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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92화 (749/2,000)

992화. 염금정(炎金精)

*

한립은 명청령안으로 하얀색 영수의 알처럼 보이는 물건을 살펴보았다. 하얀 표면에는 붉은 얼룩무늬가 가득한 알은 새빨간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것은 무슨 알입니까?”

“안목도 훌륭하십니다. 보물들 중에 가장 먼저 이것을 고르시다니요. 노부가 용암 깊은 곳에서 희귀한 만황 염용접(炎鎔蝶)을 죽이고 얻은 하나뿐인 영충의 알입니다. 그 염용접이 저 못지않은 불 속성의 신통을 지녀서 1년이나 고생을 하고 함정을 파서 겨우 죽일 수 있었지요. 부화 후에 정성들여 키우면 더 없이 훌륭한 영수가 되어줄 것입니다. 저는 이미 본명 운수가 있어 다른 영수에게 공을 들이기 어렵지만요.”

“허 수사와 등급의 신통을 지닌 염용접이라니 놀라운 일입니다. 저 역시 다른 영수가 있는 것이 아쉽습니다.”

한립은 붉은 곤충의 알에서 시선을 거두고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이에 허 노괴가 움찔하곤 바로 미소를 머금었다.

“아,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한 형의 수행에 어찌 오랜 세월 함께한 영수가 없겠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보물도 살펴보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다음 옥함을 끌어와 열어보았다…….

일다경이 흘러 그는 노인이 내놓은 옥함을 거의 다 확인했다. 대부분 진귀한 재료였고 위력적인 법기와 연허기 수사의 수행에 도움이 되는 단약도 들어있었다.

이 중 무엇이라도 사족경매회에 내놓았다면 고가에 낙찰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 옥함을 확인하고 다시 내려놓자 허 노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으십니까?”

“전부 귀한 물건인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염용접(炎鎔蝶)은 불 속성 공법을 익힌 수사에게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보물일 테고요. 다만 제게는…….”

한립이 난처하다는 얼굴로 말을 맺지 못했다.

그렇지만 한립이 말하지 않는다고 허 노괴가 어찌 그 뜻을 모르겠는가.

“수사, 도대체 어떤 보물이어야 교환할 것입니까? 괜찮으시다면 직접 제시를 해주시지요. 노부에게 없는 물건이라면 따로 구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한립은 고민에 빠졌다.

필요한 물건이야 많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청원자에게 구해주기로 한 진귀한 재료들만 해도 한 무더기가 아닌가!

문제는 기린본원으로 재료를 교환한다면 그 중 몇 개는 받아야 수지 타산이 맞는다는 점이다. 자신이야 기린본원의 가치를 아니 당연하게 여기겠지만 허 노괴는 그가 과욕을 부린다고 오해할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괜히 평판만 떨어지고 상대와 악연을 맺게 되는 것이다.

“허 수사, 제가 필요한 물건은 무척 희소한 것들이라 아마 구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굳이 말할 것도 없지요. 하아, 천지원기의 일은…….”

한숨을 내쉰 그가 곤란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 모습에 허 노괴는 소년의 얼굴을 보곤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품에서 짙은 남색 옥함을 꺼내놓았다.

“일단 이것을 확인해 보는 것이 어떠십니까? 이전에 내놓은 것들보다 더욱 귀한 물건입니다. 본 족의 장로께서도 필요로 하던 것이라 그분께 바치려고 아껴두었으나 윤상이를 위해 내놓는 것입니다. 한 형께서도 이걸 사양하지는 않을 거라 자신할 수 있습니다.”

허 노괴의 행동은 예상한 대로였다. 누구든 거래를 하면 처음부터 가장 귀한 물건을 내놓지는 않는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옥함을 끌어오고는 기이한 한기에 깜짝 놀랐다.

옥함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굉장히 차가웠다. 그가 천천히 옥함의 뚜껑을 열자 안에서 주먹만 한 크기의 새빨간 금속이 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

한립의 눈빛이 흔들렸다. 유리 같기도 하고 금속 같기도 한 물체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보았지만 믿기지 않았다. 돌연 하얀 단검을 불러낸 그는 새빨간 금속을 찔러보았다.

기이하게도 아무런 충돌음이 들리지 않았다. 검 끝이 새빨간 금속에 닿는 순간 촛농처럼 녹아 푸른 연기를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염금정(炎金精)을 다 찾아내셨단 말입니까!”

한립은 안색이 달라지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알아보시는군요. 염금정은 불 속성 법보를 제련하는 데 최상의 재료로, 평범한 보물에 약간만 첨가해도 불속성 신통을 더할 수 있지요. 수사의 소모성 보물이 아무리 진귀해도 이걸로 보상이 될 것 같습니다만.”

“정말 마음을 굳히신 것입니까? 안 그래도 염금정이 필요하던 차였으니 수사께서 너무 손해를 보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렇게 하시지요, 제가 따로 영석 오백만 개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한 수사의 말에 따르지요.”

허 노괴는 염금정을 내놓고 속이 쓰렸지만 한립의 말에 안색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염금정이 아무리 귀해도 아끼는 후인의 앞날보다 우선일 수는 없었다.

“그럼 이제 어찌 하면 좋을지…….”

허 노괴는 한립이 옥함을 챙기는 것을 보고 슬쩍 재촉했다.

“이 영석들을 받으신 다음 안심하고 산 정상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바로 보물을 발동해 천기 현상을 일으킬 것이니 천지원기가 모여 들기만 기다리면 될 것입니다.”

한립이 웃음을 터트리며 저물탁에서 영석 주머니를 꺼내 주었다.

“알겠습니다. 저는 먼저 올라가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허 노괴는 한립이 미루지 않고 당장 행동에 옮기자 만족하며 곧장 동부를 떠나 산 정상으로 날아갔다. 한립은 그들이 멀어지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실소했다.

“이렇게 빨리 염금정을 찾을 줄이야! 이전에 얻은 금수정충과 혈행까지 더하면 범성진마법상을 실체화할 주재료가 모두 갖춰졌다. 다른 보조 재료들을 모으는 대로 법상의 몸을 응결할 수 있겠어!”

그는 눈을 빛내며 석문을 닫고 대청으로 달려가 제혼을 불러냈다. 이후의 일은 간단했다. 영수의 체내에서 진린본원 알갱이 하나를 뽑아다 불살랐다. 그러자 이전과 똑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알갱이는 금빛으로 변해 동굴 지붕을 뚫고 날아올랐고 산봉우리 위에 놀라운 천기 현상을 일으켜 주변의 천지원기들을 끌어 모았다. 이에 허 노괴는 신이나 허리춤의 주홍색 호리병으로 화교를 불러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기 현상이 흩어지고 천지원기들은 화교에 의해 모조리 흡수되었다. 지난번 보다 훨씬 민첩하게 움직여 다른 수사들의 이목을 크게 끌지도 않았다.

화교를 호리병에 거둔 노인은 아주 즐거운 기색으로 소년을 데리고 돌아갔다. 대청에서 구리거울로 바깥을 지켜보던 한립은 비술을 거두고 미소 지었다.

그는 의식으로 와와에게 몇 마디 당부를 남기고 다시 동부를 나섰다.

이번에는 운성의 대규모 재료 상점을 돌며 영석을 아낌없이 풀어 서른 여 가지의 재료들을 구입해 돌아왔다.

운성이 천운의 여러 종족들이 모여 사는 초대형 성이여서 망정이지 소규모 도시였다면 이렇게 쉽게 재료들을 모으기 어려웠을 것이다.

밀실로 들어간 그가 폐관을 시작한지 보름이 지났을 때, 운성에 극소수만이 아는 큰일이 벌어졌다.

원래도 빈틈없던 성문의 경비가 훨씬 삼엄해졌고 성안의 순찰도 빈번해졌다. 성에 처음 보는 외지인이 들어오면 정체모를 인물들이 들이 닥쳐 엄히 심문하기도 했다.

그 중 신분에 문제가 있는 자들은 조용히 제거되었다.

* * *

운성 어딘가, 비밀스런 대청 안.

열댓 명의 수사들이 기다란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아 마주보고 있었다.

그중 천기자 등 만고족 장로도 셋이나 보였고 정족 채류앵과 석충족 단천인 등 한립이 안면을 익힌 자들도 있었다. 나머지 낯선 얼굴들도 전부 천기자와 동급의 존재들이었다.

이렇게 많은 성계 수사들은 하나같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청 중간 상석에는 사내와 여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20대 중후반의 백의 청년과 백발이 성성한 늙은 노파였다.

노파는 그렇다 치고, 한립이 백의 청년을 보았다면 분명 크게 놀랐을 것이다. 그는 사족경매회에 나타났던 대승기 비 씨 청년이었다. 그는 전신에서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아직까지 각치족 첩자를 잡아내지 못하다니 벌써 달아났든지 아니면 꼭꼭 숨어버린 것이 분명하겠구만. 백 수사, 수매족이 이 일을 담당해왔으니 어찌된 일인지 설명해보게.”

비 씨 청년은 누군가를 응시하며 냉랭히 물었다. 비단 장포를 입은 백발의 청년은 어려워하는 기색으로 일어나 대답했다.

“비 선배님, 저희는 미혼술에 능한 인원을 대량으로 파견해 운성에 진입한 수상한 자를 일일이 심문하였습니다. 그 덕에 다른 강대 종족에서 보낸 첩자도 수백을 찾아냈고요. 하지만 공봉당(供奉堂)에 침입한 각치족인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운성을 떠난 것이 아닐까 의심되는 바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희의 눈을 피해 아직까지 숨어 있겠습니까.”

“그건 모를 일입니다. 각치족 첩자도 미혼술에 정통해 백 형이 파견한 인물을 속여 넘겼을지도 모르니까요.”

회색 기운에 둘러싸인 그림자가 옆에서 반박했다.

“다른 건 몰라도 미혼술만큼은 본 족이 13개 종족 중 단연 으뜸입니다. 창영 수사께서 그리 자신이 있으시면 음요족 수사들을 파견하지 그러셨습니까.”

“저도 그냥 걱정되어 한 말입니다. 미혼술이야 음요족이 수매족을 따라갈 수 있나요.”

백발 청년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창영은 대수롭지 않게 웃음을 흘렸다.

“됐으니, 쓸데없는 이야기들은 그만하게. 각치족 첩자가 운성을 빠져나갔을 리 없네! 물건이 사라진 순간 직접 봉쇄령을 내려 며칠 동안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두었으니까. 또한 공격당한 병사의 말을 들이니 상대는 겨우 연허기 수사라더군. 절대 백 수사 수하들을 속이지는 못했을 것이야. 십중팔구 아주 오래전부터 잠복해 온 자였을 테지.”

비 씨 청년의 말에 백발 청년과 회색 그림자가 공손히 수긍했고 다른 이들도 감히 딴 말을 하지 못했다.

“비 선배님의 말씀대로라면 어찌 해야 할까요? 운성 전역을 대대적으로 수색하면 오히려 혼란이 가중될 것입니다.”

천기자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나도 그것을 걱정하고 있네. 하지만 얼마 전 설치를 마친 운성 금제대진의 도면을 훔쳐간 자가 이대로 달아나게 둘 수는 없지! 도면이 각치족 대군에 넘어가는 날에는 성을 지킬 금제 태반이 뚫릴 것일세.”

“선배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각치족 첩자가 빠져나가게 놔둘 수는 없지요. 하지만 이렇게 매일 대규모 병사들을 동원해 순찰하고 경비를 삼엄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검은 턱수염을 기른 노인이 입을 열었다.

“영 수사에게 다른 좋은 방책이 있는가?”

비 씨 청년이 노인의 말에 반문했다.

“저보다는 여기 채 선자의 의견을 들어보시는 것은 어떻지요. 채 수사의 지략이라면 이 정도 문제는 가뿐히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검은 수염 노인은 손을 내젓고 뜬금없이 곁에 앉아 있던 채류앵을 언급했다.

“저 형, 농이 지나치십니다. 비 선배님과 사 산주께서 계신데 어찌 제 얕은꾀를 선보이겠습니까. 저는 그저 최선을 다해 분부를 받들 생각뿐입니다.”

정족 채류앵이 검은 수염의 노인을 힐끗 보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지금은 자신을 낮출 때가 아닐세, 채 수사. 나도 정족 장로인 자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군.”

비 씨 노인이 채류앵을 향해 분부했다.

“그럼 부끄럽지만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미부인은 언뜻 미간을 좁혔으나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비 씨 청년과 노파를 향해 예를 올렸다.

“채 선자의 의견이라면 저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맞습니다. 채 수사의 지략이야 알아주지 않습니까!”

채류앵이 일어나자 대청의 대다수가 밝게 웃으며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녀의 수행은 성족 존재들 중 끝자락이었지만 그 명성만큼은 높았다.

심지어 눈을 내리깔고 있던 노파도 주의 깊게 채류앵을 응시했고, 비 씨 청년도 조금 기대하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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