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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93화 (750/2,000)

993화. 사 부인

*

“붙들 수도 없고 놓아줄 수도 없다면, 대외적으로는 경계를 늦추고 대내적으로 감시를 강화해 첩자 스스로 빈틈을 드러내게 하는 것은 어떨지요.”

채류앵은 대청 안 수사들을 찬찬히 훑으며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유인책이라…….”

비 씨 청년이 침음했다.

“그렇습니다. 첩자가 무슨 수로 수색을 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시간 내로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달간만 대량의 병사를 풀어 성을 샅샅이 수색해보고, 그 후로 점차 인원을 줄여 일부러 달아날 허점을 만들어 주는 게 어떨까요? 대규모 수색에서 첩자를 색출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고, 아니라면 그 후에 몰래 성문에 정예병을 숨겨 놓고 상대가 함정에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대외적으로 중단한 수색도 은밀히 지속해야 하고요. 첩자도 훔쳐간 물건을 급히 성 밖으로 반출해야 하니 걸려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채류앵은 천천히 계획을 늘어놓았다.

“그거 좋은 방법이로군. 하지만, 봉쇄를 풀었다가 변신술에 뛰어난 첩자가 정말 검문을 통과해 달아나 버리면 어찌할 것인가?”

고개를 끄덕이던 비 씨 청년이 얼굴을 굳혔다. 정족 미부인의 방책이 쓸 만하다고 여기던 다른 수사들도 그녀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하하, 비 선배님. 아직 제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저 들어보시겠습니까?”

채류앵이 빙긋 웃었다. 이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비 씨 청년에게 전음으로 한 이야기였다. 조금 의외였지만 비 씨 청년은 입술을 달싹이는 채류앵의 전음을 들으며 점점 희색을 보였다.

일다경이 지났을 때 그녀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게 사실인가?”

비 씨 청년은 채류앵에게 묻고 있었지만 시선은 뜻밖에도 천기자 쪽을 향해 있었다.

“제가 어찌 이런 일로 농을 하겠습니까?”

채류앵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수사들은 그녀와 청년 사이에 비밀스런 대화가 오가자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물론 눈치가 있었기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 묻지 않았다.

“내 채 선자의 말을 어찌 믿지 못하겠는가. 사 부인께서도 들으셨을 텐데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비 씨 청년은 고개를 돌려 노파를 향해 물었다. 퍽 공손한 말투였다.

“내가 무슨 생각이 있겠습니까. 이 늙은이는 복잡한 일은 딱 질색입니다. 강적이나 나타나면 도움을 주려 했던 것이지 다른 일은 알아서 하시지요. 저는 먼저 돌아가 휴식을 취해야겠습니다. 나머지 일은 비 수사께서 알아서 결정하시지요.”

사 노파가 슬며시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말하는 것이나 움직임이나 기력이 너무 없어보였다. 비 씨 청년이 쓴웃음을 지으며 무어라 대답하려는데 노파는 어느 새 문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 모습에 다른 성족 존재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다들 노파가 13족의 대승기 존재라는 것은 알았지만 정확히 어느 종족 출신에 어떤 신통을 지니고 있는지는 몰랐다.

노파는 불면 날아갈 것처럼 허약한 모습을 하고 다녔지만 비 씨 청년조차도 후배의 태도를 취하며 조심스럽게 대했다. 이에 아무도 얕잡아 보지 못했다.

청년은 노파가 문밖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작게 한숨을 쉬고 시선을 돌렸다.

“사 부인께서 떠나셨으니 상의할 것도 없겠군. 채 수사의 건의대로 처리하세. 이번 일은 채 선자와 백 수사에게 맡길 테니 다른 이들은 전적으로 협력하도록 하게.”

비 씨 청년이 과감히 명을 내렸고 대청 안 수사들은 공손히 명을 받들었다.

“다음으로 광한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네. 천기자, 자네가 설명을 하게.”

청년이 화제를 바꾸어 천기자를 보았다. 광한계라는 말에 대청이 조금 술렁였다.

“천 수사, 광한계가 곧 개방되는 것입니까?”

성질 급한 장로가 기다리지 못하고 물었다. 채류앵과 단천인도 잠시 시선을 마주쳤다 아무렇지 않게 눈길을 돌렸다.

“만고족 통령대전에 위치한 광한의(廣寒儀)가 이틀 전 반응을 보였습니다.”

천기자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답했다.

“벌써요?”

“이런 상황에 광한계가 개방된다니…….”

“조금 이른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수사들이 웅성거리자 대청이 소란스러워졌다.

“광한령이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광한의가 반응을 보인 것이 이상합니다. 공교롭게도 각치족 천운을 침공한 때라 더더욱 시기가 좋지 못하고요. 하지만 광한계 개방은 뇌명대륙에서 각 종족이 세력을 키울 절호의 기회입니다. 어떻게 대비해야 좋을지 비 선배님과 여러 수사분들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천기자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천 수사의 말이 맞네. 우리 천운의 세력이 각치족 침공을 막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광한계가 곧 개방된다면 그 대비도 해야겠지.”

비 씨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광한계 안에서의 일은 전부 후배들의 운과 실력에 좌우되는 것 아닙니까! 저희야 하루빨리 광한계 진입 인원을 결정하고 전송진법을 설치하는 일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이번에 저희 13족이 차지한 광한령의 수가 너무 적고 또 운성에는 두 개뿐이니 두 개의 진법만 완벽하게 설치해두면 될 것입니다.”

온 몸이 새까만 거한이 입을 열었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현재 운성에 연허기 최정상에 오른 수사들이 너무 적습니다. 진입할 수사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겠습니다.”

“또한 각치족 첩자가 이 틈에 무슨 일을 꾸밀지 모르니 전송 진법을 단단히 지켜야 할 것입니다.”

자리에 앉은 수사들이 분분히 의견을 내놓았다. 비 씨 청년은 성계 수사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채류앵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채 선자, 보충할 내용은 없는가?”

“여러 수사들께서 좋은 의견을 내주셔서 저는 따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채류앵이 움찔하며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그렇다면 이번 광한계 개방은 관례대로 준비하도록 하게. 수사들의 명단은 알아서 정하도록 하되 반드시 연허 후기의 수행이어야 하네. 전송진법의 경계를 평소의 세 배로 강화하고 주변을 금지구역으로 정해 낯선 자는 절대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야. 진법은 만고족이 담당할 것이니 천 수사와 만고족 장로들이 수고를 해줘야겠군.”

비 씨 청년이 수사들의 의견을 모아 결정을 내렸다. 천기자를 비롯한 양옆의 만고족 장로들이 허리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

“그렇지, 광한령을 발동할 자들은 선발을 마쳤는가?”

“한 명은 이미 선발하였고, 나머지 하나는 이미 발동되어 선발할 필요가 없습니다.”

청년의 물음에 천기자가 머뭇거리며 답했다.

“광한령을 발동할 자는 까다롭게 고르고 발동 의식을 따로 치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게 광한령을 얻게 된 경위가 조금 복잡합니다.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천기자는 조심스럽게 한립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렇다면 그자는 천운 사람도 아니고 심지어 뇌명대륙 출신도 아니란 소리로군.”

“그러합니다. 이번 일에 협조하는 대신 저희 쪽에서 대륙 간 전송진을 사용할 수 있도록 약조하였습니다. 전송에 드는 영석은 스스로 구해야 할 테지만요.”

“대륙 간 전송진을 쓰게 하는 것은 별문제가 아니네. 관건은 그자의 신분이 확실하냐는 것이지.”

“그 점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 자의 도움을 받아 광한계로 천운의 수사들을 진입시키기만 하면 그 후에야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천기자가 자신 있게 답했다.

“이미 광한령을 발동했다니 이제와 걱정해봐야 소용없는 일이겠지. 혹시 모를 일이니 감시를 붙여두게.”

비 씨 청년의 당부에 천기자가 곧바로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천기자 등 만고족 장로들이 자리에 앉자, 어두운 녹색 피부의 성족이 일어나 또 다른 사안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전방의 육 수사에게서 소식이 왔습니다! 각치족이 증원을 해 성계 수사가 대여섯 명이나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 바람에 성 세 채를 잃고 퇴각하는 중이라는데 아무래도 이번에 각치족들이 단단히 작정한 모양입니다.”

“즉시 성계급 수사 다섯 명과 중, 고계 수사 천여 명을 선발해 최전방으로 파견하게. 상대가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가만있을 수는 없지.”

“예!”

비 씨 청년이 냉소하며 신속하게 명을 내렸고, 이어서 다른 안건들이 줄줄이 거론되었다.

최고위층이 모인 회의는 반 시진이 지나서야 끝났고, 성계 수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맡은 바 임무를 위해 흩어졌다.

* * *

한립은 그 때 동부의 밀실 안에서 폐관수련을 하는 중이었다.

1년 뒤, 어느 날 갑자기 운성을 떠난 그는 겨우 반나절 만에 은밀히 성 안으로 들어와 다시 밀실에 틀어박혔다. 그 후로 3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한립은 여전히 어두운 밀실 안에 앉아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한 명이 아니라 세 명이었다. 금색 비늘로 뒤덮인 사내, 새까만 기운이 요동치는 모호한 신영,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녹색 피부의 인물.

그들은 각기 다른 수결을 맺고 방석에 앉아 있었다 한참이 흐른 후, 금빛의 사내가 번쩍 눈을 떴다. 그의 두 눈에서 남색빛이 폭발적으로 반짝였다.

“저 선배가 어찌 여길……. 설마!”

파앗.

금빛 사내는 밀실 천장으로 하얀빛을 날리며 중얼거렸다. 밀실이 환해지며 세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빛 사내는 다름아닌 한립이었다. 그는 미간을 좁히고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랏빛을 띄는 녹색 피부의 인물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한립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검은 기운 속에서 불경 소리가 들리며 삼두육비의 금색 괴물이 나타났다. 세 머리 중 두 개의 얼굴은 뚜렸했는데 나머지가 눈코입이 없이 모호해 섬뜩한 분위기를 풍겼다.

두 얼굴이 눈을 뜨고 허공을 응시했다.

“손님이 온 것 같으니 너희는 수련을 계속하고 있거라.”

한립은 나머지 둘에게 분부를 내리고 금빛을 반짝이며 밀실 벽 한쪽으로 뛰어들었다. 금빛이 벽으로 스며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굳게 닫혀 있던 그의 동부 대문이 서서히 열렸다.

한립이 멀쩡한 모습으로 그 안에서 걸어 나왔다.

“채 선배님을 뵙습니다. 제 누추한 처소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바깥에는 정족 미부인 채류앵이 서있었다.

“한 수사는 내가 찾아온 것이 반갑지 않은가 보군.”

“아닙니다. 선배님 같은 분이 찾아주시는데 환영할 일이지요. 그런데 이분은…….”

한립은 예의바르게 대답하며 시선을 채류앵 뒤쪽으로 향했다. 여인이 하얀 삿갓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내 얼마 전 거둔 제자일세.”

채류앵이 간단히 소개를 하자 여인은 조용히 고개를 숙일 뿐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것을 본 한립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그들을 대청으로 안내했다.

그들이 자리를 잡자 한립은 인형괴뢰(人形傀儡)를 조종해 과일과 차를 내오게 했다. 채류앵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놀란 눈빛을 보냈다.

“영력이 농후하게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천년 이상 된 찻잎을 따서 만든 것이로군. 차나무 자체도 희귀한 품종이니 운성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좋은 차일세.”

채류앵은 진심을 담아 칭찬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선배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따로 찻잎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한립이 미소를 지으며 소매 속에서 우윳빛 함을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다.

“사양하지 않고 받겠네. 이 차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말이지.”

채류앵은 부드럽게 웃음을 머금었다.

한립은 그녀가 우윳빛 함을 거두는 것을 보면서도 어째서 찾아온 것인지 묻지 않았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채류앵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 그들은 이런저런 한담을 나누며 한 시진 가량을 앉아 있었다.

“한 수사, 못 본 사이 인내심이 꽤 늘었군그래. 지금까지도 내가 어찌 찾아온 것인지 묻지 않고 말이야.”

“인내심이라뇨. 그저 선배님이 말씀해주실 것을 알고 있었기에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어째서 찾아왔는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을 테지?”

“아……. 혹시 광한계와 관련된 일로 찾아오신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맞네! 제자를 데리고 자네를 찾아온 건 바로 그 일 때문일세. 아마 단 수사께서도 수사 한 명을 데리고 오실 것이야.”

“그 말씀은, 혹시 이분이…….”

한립은 삿갓 여인을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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