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5화. 천강인(天罡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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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아는 천지영물에 속했기에 자유롭게 지선이 남겨둔 육체에 드나들며 체내의 법력을 운용할 수 있었다. 대량의 법력을 연화시키며 곡아도 영기가 충만해졌으니 일거양득인 셈이었다.
2년간 맡은 일을 잘 해주었기에 한립은 꽤나 만족하고 있었다. 곡아가 휴식을 취하러 가자 한립은 회색 기운을 뿜어 지선의 빈 육체를 끌어왔다. 조그맣게 줄어든 몸뚱이가 한립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한립은 밀실을 휙 둘러보고 몸을 돌려 대문 밖으로 향했다.
그 후, 한 달 동안 그는 운성의 큰 상점을 돌며 재료들과 법기들을 사 모았다. 그러는 사이 단천인과 천기자 등이 차례로 그를 찾아왔고 반나절쯤 머물다 흡족한 얼굴로 떠나갔다.
“…….”
그러던 어느 날 대청에서 눈을 감고 명상을 하고 있던 한립에게 불현듯 붉은 빛덩이가 날아들었다. 그는 빛덩이를 잡아채 의식을 불어넣었다.
‘드디어 시작이로구나.’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동부 밖으로 걸어 나갔다.
동부 밖에는 열댓 명의 이족인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에선 네 명의 연허급 수사들은 노란 장포를 걸치고 그 위에 은빛 갑옷을 입고 있었다. 한 손에 기다란 창을 든 모습이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이었다.
“저희는 천기자 선배님의 명을 받들어 한 수사를 회합 장소로 안내하기 위해 왔습니다.”
연허급 수사 한 명이 한립을 보고 포권을 했다.
“안내 부탁드립니다.”
한립은 놀라는 기색 없이 그들의 말에 따랐다.
이전에는 광한령이 이미 발동된 것을 아는 자가 소수였지만 광한계 개방이 코앞에 이른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적잖은 이들이 한립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천기자는 누군가 그를 납치하거나 죽일 것을 대비해 호위 병사들을 파견한 것이다.
거구의 병사가 한립의 말을 듣고 뒤쪽의 병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열댓 명이 양쪽으로 갈라서자 그 중간에 푸른빛의 마차가 나타났다. 옥빛 깃털을 지닌 거대 새가 이끄는 마차는 굉장히 아름다웠다.
한립은 곧바로 마차에 올랐고, 황포 이족인 네 명은 신속하게 마차의 네 귀퉁이에 서서 주변을 경계했다.
새들이 맑게 울며 날개를 펼치자 마차가 날아올랐고, 나머지 병사들은 은색 원반을 방출해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푸른 마차는 고공을 날아 운성 어딘가로 향했다.
운성은 이전보다 훨씬 경계가 삼엄했고 곳곳에 순찰병들이 포진해 있었다. 한립은 중요해 보이는 몇몇 거점에서 희미하게 금제의 파동이 느껴지는 것을 눈여겨 보아두었다.
마차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곧장 날아 한립이 광한령을 발동했던 객잔으로 이동했다. 현재 객잔 주변으로 금제가 겹겹이 펼쳐있었고 수십 개의 거대한 기둥이 설치되어 있었다.
기둥에서 발산되고 있는 다채로운 빛은 오색 보호막 덕분에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주변에는 다른 곳보다 경계하는 병사들이 열댓 배는 더 많았고 꼭두각시들도 백여 마리나 대기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모두 결단기 이상의 수행을 지녔고 원영기 수사들도 상당했다. 서둘러 의식을 퍼트려 보니 연허급도 2, 30십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천라지망(天羅之網)이 따로 없었다.
푸른 마차에는 따로 신분을 증명할 표식이 되어 있는지 아무도 중간에 막아서거나 심문하지 않았다. 그들이 빛의 장막에 가까워지자 늑대를 닮은 영수를 탄 병사들이 날아들었다.
“철 통령! 한 수사를 모셔왔습니까?”
푸른 갑옷을 입은 사내가 늑대를 타고 멀리서 소리쳤다.
“하하, 천 선배님께서 화 형을 보내셨군요. 한 수사는 마차 안에 있으니 안심하고 금제를 열어주시지요.”
노란 장포 거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알겠습니다.”
늑대에 탄 화 수사가 문제가 없다는 소리에 기뻐하며 다른 병사들과 함께 품에서 금제영패를 꺼내 뒤쪽의 보호막을 비추었다.
다양한 색의 빛기둥이 영패에서 뿜어져 나와 작은 빛의 진법을 이루었고 윙윙거리며 갈라져 통로를 형성했다.
오색 기운이 흐르는 통로가 퍽 신비로웠다. 노란 장포 거한이 푸른 새들을 재촉해 마차를 통로 쪽으로 몰았고 나머지 병사들도 그 뒤를 바짝 쫓았다. 통로를 한참 지나서야 출구가 나타났다. 그것을 본 한립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런 사정을 모르고 몰래 보호막 내부로 진입하려는 자가 있다면 금방 포위되고 말 것이다.
그때 푸른 마차가 멈추고 보호막 내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진법 두 개에 수없이 많은 수정돌이 박혀 있었고 각각 심오한 문양과 주술이 새겨져 다채로운 빛을 반짝였다. 멀리서 보아도 무척 아름다운 진법이었다.
두 진법 사이에는 새로 지은 전당 하나를 제외하면 다른 건물은 없었다. 대신 수사들로 가득했다. 족히 수천은 될 법한 이족인들이 모여 있었는데 대부분이 경비를 맡은 병사들이었고 나머지는 다양한 복색을 입고 있었다.
전부 수행이 높은 수사들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단 한 명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한립이 탄 푸른 마차가 허공에 등장하자 상당수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하지만 노란 장포 거한은 개의치 않고 마차를 몰아 전당 바라 앞에 있는 공터에 안착했다. 마차 옆에는 한립이 타고 온 것과 똑같이 생긴 새하얀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제 임무는 한 수사를 이곳으로 모셔오는 것이었습니다. 안으로는 모실 수 없으니 들어가시지요.”
노란 장포 거한이 공손히 포권을 했다.
“안전히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립도 웃으며 포권을 하고 마차에서 내려 지붕 뚫린 전당으로 걸어갔다. 전당을 지키던 열댓 명의 병사들은 그가 마차에서 내리자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잠시 살필 뿐 길을 막지는 않았다.
그는 병사들이 늘어선 통로를 지나 드디어 드넓은 공간 안에 이르렀다. 안에는 4, 50명의 사람들이 안거나 서서 양쪽으로 나뉘어 있었고 그 가운데 상석에는 젊은 백발 청년이 자리했다. 비 선배였다.
그리고 천기자, 단천인, 채류앵 등 일고여덟 명의 합체기 수사들은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 뒤로 연허기 최고봉의 남녀들이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이들은 한립이 들어오자 모두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러 선배님들을 뵙습니다!”
한립은 비 씨 청년을 알아보고 흠칫 놀랐지만 태연하게 노괴들을 향해 예를 올렸다.
“한 수사까지 도착했으니 되었군. 광한계는 몇 시진 후에 개방될 것일세. 잠시 자네에게 같이 전송될 수사들을 소개하지.”
천기자가 만면에 미소를 띄고 먼저 입을 열었다.
“예, 선배님.”
“자네가 우연히 광한령을 발동했다는 녀석이군.”
비 씨 청년이 한립을 훑고 의아한 기색으로 말을 걸어왔다.
“맞습니다, 비 선배님.”
“나를 아는가?”
“사족경매회를 찾아 주셨을 때 멀리서 모습을 뵈었습니다.”
“거기서 나를 보았었군. 그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 겨우 상족 7계의 수행을 지녔으나 법력과 의식은 동급을 훨씬 초월하는구만. 내 오래전 우연히 얻은 이보 ‘천강인(天罡印)’은 발동하려면 법력과 의식을 크게 소모해야 하는 대신 성계 미만의 수사에게는 쓸모가 많다네. 자네에게 주도록 하지.”
그를 뜯어보던 비 선배가 뜬금없이 이런 말을 했다. 백발 청년은 주저 없이 소매 속에서 은빛을 날렸고, 한립은 움찔했지만 서둘러 감사 인사를 하고 그것을 받아들었다.
푸른 기운에 끌려온 것은 콩알 크기의 보라색 문자가 각인된 인장이었다. 바로 ‘천강인’ 세 글자가 고대 문자로 새겨져 있었다.
대승기 수사가 갑자기 보물을 주니 미심쩍기는 했지만 한립은 사양하지 않고 그 이유를 생각했다. 천기자 등 다른 수사들도 당황스러운 얼굴로 서로 눈치만 살펴보았다.
그러나 비 씨 청년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입을 닫아버렸다.
“비 선배님이 직접 보물을 내려주시다니 한 수사의 복일세. 그게 있다면 광한계 안에서 더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을 터! 시간이 많이 않으니 다른 수사들과 인사를 나누도록 하지.”
천기자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하려던 일을 진행했다.
“천 선배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이쪽은 월 선자일세. 자네와 마찬가지로 광한령을 발동하게 될 수사로 따로 무리를 이끌고 광한계로 진입할 예정이네. 같은 장소로 전송될 가능성은 낮지만 우연히 마주친다면 서로 챙겨주도록 하게.”
천기자가 남색 궁장 차림을 한 창백한 얼굴의 여인을 가리켰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겉으로는 여인이 어떤 종족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립은 밝게 웃으며 포권을 했다. 이에 월 선자는 작게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석충족 석곤은 같은 급에서 방어 신통으로 손꼽히는 인재이지. 그 옆의 청족(靑族) 풍소와 운등은 형제로 협공을 해서 적을 상대하는데 능하고…….”
천기자는 서있는 연허 최상급의 존재들을 일일이 가리키며 간략하게 소개를 했다. 상족 7계 존재를 대하는 그들의 반응은 대부분 무심했고 몇몇은 냉소적이었으며 소수만이 웃는 낯을 보였다.
상족 9계인 그들이 수행이 2계나 낮은 이족인을 상대해 줄 이유가 없었다. 대부분 처음 비 선배의 칭찬도 그저 상대의 특수한 공법에 기인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천기자가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한립이 동급 수사 여럿을 죽인 실력자라는 것을 알았다. 선발 인원 모두를 제압할 거라 장담할 수는 없어도, 천기자가 보기에 한립은 연허급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였다.
한립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얼굴로 꼬박꼬박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중에는 채류앵과 단천인의 제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석충족 ‘석곤’이 단천인의 제자였고, 채류앵의 제자인 삿갓 여인의 이름은 ‘류수아’였다.
“원래 광한령 한 개로 13명밖에 진입하지 못했는데 만고족과 정족의 진법대사들이 합심해 전송진법을 개량한 끝에 그 수를 15명으로 늘리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총 30명이 이곳에서 광한계로 진입할 예정이지. 이제 무리를 둘로 나눌 것이니 호명하는 이들은 월 선자와 함께 전송이 되고 나머지는 한 수사를 따라 전송이 될 것이다. 묵살, 풍소…….”
소개를 마친 천기자가 진행을 이어나갔다. 얼마 후 수사들은 둘로 나뉘어 월 선자와 한립 뒤에 섰다.
한립은 평온한 얼굴로 속으로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채류앵과 단천인이 어떻게 천기자를 매수했는지, 류수아와 석곤이 모두 그의 뒤에 서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립을 처음 본 것처럼 굴었다. 이렇게 되면 변명할 여지가 없으니 광한계 속 유적을 가보기는 해야 할 듯했다.
곧 낯선 얼굴의 성족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허기 수사들에게 광한계에서 주의해야할 점을 일러주었다. 모두 조사를 마친 것이었지만 모두 귀를 기울였다.
노인이 설명을 마치고 천기자가 하얀빛 속에서 오륙 십 개의 보물을 불러냈다. 고리, 사발, 깃발, 지팡이 등등 별별 보물이 다 있었지만 가장 흔한 비도와 비검 류의 보물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보물을 보는 수사들의 눈빛이 뜨거워졌고 몇몇은 천기자에게 무어라 질문을 하려 했다. 그러나 천기자가 먼저 선수를 쳤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가! 보물들은 전부 운성 비밀 창고에서 가지고 온 것들로 자네들의 순조로운 귀환을 위해 하나씩 나눠주는 것일세. 전부 따로 연화할 필요 없이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것들이지. 딱 한 개씩 고를 수 있고 나머지는 노부가 회수할 것이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다들 희색을 보였고, 기운을 쏘아 보내거나 직접 몸을 날려 마음에 드는 보물을 챙기느라 분주했다.
그중 기운이 강한 보물들은 몇 사람이 동시에 달려들어 다양한 영기의 빛으로 반짝였다. 허공에서 요동치는 보물이 결국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는 각자의 능력에 달려 있었다.
순식간에 허공의 보물이 절반으로 줄었지만 아직도 몇몇은 남은 보물을 두고 고민했다. 보물의 기운이 강력하면 나쁠 것은 없었지만 어떨 때는 오히려 자신의 공법과 잘 어울리는 평범한 보물이 더욱 위력적일 때도 있었다.
한립 역시 아직 나서지 않고 있었다.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푸른빛으로 보물 하나를 끌어왔다. 푸른빛이 가시고 나타난 것은 벽옥 부채로 표면에 아름다운 산봉우리가 새겨져 있고 기이한 한기(寒氣)가 느껴졌다.
빙한(氷寒) 속성의 이보였다.
‘흠?’
한립이 만족스럽게 입 꼬리를 끌어올리다 순간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월 선자가 그가 들고 있는 남색 옥 부채를 보고 있었다.
그녀 역시 보물을 고르지 않았었는데 결국에는 자 형태의 보물을 선택했다. 하얀 기운이 어린 자는 놀랍게도 극한의 한기를 품은 보물이었다.
마지막 사람까지 보물을 가져가자 천기자는 미리 말한 대로 나머지를 회수에 소매 속에 넣어버렸다.
“시간이 다 되었으니 발동 준비를 시작한다! 나머지는 모두 퇴장하도록.”
천기자가 비 씨 청년과 시선을 교환하고 명을 내렸다. 병사들이 몰려들어오고 대기하던 수사들은 전당 문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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