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6화. 진입
*
전당 밖으로 나가 하늘 위의 태양을 올려다보니 막 오시(午時)가 되어가고 있었다. 한립은 전당 안쪽의 거대한 진법들로 시선을 옮겼다. 다양한 진법 법기를 든 병사들이 두 진법을 둘러싸는 중이었다.
진법에 박힌 빼곡한 영석들이 빛을 발했다. 그러나 한립은 바닥의 진법보다는 그 위쪽을 더욱 주시했다. 수레바퀴만 한 빛덩이가 오색빛을 머금고 떠 있었다.
그가 아무 것도 모르고 발동시킨 광한령이었다. 이때 천기자 등 성계 고위층들이 전당을 빠져나오며 눈을 빛냈다.
“발동 시간에 늦어서는 안 된다. 바로 광한의(廣寒儀)를 옮겨 나오거라!”
“예!”
병사 몇 명이 은색 빛줄기로 변해 대청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푸른색 거대 종을 들고 나왔는데 용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는 것이 무척 위엄이 느껴졌다.
쿵!
광한의가 광장에 떨어지는 소리가 육중하게 울렸다.
천기자는 눈썹을 끌어올리며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다른 손으로는 하얀 법결을 날려 보냈다.
푸른 거대 종이 진동하며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푸른 주술문자들을 뿜어냈고 표면에서 열댓 개의 용 머리 조각이 꿈틀꿈틀 거렸다.
한립을 포함한 연허기 수사들은 광한의를 자세히 살폈지만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후, 천기자 등 노괴들이 더는 광한의를 신경 쓰지 않았고, 무슨 이유인지 비 씨 청년은 아직도 전당 안에 있었다.
광한계로 들어가는 이족 수사들은 수시로 거대 진법과 광한의를 살펴보며 긴장된 기색을 드러냈다.
광한계는 수련의 고비를 넘게 해주는 기회의 땅이었지만 적잖은 수사들이 죽어 나가는 위험지역이기도 했다. 그러니 어찌 불안하지 않겠는가!
한립은 평온한 얼굴로 한쪽에 서서 진법과 광한의보다는 하늘에 떠있는 여러 개의 작열하는 태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크아아아앙!
시간이 흘러가고 광장 중심에서 갑자기 용울음 소리 같은 것이 울려 퍼졌다.
다른 수사들과 마찬가지로 한립도 광장 쪽을 바라보았다. 푸른빛을 머금은 광한의 표면에 열댓 마리 용 머리가 눈을 부릅뜬 채 울부짖고 있었다.
오색 보호막 안에 있던 병사와 선발 수사들은 전부 고요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광한계가 개방되었다. 진법을 발동해 통로를 열라!”
전당 안에서 비 씨 청년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광장으로 빠져 나왔던 수사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미리 대기하던 병사들은 각종 진법 법기를 발동했다.
오색찬란한 법결들이 법기 속에서 쏟아져 나와 진법 안으로 흡수되었다.
후우웅!
두 개의 진법이 광포하게 진동하자 굉장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진법의 영향으로 오색 보호막 아래로 새까만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광풍이 몰아치고 먹구름 속에서 천둥소리가 크게 울렸다. 크고 작은 검은 회오리바람이 발생해 서로를 먹어치우며 커져갔다.
놀라운 천기현상이었다!
진법과 천기 현상 사이에 뜬 오색 빛덩이가 갈라지며 찬란하게 빛나는 금색 영패가 나타났다.
“한 수사와 월 선자는 이제 각자의 무리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가게! 진법으로 들어가 광한령을 발동하면 되네!”
거센 바람소리를 뚫고 천기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립과 월 선자는 지체 없이 전당 안으로 되돌아가 각각 거대 진법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머지 수사들도 굳은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진법 발동을 맡은 병사들은 진법 원반 속에서 계속해서 진법 깃발과 법결을 날리고 있었다.
‘이런!’
진법으로 들어간 순간 한립은 전율했다. 광한령과 그의 의식 연계가 순식간에 몇 배로 강해진 것을 느낀 것이다. 광한령이 낮게 윙윙거리며 그를 반겼다.
다행히 천기자가 광한령을 어떻게 발동시키는지 미리 귀띔해주었고, 한립은 진법 중심에 서서 빠르게 수결을 맺어 열손가락을 튕겼다. 법결들은 허공의 영패 속으로 사라졌다.
광한령은 금은색 빛을 내뿜었고 표면에서 금은색 주술문자가 날아올라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빛의 진법을 형성했다.
쉭!
한립은 호흡을 가다듬고 손끝에서 푸른 빛기둥을 내뿜었다. 푸른빛을 머금은 영패가 맑게 울며 광한령 주변의 진법이 금은색 빛기둥을 분출했다.
하늘 높이 솟은 금은색 빛기둥이 먹구름 속 검은 회오리바람 속으로 파고들었다.
콰르릉!
빛기둥이 먹구름을 헤집고 다니자 그 안의 검은 기운들이 요동쳤는데 회오리바람은 사라지기는커녕 서로 합쳐져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콰쾅!
진법 안에서 영패가 번개처럼 날아올라 거대 소용돌이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새로운 태양이 뜬 것처럼 눈부신 빛을 발산했다.
다음 순간 검은 소용돌이 속에서 경천동지할 공간파동이 몰아쳤다. 검은 소용돌이가 사라진 자리에 거대한 균열이 벌어져 있었다. 하늘에 그림을 그려놓은 것처럼 괴리감이 느껴지는 공간균열이었다.
이때 한립은 의식이 공간균열 사이로 미친 듯이 유실되는 것을 감지했다. 안색이 창백해진 한립이 소리쳤다.
“지금입니다!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그의 말에 진법 주위의 병사들이 허공에 진법 법기들을 투척하고 동시에 수결을 맺으며 주술을 외웠다. 그러자 진법 법기들이 빛구슬로 변해 진법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거대 진법은 주술문자들이 가득한 기운을 방출했고 주술소리가 커질수록 그 기운은 한립과 다른 수사들을 휘감아 빠르게 회전했다. 결국에는 오색 기운이 그들을 감싸 고공의 균열 속으로 튀어 올라갔다.
나머지 거대 진법의 월 선자와 그녀의 일행도 똑같은 과정을 거쳐 균열 속으로 사라졌다. 오색 기운이 공간균열 속으로 사라진 순간 두 개의 공간균열도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밖에서 전송과정을 지켜보던 천기자와 성계 장로들이 막 한시름을 놓는데 전당 안에서 비 씨 청년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년 후, 광한계가 다시 열릴 때까지 두 개의 전송진법을 철저히 보호해야 한다. 누구든 허락 없이 접근하는 자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죽여라.”
“존명!”
광장의 수사들이 전부 전당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진법 발동을 담당한 이족인들이 물러나고 은색 갑옷을 입은 병사들과 열댓 마리의 거대 꼭두각시들이 몰려들어 진법 주변을 물샐틈없이 지켰다.
* * *
검은색 균열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한립은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어지러워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잠시 후, 그는 엄청난 두통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쪽빛 하늘과 짙푸른 물결만이 가득한 바다 위에 우두커니 떠있었다.
석곤, 류수아 등 나머지 열네 명도 주변으로 전송되었고 대부분 아직도 전송 후유증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크하하, 드디어 광한계에 왔구나! 노부의 유일한 소망은 고비를 넘겨 성계에 이르는 것이니, 먼저 폐관 수련할 만한 곳을 찾아봐야겠습니다! 다들 다시 만날 날까지 건강하십시오!”
일행 중 백발노인이 먼저 주변을 살피고 웃음을 터트리더니 은색 빛줄기로 변해 날아가 버렸다. 그것을 본 다른 이들도 살짝 눈치를 살피다 세 명이 무리를 지어 다른 방향으로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11명뿐이었다.
“여러분 광한계가 수련의 고비를 이겨낼 기회의 공간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몇 달이면 충분합니다. 나머지 시간은 힘을 합쳐 보물을 찾으러 돌아다니셔야지요?”
말을 꺼낸 이는 삼각형 머리를 지닌 왜소한 체구의 괴인이었다.
“같이 돌아다닐 사람이 없어서 하필 금 수사와 힘을 합친단 말입니까? 천운 수사들 중 금 형께서 번번이 남의 뒤통수를 친 것을 모르는 자가 있을까요? 헛고생 마십시오. 풍 형, 운 형 우리도 출발합시다.”
평범한 외모에 두꺼운 금팔찌를 여러 개 찬 거한이 대뜸 조소하더니 청족의 두 형제에게 말했다. 그들은 거한과 미리 약속했는지 두말 않고 둔광을 일으켜 무리를 떠나갔다.
“저희도 슬슬 움직일까요?”
수사들이 하나둘씩 떠나자 한립이 태연한 얼굴로 석곤과 류수아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럽시다. 우리야 당연히 함께 움직여야지요!”
석곤이 웃으며 답했고 류슈아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방향을 정해 날아갔다. 남은 이들이 연합을 하든 말든 그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전송 장소에서 멀리 벗어났을 때 류수아가 입을 열었다.
“사부님의 말씀에 따라 일단 은밀한 장소를 찾아 원자신광 합격술을 연습한 다음 움직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기치 못한 위험에 처해도 대비할 수 있게 말입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 셋이 힘을 합치면 웬만한 흉수(凶獸)는 상대도 되지 않을 텐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1년 후면 돌아가야 하는데 유적을 찾아 할 일을 하고, 수행을 통해 수련 고비도 넘기려면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습니다.”
석곤은 피부가 회백색 돌처럼 단단하고 우락부락한 사내였다. 그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석 수사. 원자신광 합격술은 사부님께서 이 날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내신 것입니다. 위력이 상상을 초월하지요. 강적을 만나기 전에 함께 합격술을 익혀 두어야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기분이 상했는지 여인의 목소리가 냉랭해졌다.
“그런가요? 솔직히 다들 하루 빨리 유적을 찾아 금제를 깨고 나머지 시간은 스스로 수련의 고비를 뛰어넘는데 쓰고 싶어 하는 줄 알았습니다.”
“한 수사의 의견은 어떠한지요?”
류수아가 눈을 빛내며 한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 의견이라……. 이번 임무는 반드시 저희 셋이 힘을 합쳐야 성공할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서로 한걸음씩 물러나 타협하시지요! 딱 보름 동안만 합격술을 맞춰보고 결과가 어떻든 그 다음에는 바로 유적을 찾아 떠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어느 정도 합격술에도 익숙해질 테지요. 겨우 보름이니 석 형도 참아주실 수 있겠지요.”
한립이 잠시 생각을 하다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건…….”
“좋습니다! 수사의 말대로 따르지요.”
“모두 그렇게 하길 바라신다면 저도 따르겠습니다.”
한립의 말에 류수아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석곤도 동의했다.
“그러면 적당한 곳을 찾아 합격술을 연구해 봅시다.”
한립이 그런 둘을 보고 미소를 머금었다.
세 사람은 한층 속도를 높여 바다 위를 날아가면서 의식을 퍼트렸다. 처음에는 주변에 섬이 꽤 많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하루를 꼬박 수색하고서야 겨우 작은 섬을 찾을 수 있었다.
해질녘이라 주변이 어둑어둑해질 때였다. 작은 섬을 발견한 한립 일행은 일단 속도를 줄이고 주변을 살폈다.
“무언가 이상합니다. 의식으로 섬을 살필 수도 없고, 아무래도 요기가 진동하는 게 요수가 서식하는 듯합니다.”
석곤이 얼굴을 굳혔다.
“섬 아래에 요수가 한 마리 숨어 있습니다만 수행이 저희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한립이 명청령안을 발동해 살펴보곤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수사께서는 의식으로 섬이 살펴지십니까?”
한립의 말에 류수아가 조금 놀라 물었다. 그녀도 섬과 인근 해역을 의식으로 훑어보았으나 의식이 제안돼 흐릿하기 짝이 없었다.
“운 좋게 특수한 비술을 익혀 눈도 밝고 귀도 남들보다 잘 들리는 편입니다.”
“아주 좋습니다, 한 형! 앞으로 적잖은 위험을 피할 수 있겠어요.”
한립의 솔직한 말에 석곤이 기뻐하며 넉살 좋게 한립을 한 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립은 그저 담담하게 웃을 뿐이었다.
“한 수사 덕에 앞으로 더 안전하게 다닐 수 있겠습니다. 저 섬에는 요수가 머물고 있다니 다른 섬을 찾으러 가실까요? 겨우 작은 섬을 위해 힘 뺄 필요는 없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