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8화. 진해원(鎭海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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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의 석곤이 몸에 힘을 주자 피부가 점점 새까맣게 물들어 결국에는 새까만 석인(石人)으로 변했다. 두 손으로 수결을 맺자 노란 기운이 회색 안개가 되었다. 드디어 원자신광을 바깥으로 방출한 것이다.
“류 선자께서는 이걸 한번 막아 보시지요.”
슁!
석곤이 크게 소리치며 손바닥에서 회색 빛기둥을 발사했다. 빛기둥들이 천여 가닥의 희색 실로 퍼지며 날아갔다.
쉬쉬쉬쉬쉭!
류수아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수결을 맺었다. 호리호리한 여인의 몸에서 회색 기운이 솟아올라 거대한 빛의 수레바퀴로 변했다. 빛의 바퀴는 서서히 굴러 회색 실들과 충돌했다.
똑같은 원자신광에 특유의 신묘한 신통은 발휘할 수 없었기에 오직 위력 차이로 승부가 날 것이다. 세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회색실과 회색 수레바퀴가 폭발해 무(無)로 돌아갔다. 무승부였다.
“흐하하, 이건 어떻습니까!”
석곤이 유쾌하고 웃고 두 손을 합장했다가 펼쳤다. 그러자 새까만 돌처럼 변한 그의 몸에서 강력한 회색빛이 흘러나와 태양이 뜬 것처럼 주위가 밝아졌다.
그러나 류수아 역시 삿갓 아래에서 정체모를 수결을 맺으며 주술을 읊기 시작했다. 그녀 등 뒤에 떠오른 회색빛의 수레바퀴가 급속도로 회전하며 대량의 주술문자들을 불러냈다.
수레바퀴 중심에서 작은 주술문자들이 깨져 나갔다가 하나로 합쳐지며 거대한 주술문자로 변해갔다.
“가라!”
석곤이 소리치며 두 주먹을 휘두르자 수백 개의 주먹 허상이 뻗어나갔다. 각각이 중간에서 회색 기운으로 변해 류수아를 향해 밀려들었다. 엄청난 기세였다.
그럼에도 여인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코웃음을 쳤다. 회색빛의 수레바퀴가 진동하고 그 안에서 거대한 주술문자가 날아올랐다.
주술문자는 회색 기운을 퍼트리며 하늘을 뒤덮었다. 이에 석곤이 날린 수백 개의 회색 빛구슬들이 거대한 주술문자에 닿아 소리 없어 사라져갔다.
석곤은 연달아 두 번이나 공격에 실패하자 씁쓸하게 웃었다.
“에이, 됐습니다. 선천적 원자체 앞에서 제 원자신광은 비할 바가 못 되는군요.”
그는 미련 없이 패배를 인정하고 지면으로 내려섰다. 성격이 시원시원했다.
“석 수사, 낙심하실 일이 아닙니다. 저도 최근에 깨달은 신통을 펼치지 않았다면 수사의 공격을 상쇄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본질적인 원자신광의 위력은 엇비슷했으니까요.”
류수아가 작게 웃고는 거대 주술문자를 가리켰다. 회색빛의 거대 주술문자는 점점 빛의 점으로 흩어져 다시 회색빛의 수레바퀴 속으로 돌아갔다. 여인은 수레바퀴를 거두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괜히 제 얼굴에 금칠해 주실 것 없습니다. 저는 이번 공격에 전력을 다했지만 선자는 지닌 원자신광의 6, 7할 밖에 발휘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 수사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저는 상대가 안 되는 수준이십니다.”
“석 형께서 상대가 되지 못하신다면 겨우 보물의 힘을 빌려 간신히 원자신광을 발휘하는 저는 언급할 가치도 없겠네요.”
한립이 석곤의 말을 받아 자신을 낮추었다.
류수아와 석곤은 그 말이 진심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나, 상대가 보물의 힘을 빌려 원자신광을 발휘하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그들을 능가할 수 없을 거라 믿었다.
셋은 서로서로 겸손을 떨며 이야기를 마쳤다. 한립의 원자신광에서 대해서는 시험해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립이 지닌 원자의 보물이 원자신산 한 채일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류수아의 승리로 합겹술은 그녀가 주관을 하고 한립과 석곤이 보조하기로 했다. 그들은 환영진을 펼쳐 엉망이 된 섬을 가리고 합격술 연습에 돌입했다.
열흘이 지나는 동안 다른 수사나 바다요수가 나타나지 않아 작은 섬은 평화로웠다. 다시 사나흘이 흘러 섬의 환영진이 사라지고 세 개의 빛줄기가 날아올랐다.
류수아는 낯빛이 좋았고 한립은 차분했으며 석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 그것만 보아도 훈련이 순조롭게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짧은 시간 안에 이뤄낸 성과가 놀랍습니다, 겨우 열흘 만에 마음가는대로 합격술을 펼칠 수 있게 되다니요.”
류수아가 감격했다는 어조로 말했다.
“류 수사가 원자신광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우리를 잘 이끌어 준 덕분입니다. 이번에 합격술을 익히며 깨달은 바가 많습니다.”
“저도 원자신광이 이렇게 다양한 변화가 가능한 신통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류 선자의 가르침 덕에 많이 배워갑니다.”
석곤과 한립이 차례로 감사를 표했다.
“과찬이십니다. 선천적으로 원자체를 타고난 덕에 깨달음이 빠른 것이지 두 분과 같은 조건이었다면 아마 훨씬 뒤떨어졌을 것입니다.”
류수아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제 서둘러 유적을 찾아 떠나볼까요! 바다 위에서는 도저히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으니 육지를 찾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항상 그래왔듯 석곤이 먼저 조바심을 냈다. 그러나 다른 이들도 반대하지 않고 방향을 정해 빠르게 날아갔다.
그들은 밤낮 없이 나흘간 바다를 가로질렀지만 겨우 세 개의 섬 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그나마도 전부 바다 요수가 자리 잡고 있었고 기운이 만만치 않게 강해보였다.
최소한 그들이 해치운 문어 요수보다는 수행이 훨씬 높은 요수들이었다.
류수아와 석곤은 내심 다행이라고 여겼다. 한립의 말을 들었기에 벌써 육지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지 안 그랬으면 괜한 시간 낭비를 할 뻔했다.
닷새가 흐르자 겨우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하, 드디어 지겨운 바다를 벗어납니다!”
석곤이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석 수사, 앞으로 훨씬 더 조심해야 합니다. 이전에 다녀간 수사들의 말에 따르면 육지는 바다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합니다. 상륙하는 대로 최대한 기운을 숨겨 상고 흉수의 주의를 끌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류수아도 반가운 기색이었으나 충고 역시 잊지 않았다.
“마음 놓으세요, 류 선자. 제가 아무리 치고 박고 싸우는 것을 즐겨도 제 주제는 아는 사람입니다.”
석곤은 설렁설렁 답했지만 여인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사실 상대의 수행과 나이를 생각하면 당연히 이런 기본적인 사항을 강조할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평소 너무 호승한 성품이 강해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해본 소리였다.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둘을 향해 무어라 말하려는데 멀리서 돌풍이 불고 하얀 물안개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저건…….”
한립이 움찔하며 하려던 말을 삼켰고, 류수아와 석곤도 기이한 현상에 눈길을 돌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그 자리에 멈춰 멀리 해수면 위를 응시했다.
그들이 멈춘 순간, 하얀 물안개 속에서 원숭이 울음소리가 들리고 주변 바다가 크게 출렁이며 사나운 기운이 난폭하게 터져 나왔다. 거대 문어 요수보다 몇 배는 더 큰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머리에 뿔이 나고 털이 북슬북슬한 원숭이 괴수였다.
끼끼끼끽!
괴수는 바다 속에서 머리를 내밀며 듣기 괴로운 날카로운 소리를 질러댔다.
“……!”
그 소리에 한립 일행은 두꺼운 보호막을 펼쳐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날카로운 괴성에 순간 머리가 울리고 전신의 정혈이 요동쳐 몸을 가누지 못할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원숭이 괴수의 울음소리가 더욱 광폭하게 변하며 괴수의 포효소리에 하늘이 웅웅 울릴 정도였다!
바닷물이 음파에 진동하며 무수히 많은 소용돌이가 형성되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어류들이 음파에 당해 배를 뒤집은 채 둥둥 떠올랐다.
이때 한립 일행의 보호막도 무언가에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류수아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석곤은 바위처럼 굳게 버티고 있었지만 힘줄이 울룩불룩 솟은 것이 전력을 다하는 듯했다.
한립이 그나마 가장 나은 편으로 안색이 조금 창백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압박감 속에서도 그들은 달아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두 다리가 허공에 묶인 사람들 같았다.
원숭이 괴수의 울음소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커져서 투명한 음파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또한 주변 바닷물이 음파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밀려나가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어냈다. 해수면 위의 구덩이라니 상상도 못할 위력이었다.
투명한 음파는 엄청난 거리를 이동하면서도 힘이 줄어들지 않았고 당장이라도 한립 일행을 덮칠 기세였다.
류수아와 석곤은 경악해 몸부림쳤다. 석곤은 입을 벌려 기묘한 소리를 냈고 우람한 몸에서 노란빛을 뿜어냈지만 도저히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투명한 음파가 가까워질수록 석곤의 얼굴에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류수아도 마찬가지였다. 겁에 질린 눈빛이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두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투명한 음파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한립은 금빛을 번뜩이며 서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리 크지 않았지만 류수아와 석곤은 송곳처럼 귓속을 파고든 소리에 전신에 법력이 흐르기 시작했고 무형의 금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석곤은 허공을 박차고 노란 빛줄기로 튀어나갔고 류수아는 수결을 맺어 신형을 흐릿하게 바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한립도 코웃음을 치자마자 금빛 빛줄기로 변해 달아났다.
그들은 쉬지 않고 엄청난 거리를 날아간 다음에서야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투명한 음파가 그곳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그들이 금제에서 벗어나 달아난 순간 원숭이 거대 괴수의 눈이 사납게 번득였다. 그러나 괴수는 그들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전방의 해안가를 노려보며 포효를 이어갔다.
“어떤 바다 요수가 이만한 신통을 부린단 말입니까! 포효소리로 움직임과 법력을 봉쇄해버리다니, 전설 속의 산악거원이라도 된단 말입니까.”
석곤이 위급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진령 산악거원은 아닙니다. 정말 진령급이었다면 첫 번째 포효소리를 듣고 우리 전부 죽었겠지요. 아마 상고 흉수인 진해원(鎭海猿)이 아닐까 합니다.”
류수아가 평정을 되찾고 주저 없이 말했다.
“진해원! 교룡을 찢어죽이고 성계 정도는 한입에 삼킨다는 포악한 원숭이 요수 아닙니까!”
“진해원의 천후(天喉)는 상고 시대부터 유명했으니 맞을 겁니다. 저희가 달아날 수 있었던 것도 흉수의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고요.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진 꼴이지요.”
류수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살아 도망친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한 형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류 선자와 저 모두 불행을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석곤이 복잡한 얼굴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저도 놀랐습니다. 한 형께서 진해원의 천후 비술을 깨트릴 신통을 발휘하실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오래 전 우연히 익힌 정신 비술입니다. 요수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겨우 포효소리의 위력을 막아낸 것이지요.”
한립은 대단치 않다는 듯 말했고 나머지 두 사람은 미심쩍은 얼굴을 했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한 형께서 제 목숨을 살려주신 셈입니다. 이 은혜는 이후에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류수아가 빙긋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신세를 지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요! 이후 저도 한 형에게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너무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광한계는 위험한 곳이니 진해원 같은 상고 흉수도 한두 마리가 아니겠지요. 다음번에는 두 분이 제 목숨을 구해주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두 사람의 말에 한립이 미소로 답했다. 그런데 그때 멀리서 또 다른 괴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원숭이 괴수와 달리 천상의 소리처럼 맑고 고운 지저귐이었다.
흠칫 놀란 세 사람은 말을 멈추고 먼 곳을 응시했다.
이미 하얀 물안개가 옅어졌기에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진해원 맞은편 해안 절벽 위에 보라색 거대 새가 맑게 울고 있었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크기로는 원숭이 괴수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았다. 게다가 보라색 거대 새는 음파 공격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원숭이 괴수 쪽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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