숲속의 다른 짐승들을 잡아먹는 최상위 포식자였다.

    극히 소수의 괴수들만이 암수와 마찬가지로 밤에 특화된 능력을 지니고  그들과 호각을 이루었다.

    어느 날, 암수삼림 외곽 어딘가에서 거대한 몸집을 지닌 푸른 구렁이가 암수 한 마리와 대치하고 있었다.

    비단구렁이와 비슷하게 생긴 거대 구렁이는 사실 암수삼림에서 암수와 대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요수, '청야망(靑夜蟒)'이었다. 청야망은 밤이 되면 몸이 훨씬 단단해졌고 광증(狂症)과 비슷하게 훨씬 난폭한 괴수로 변신할 수 있었다.

    변신을 하고 나면 거대 구렁이는 성년 암수와 맞먹는 힘을 발휘했지만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다. 몇 년간 힘이 크게 줄고 수명도 단축되었다. 그래서 청야망들도 목숨이 위급한 순간이 아니면 변신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하필 청야망의 내단이 암수들에게는 보약과 같아서 암수삼림에서 두 요수가 마주치면 사생결단으로 싸워댔다. 눈앞의 두 요수도 단둘이 암수삼림 외곽에서 충돌했으니 싸움을 피할 수는 없었다.

    청야망이 고개를 높이 쳐들고 쉭쉭 거렸다.

    암수는 거대한 늑대처럼 생겼는데 털이 까맣고 꼬리는 표범처럼 가늘어 우아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체형으로 보아 성년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동족에 비해 약간 마른 편에 속했다.

    그러나 암수는 거대 구렁이를 탐욕스럽게 노려보면서도 바로 달려들지 않았다. 성년 암수가 청야망과 싸우면 내단을 차지하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반대로 청야망에게 당해 큰 부상을 입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암수는 거대 구렁이를 마주친 것이 반가웠지만 경거망동할 생각은 없었다. 청야망은 변신을 하면 강해지는 대신 변신하는 찰나에 빈틈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 때를 노려 공격한다면 훨씬 쉽게 상대를 잡을 수 있었다.

    반대로 청야망은 언제라도 변신할 태세로 위협했지만 변신을 꺼리는 눈치였다. 이렇게 두 요수의 대치가 지속되었다.

    시간이 흘러 한식경이 지나갔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자 견디다 못한 암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암수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구렁이 주변을 천천히 배회했는데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그림자가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았다.

    청야망이 호흡이 가빠져 빠르게 쉭쉭 거렸다.

    후웅!

    암수의 눈빛이 사나워진 순간, 앞발톱에서 어두운 빛이 번득였고 새까만 꼬리는 잔영을 남기며 허공을 후려쳤다.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들려왔다.

    상대를 주시하던 청야망이 그것을 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거대 구렁이는 검푸른 비늘을 번득이며 바람을 불어넣은 것처럼 몸을 부풀렸다.

    퍼퍽!

    거의 한 호흡 만에 구렁이의 비늘이 뜯겨나가고 이전보다 훨씬 큰 몸뚱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푸른 구렁이는 이제 화려한 무늬의 은백색 구렁이로 변해있었다.

    구렁이의 몸에는 크고 작은 주술문자들이 은은하게 은색으로 빛났고, 머리에는 나선 문양이 새겨진 새하얀 뿔이 솟아나 있었다. 평범한 뿔이라고 보기에는 굉장히 날카로웠다.

    거대 구렁이의 눈이 피처럼 붉게 달아올라 광기를 드러냈다. 구렁이가 변신을 마치자 암수도 본격적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검은빛을 반짝이고 어둠 속에서 사라진 것이다.

    다음 순간 구렁이 옆에서 검은빛이 번득이고 어둠 속에서 암수가 달려들었다. 발톱에서 뻗어 나온 여러 개의 빛줄기가 구렁이의 목을 노렸다.

    목에 난 몇 조각의 붉은 비늘은 바로 청야망이 변신할 때 드러내는 약점이었다. 평범한 검으로도 이곳을 찌르면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을 텐데 암수의 날카로운 발톱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이 약점은 신기하게도 청야망이 변신하는 찰나의 순간에만 드러났다가 곧 사라졌다.

    퍼펑!

    발톱에서 날아든 빛에 청야망의 신형이 떨렸다. 빛줄기에 스치기는 했지만 반사적으로 피한 덕에 치명적인 일격은 당하지 않았다. 거대 구렁이의 뒷목에 상처자국이 보였지만 그다지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쉬익!

    구렁이는 크게 분노하며 꼬리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러자 허공에 푸른색 꼬리 허상이 나타나 암수를 향해 날아갔다.

    공격이 실패하고 바로 반격이 들어오는데도 암수는 당황하지 않았다. 도리어 몸이 흐릿하게 변하며 양 옆으로 검은빛의 괴수들을 불러냈다.

    괴수들은 어두운 잿빛의 빛덩이처럼 흐릿했다. 그들은 나타나자마자 암수와 함께 발톱을 휘둘렀다.

    쇄액!

    콰콰쾅!

    발톱에서 튀어나간 빛과 푸른 꼬리 허상이 허공에서 충돌해 커다란 폭음이 울렸다. 발톱 빛과 꼬리 허상이 동시에 사라진 것으로 보아 비긴 듯 했다.

    펑-

    그 때, 잿빛 그림자 괴수 머리 위에서 푸른빛이 폭발하더니 거대 구렁이가 나타나 전광석화처럼 그림자 괴수를 집어삼켰다. 거대 구렁이가 머리를 부들부들 떨며 괴수를 통째로 삼키고 다른 그림자 괴수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것을 본 암수가 득달같이 몸을 날렸다. 입을 벌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요수는 청야망을 물어뜯어 절단내려는 심산인 듯했다.

    그러나 변신 후의 청야망의 속도는 암수에 뒤지지 않았다. 거대 구렁이가 방향을 틀어 청야방 본체를 향해 거대한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정면 대결을 택한 것이다. 이 때 구렁이의 원래 목표였던 또 다른 잿빛 그림자 괴수가 기다란 밧줄처럼 변해 청야망을 뒤쫓았다.

    콰쾅! 쾅!

    굉음이 연달아 울리고 괴수들이 한데 섞여 물어뜯고 싸우는 통에 누가 승기를 잡고 있는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리고 요수들과 멀찍이 떨어진 곳, 굵은 거목 속 동굴에는 세 사람이 허공에 뜬 거울을 둘러싸고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신기하게도 거울의 앞면은 푸른빛이 흐르고 뒷면은 은빛으로 반짝였다. 푸른빛 안에서 암수와 청야망의 전투가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곳에 앉아 있는 이들은 각각 푸른 장포를 입은 한립, 하얀 삿갓의 류수아, 누런 피부의 석곤이었다. 그들은 보름 넘게 날아 겨우 암수삼림에 도착했고 신중한 얼굴로 거울 속 괴수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반시진이 흘러 거울은 암수가 백여 마리의 검은 박쥐로 변신해 상처 입은 청야망을 뜯어 먹고, 뱃속의 내단을 파내 흥겹게 자리를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흠, 암수를 실제로 보니 어떤 것 같습니까?”

    류수아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거울로 법결을 던지자 풍경이 모호해졌다.

    “1 대 1로 붙으면 30합 정도면 죽이겠습니다!”

    석곤이 먼저 답했다.

    “서너 마리 혹은 열댓 마리가 동시에 나타나면요?”

    “그렇다면……. 세 마리 이상이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고 다섯 마리 이상이면 실패할 겁니다. 열 마리 이상부터는 고민 없이 달아나야 하고요.”

    석곤이 입술 끝을 실룩이고 사실대로 말했다.

    “이곳 암수삼림에는 암수들이 수만 마리가 서식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개체 간 실력 차이도 큰데, 조금 전 본 암수는 일반적인 성년 암수보다 약해 보였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오래 전투가 이어질 리 없지요.

    또한 특별한 고계 암수도 두 종류나 존재합니다. 첫 번째는 '삼안암수(三眼暗獸)'로 일반적인 암수보다 훨씬 강하고 세 번째 요안에서 괴이한 광선을 발사해 그것에 맞으면 몸이 썩은 나무토막처럼 문드러진다더군요. 두 번째 암수왕(暗獸王)은 금색 털을 지닌 요수인데 실력이 얼마나 강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전에 암수삼림에 진입했던 수사가 멀리서 수백 마리 성년 암수를 통솔하는 암수왕을 보고 당장 달아났다는 기록이 전부라서요.”

    류수아가 진지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저도 경전에서 관련 기록을 보았습니다. 삼안암수의 경우 한 마리라면 홀로 상대할 수 있을 듯하고, 두 마리 이상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금색 암수왕은 요수 떼를 통솔한다니 분명 신통이 삼안암수 이상이겠지요.

    저희가 힘을 합쳐 싸워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암수왕이 암수삼림 내에 여러 마리가 있을 리는 없습니다. 드넓은 암수삼림 속에서 하필 암수왕을 만난다면 운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이겠죠. 지금부터 걱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한립이 듣고 있다 생각을 밝혔다.

    “네, 옳은 말씀입니다! 저희의 목적은 한 달 내로 조용히 암수삼림을 통과하는 것이니 어차피 최대한 암수들을 피해 이동해야겠지요. 날아서 가면 며칠이면 지날 거리를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답답하기는 하지만요.”

    “다른 선택이 없지 않습니까? 날아서 이동하면 금방 암수 떼에게 발각되어 포위당하게 될 테니까요.”

    류수아가 탄식하고, 한립도 쓴웃음을 지었다.

    “이전 수사들의 경험에 따르면 낮에는 암수들의 실력이 줄어드는 대신 경계는 더욱 삼엄해진다고 합니다. 많은 삼안암수들이 일부러 낮에 숲을 돌아다니며 순찰을 한다더군요. 밤이 되면 암수들의 실력이 느는 대신 고계 암수들은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경계도 허술해진다고 하고요.”

    류수아가 덧붙였다.

    “그렇다면 우리도 밤에 이동하자는 말입니까? 저는 원래 반대로 하려고 했는데요.”

    그 말에 속곤이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저도 류 선자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낮에는 고계 암수들이 자주 출몰할 뿐 아니라 저희가 은신하기도 더욱 어렵지 않습니까. 아마 다른 요수들은 몰라도 삼안암수의 눈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보통 눈이 많은 괴수들은 환술이나 은신술을 꿰뚫어보는 신통을 지닌 경우가 많으니까요. 낮이라 해도 행적을 들켜 암수 백여 마리에게 포위당한다면 더욱 빠져나가기 어려워질 겁니다.”

    한립은 생각을 정리하며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습니다. 그럼 밤에 가는 것으로 합시다!”

    “두 분 모두 동의하셨으니 바로 출발하는 것으로 하지요. 하루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마음이 놓이겠습니다. 아, 혹시 따로 은신에 유용한 술법이나 보물을 준비해 오셨는지요?”

    류수아가 두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리 물어보시는 것을 보니, 류 선자께서 따로 준비해온 것이 있는 모양이군요.”

    눈치 빠른 한립이 바로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고 미소지었다.

    “역시 한 형이십니다! 사실 출발하기 전 사부님께서 천변환면(千變換面) 세 개를 빌려주셨거든요. 이걸 쓰면 어떤 모습으로든 변할 수 있고 누군가 강력한 의식으로 훑거나 싸움을 하지 않는 이상 들킬 일이 없습니다. 두 분도 고명한 은신술을 지니셨겠지만 암수들을 속이기에는 이만한 것이 없지요.”

    류수아가 웃음을 흘리며 세 장의 얇은 가죽을 꺼내들었다.

    “천변환면이라면 명성이 자자한 보물이 아닙니까! 채 선배님의 독문 비법이 담긴 보물을 써보게 되다니 제가 운이 좋습니다.”

    석곤이 좋아하며 그 중 한 장을 불러들여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한립은 천변환면이란 보물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석곤의 반응으로 보아 대단한 보물임이 틀림없었다. 그도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얇은 가죽을 불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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