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9화. 암수삼림(暗獸森林)
*
“저것도 분명 진해원에 맞먹는 흉수일 겁니다! 오래 있을 곳이 못되니 어서 떠나시지요.”
류수아가 곧바로 수결을 맺어 남색 빛줄기를 휘날리며 날아갔다. 상고 흉수끼리의 싸움이라니, 주변을 얼쩡거리다가 휘말려 화를 당할 것이다.
빛줄기 세 개가 빠르게 하늘을 갈랐다.
콰르릉!
그들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해안가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 여파로 하늘을 뚫을 듯 솟아오른 파도가 한립 일행이 잠시 멈추었던 곳까지 쇄도했다.
다행히 그들은 상고흉수들과 멀리 떨어져 육지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광한계에 영계에서는 이미 멸종된 상고흉수들이 지천으로 깔려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가는 내내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유적을 찾기도 전에 목숨부터 잃는 것 아닌가 모르겠어요.”
육지에 이르자 석곤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광한계에 상고흉수들이 서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다고 들었습니다. 저희가 운이 좋지 않아 동시에 상고흉수를 두 마리나 마주친 것입니다.”
류수아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운이 안 좋아서라……. 그건 모르겠고 시작부터 어째 심상치 않기는 합니다.”
“저희같이 수행하는 사람들은 본래 역천의 존재라고 할 수 있지만, 길흉화복과 같은 운을 완전히 믿을 수도 배재할 수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앞으로는 운이 더 좋기를 바라야겠지요.”
류수아가 작게 미소 지었다가 석곤이 말이 없자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가 현재 위치를 알아볼 것이니, 한 형께서 호법을 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생각이군요.”
한립이 둘이 어떤 방법으로 위치를 확인할지 궁금해하며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는 바로 푸른 빛줄기로 날아올라 넓게 의식을 퍼트리고 사방을 경계했다.
“석 수사, 시작하시죠.”
“하하,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류수아와 석곤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아오라 허공에서 멈추었다. 한립과 두 사람은 삼각 구도를 이루며 떨어져 있었다.
여인과 석곤이 소매 속에서 각각 하얀 원반과 노란 족자를 꺼내들어 날린 후 수결을 맺고 주술을 외웠다. 그러자 원반이 열댓 배로 불어나 둥근 보름달처럼 커다랗게 변했다.
노란 족자도 둘둘 말려있던 것이 펴지며 노란 기운이 번졌다. 족자에 희미하게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다.
팟.
밝게 퍼지던 노란 기운이 수축하고 족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대신 노란 빛의 점들이 나타나 노란 빛의 장막으로 뭉쳐졌다.
석곤이 기합소리를 내자 보름달 모양의 원반이 노란 빛의 장막 속으로 스며들었고, 그들의 주술소리는 점점 커졌다.
우웅!
신기하게도 노란 장막에 여러 산과 강의 모습이 빼곡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워낙 넓은 지역을 담다보니 거대한 산도 콩알만 했지만 지형이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한립이 허공에 펼쳐진 빛의 지도를 보고 눈을 빛냈다.
“이 광한도(廣寒圖)는 사부님과 단 선배님께서 광한계에 다녀왔던 이들의 기억을 하나로 모아 만든 것입니다. 광한계 전체는 아니고 7, 8할은 담겨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류수아가 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물론 지금은 우리가 지도에 표시된 지역에 있는지가 중요하겠지요.”
석곤이 말을 마치고 지도를 향해 기운을 쏘아 보냈다. 지도가 밝은 빛을 반짝이자 하얀 빛덩이가 구석에서 나타나 어딘가로 향했다.
“찾았습니다. 여, 여기가 만금령(万禽嶺) 주변이었군요! 그럼 방금 빠져나온 해역은 팔흉해(八凶海)가 아닙니까!”
류수아가 하얀 빛덩이가 반짝거리는 곳을 확인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만금령이요! 우리가 어쩌다 팔흉해에……!”
석곤도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하얀 빛덩이를 보고 있던 한립도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광한계에 들어오기 전 가장 위험한 지역들을 단단히 외워두었다.
그중에 만금령과 팔흉해도 있었다. 이름 그대로 팔흉해에는 여덟 마리의 상고흉수들이 서식했고, 만금령은 조류 괴수 수만 마리가 분포할 뿐 아니라 진해원에 맞먹는 흉악한 조류형 상고흉수가 세 마리나 있었다.
한립과 석곤이 얼굴을 찌푸렸고 류수아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만금령에 오를 수는 없습니다. 상고흉수들은 그렇다 치고 조류 떼만 만나도 죽은 목숨일 테니까요.”
“다행히 팔흉해는 무사히 벗어났지만, 만금령에서도 운이 따라 준다고 보장할 수는 없겠지요. 만금령을 피해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석곤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한립도 확고히 입장을 밝혔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네요.”
류수아가 한숨을 내쉬며 한립과 석곤을 한번씩 보고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이에 석곤의 얼굴이 한결 풀어졌지만 지도를 살피고는 다시 인상을 찡그렸다.
“만금령 양쪽으로는 남양사막(藍陽沙漠)과 암수삼림(暗獸森林)이 있습니다. 남양사막은 성계 이하의 존재에게는 만금령보다 무서운 곳이지요. 그곳에 내리쬐는 햇볕은 저희 수행으로는 겨우 반나절밖에 버티지 못할 정도로 강하니까요! 이곳, 암수삼림의 경우 영계에서는 멸종된 지 오래인 암수(暗獸)라는 종족이 사는데 밤이 되면 힘이 몇 배로 증가한다고 들었습니다.”
류수아가 지도를 가리키며 천천히 설명했다.
“둘 다 안 됩니다! 경전에 암수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는 하지만, 괴이한 특성을 가진 요수들은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지요. 암수삼림도 너무 위험하니 다른 곳을 통해 이곳을 빠져나갑시다.”
듣고 있던 석곤이 반대하며 나섰다.
“다른 곳이요? 어디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유적은 안 그래도 이곳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최단 거리로 이동해도 서너 달은 걸립니다. 중간에 지체할 일이 생기면 두 배까지도 걸리겠지요. 만금령을 피하기 위해 그 외곽을 돌아가도 보름이 더 걸리는데, 암수삼림마저 피해 가자고요?”
이번에는 류수아가 물러서지 않고 냉랭히 반박했고, 석곤도 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암수삼림이 괴이한 곳이란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전에 멀쩡히 통과한 사람이 없던 것도 아니고, 암수를 상대할 몇 가지 방법을 경전에서 보았으니 저희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노력도 하지 않고 빈손으로 돌아가면 단 선배님께는 무어라 변명하려고 그러십니까?”
류수아가 석곤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서늘하게 경고했다. 석곤도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한참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들고 한립을 보았다.
“한 형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저도 이번 일을 수락하며 두 선배님들에게 적잖은 보상을 받았습니다. 두 분이 합의만 하신다면 약간의 위험은 감수할 생각이 있습니다.”
“흠……. 한 형과 류 선자 모두 암수삼림이 두렵지 않다면, 저도 어디 말로만 듣던 암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이참에 구경이나 해봐야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석곤이 태도를 바꾸어 화통하게 웃어 보였다.
석곤의 반응에 류수아의 눈빛이 온화하게 돌아왔다.
“석 수사까지 마음을 먹었으니 우리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암수삼림을 통과해 봅시다. 저희 실력이면 무사히 이번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하하, 저도 그러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석곤도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들은 곧바로 날아올라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다 방향을 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바다 쪽에서 붉은색과 노란색 빛줄기가 해안가로 날아들었다. 복색이 다른 두 이족인이었다.
한 명은 키가 작고 뚱뚱한 노인으로 새까만 갑옷으로 온몸을 꽁꽁 가리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반대로 키가 크고 말라 뼈만 남은 시체처럼 보였다. 유달리 소매가 넓은 장포를 입고 있다는 점도 특이했다.
그들은 한립 일행이 떠나고도 전송된 위치에 남아있던 천운 수사들 중 일부였다. 그들은 지금 온몸에 먼지가 가득했고 의복도 온전치 못했다.
“살다 살다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상고흉수 두 마리를 동시에 마주치다니요. 그들이 서로 싸우던 중이 아니었다면 분명 우리를 잡아먹으려 들었을 겁니다. 금제에서 도망치느라 아끼던 보물들을 잃었습니다.”
뚱뚱한 노인은 정말 속이 쓰려 보였다.
“상고흉수를 두 마리나 만나고도 멀쩡히 도망쳤으니 천운이 따른 것이지요. 이상한 해역에서 열흘 넘게 갇혀 있다 겨우 벗어났는데, 상고흉수들이 나타나 저도 식겁했지 뭡니까.”
깡마른 수사는 아직 놀람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맞습니다. 그래도 지긋지긋한 해역은 벗어났군요. 저기 산이 보이는데 안전한 곳일지 모르겠습니다.”
“바다 위에서는 정위반(定位盤)이 작동하지 않았으니 여기서 다시 시도해보시지요? 위치를 알아야 행로를 정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해보겠습니다.”
깡마른 수사의 말에 뚱뚱한 노인이 입에서 옥 원반을 분출했다. 원반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며 커졌고 노인은 정혈을 한 모금 뱉어 그것에 흡수시켰다.
핏빛이 스며들자 옥 원반이 또렷하게 어떤 풍경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옥 원반을 살피던 수사들의 얼굴이 구겨졌다.
“어째서 아직도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뚱뚱한 노인이 미심쩍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곳이 특수한 지형이거나 아니면 가까운 곳에서 상고흉수들이 싸워 주변의 천지원기가 영향을 받은 탓이겠지요. 정위반은 전설 중의 몇몇 보물과도 비견되는 귀한 물건이 아닙니까.”
“이렇게 무용지물일 줄 알았으면 경매회에서 고가를 주고 구입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괜히 모아 두었던 영석만 날린 꼴이에요!”
깡마른 수사의 말에도 뚱뚱한 노인은 분통을 터트렸다.
“지금까지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지요. 여러 수사들이 낙찰받으려 경쟁했던 물건이 아닙니까. 독점적으로 이런 물건을 제련하는 정족은 광한계가 개방할 때마다 돈을 쓸어 담는다고 하더이다.”
깡마른 수사도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낙관적인 견해를 유지했다.
“알겠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저 산을 넘어가 다시 시도해 봅시다.”
뚱뚱한 노인이 전방의 산맥을 가리켰다.
“휴, 그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들은 다시 날아올라 붉은색과 노란색 빛줄기로 변해 산맥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 후로 그들을 다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울창한 수풀 위, 천운 이족인 세 명이 둔광을 발산하며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에는 노루의 머리에 사자의 몸을 한 괴수 열댓 마리가 바짝 쫓고 있었다.
* * *
휘잉.
눈보라가 치는 빙하의 땅, 온몸에 하얀 털이 길게 자라난 괴인들이 저공비행을 하며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세찬 눈보라에도 그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묵묵히 전진했다.
* * *
밀림 깊은 곳, 갈색 피부를 지닌 사내 두 명이 새빨간 깃발을 들고 거대한 나무를 향해 흔들었다.
키에에엑!
거목 줄기에 자라난 흉측한 악귀 얼굴이 깃발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에 둘러싸여 섬뜩한 비명을 질러댔다.
악귀 얼굴은 녹색 액체를 분출하고 나무뿌리를 촉수처럼 퍼트려 흙을 화염에 내던졌다. 평범한 불길이었다면 금방 사그라졌겠지만 붉은 화염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잠시 후, 거목이 더 이상 녹색 액체를 분출하지 못하자 주위의 화염이 달려들어 거목을 검은 재로 만들어 버렸다. 이에 갈색 피부 사내들이 깃발을 거두고 잿더미로 다가갔다.
그 안에서 비취색 결정을 찾아낸 사내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 * *
끝없는 사막 위. 머리에 뿔이 난 열댓 명의 남녀들이 이마에 금색 뿔이 세 개나 솟아 있는 청년의 말을 듣고 있었다. 엄청난 이야기에 다들 놀란 얼굴을 했다.
“이번 일을 위해 본 족 장로들께서 현천의 보물을 분리해 다섯 개의 역천의 보물을 만들어주시고, 천운 각지에 심어 놓은 첩자들을 움직여 천운 고위층의 주의를 끌어주셨습니다! 이번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들 똑똑히 명심하십시오.”
금각(金角) 청년이 엄숙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특사께서도 안심하십시오.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번 일은 성공적으로 완수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른 수사들도 의지를 북돋우며 소리쳤다.
“좋습니다. 저는 줄곧 천각성산(天角聖山)에서 수련해왔기에 여러분과 깊은 교류를 나누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본 족의 미래가 걸린 대업에 모두 전심전력을 다해 줄 것이라 믿습니다!
광한계에 본 족의 열댓 개의 무리가 진입했지만 오직 보물을 지니고 있는 다섯 개 무리만이 이번 임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다른 무리들은 예년과 동일한 행보를 보여 다른 종족들의 이목을 가릴 것이고요. 그럼 우리는 계획에 따라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금각 청년의 말이 끝나자 각치족 무리가 사막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