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1화. 운족(雲族)
*
몇 시진 후 영수 마차는 운몽산 아래에 도착했다.
한립은 마부에게 영석 하나를 던져주고 위쪽으로 날아올랐다. 그의 동부는 산중턱에 있었지만 운몽산에 거주하는 다른 이족인 수사들은 줄곧 거처에 틀어박혀 있거나 아니면 바깥을 떠돌아다녀서 누군가를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산중턱에 이른 한립은 거처 앞에 뜻밖의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새빨간 장포를 걸친 노인으로 주황색 호리병으로 기린본원이 만든 천기현상을 해결한 허 노괴였고, 다른 하나는 열네다섯 살로 보이는 청수한 소년이었다.
동부 주인이 돌아온 것을 감지했는지 허 노괴가 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얼마 전부터 이곳에 머물고 계신 한 수사가 맞습니까?”
“맞습니다. 허 수사께서 저를 만나러 여기까지 오셨군요.”
한립은 예의바르게 물었다. 동급 이족인들이 꺼리는 자라면 그만한 실력이 있을 것이다.
“허허, 바로 그렇습니다. 이 아이는 제 직계 후손이고요. 어서 한 수사께 인사 올리거라.”
“후배 허윤상이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예상과 달리 허 노괴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곁의 소년을 소개했고, 소년은 즉시 앞으로 나와 공손히 예를 올렸다.
의식으로 훑어보니 인족 축기기 최고봉에 달하는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소년의 나이를 생각하면 자질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노부가 갑자기 찾아와 실례가 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리가요. 허 수사께서 누추한 곳까지 와주셨으니 제 영광이지요. 자, 안으로 들어가 말씀 나누실까요?”
한립은 그가 이곳에 온 이유가 궁금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푸른 기운을 날렸다. 석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아름다운 청옥이 깔린 하얀 통로가 나타났다.
거처로 들어선 순간 한립은 의식을 퍼트려 제2원영의 의식과 연계했다. 허 노괴와 그 후손이 3일 전 찾아와 줄곧 기다린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일은 없었다.
한립과 허 노괴는 대청으로 자리를 옮긴 뒤 잠시 한담을 나누었고, 소년은 노인 뒤에 얌전히 서있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노부가 폐관 수련을 하다 거처를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듣자하니 한 수사께서 이 산에 자리를 잡는데 만고족의 천기자 장로께서 친히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분과는 어떤 사이십니까?”
“하하, 외지인인 제가 어찌 천기자 선배님과 깊은 인연이 있겠습니까. 그저 몇 년 전 우연히 만고족의 다른 수사에게 작은 도움을 주었고 그것을 계기로 천기자 선배님과 알게 되었을 따름입니다.”
허 수사의 뜬금없는 물음에 눈을 빛낸 한립은 평온하게 답했다.
“그랬군요! 만고족이 천운13족 중 제법 세력이 있고, 또 천기자 선배님은 만고족의 장로시니 그만하면 운성에서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겠습니다.”
허 노괴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노부가 이번에 수사를 찾아온 것은 사실 물어볼 것이 있어서입니다. 불쾌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그 말에 한립은 경계심을 높였으나 겉으로는 담담히 웃으며 답했다.
“무슨 일이든 물어보시면 아는 한에서 성실히 답해드리겠습니다.”
“한 수사께서 그리 말해주시니, 저도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허 노괴가 다시 미소를 머금고 차분하게 한립을 응시했다.
“며칠 전 산에 큰 소란이 일고, 허공에 막대한 기운이 결집했던 천기현상과 수사가 연관이 있으십니까?”
허 노괴는 눈에서 빛을 번뜩이며 한립의 반응을 살폈다. 이에 한립은 조금 놀랐으나 티내지 않고 가볍게 웃으며 반문했다.
“어찌 제가 연관되어 있다 여기십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날 천기현상이 광범위하게 벌어졌지만 폭발의 중심이 어딘지 가늠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우연히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 주변을 산책하다 수사의 동부에서 금빛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기도 했고요.”
“이미 보셨다니 저도 숨기지 않겠습니다. 그날 일은 본의 아니게 제가 벌인 것이 맞습니다. 수사께서 저 대신 천지원기를 깔끔하게 처리해 주셨으니 감사하다고 해야겠군요.”
“정말 수사가 한 일이었다니 잘되었습니다. 혹시 다시 그만한 천지원기를 모을 수 있겠습니까?”
허 노괴는 한립이 부인하지 않자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물었다.
“어째서 그런 것을 물어보시는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물론 설명해드려야지요. 한 수사께서는 제가 천운13족 중 어느 종족인지 아십니까?”
“그건 제가 견문이 얕아 당장은 알아보지 못하겠습니다.”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노인을 훑었지만 알아내지 못했다. 노인은 평범한 인족과 똑같아서 전혀 이종족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았다.
“몰라보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저는 운족(雲族)이니까요. 저희 종족은 변신술과 은신술에 능해 수행이 높은 존재도 잘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노부는 극양(極陽)의 기운을 품은 불 속성 공법을 익혀 변신술이 떨어지는 편이지요. 이곳에 오래 머문 수사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는 있을 것입니다.”
“운족이라면, 인구는 적으면서도 13개 종족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종족이 아닙니까.”
한립이 상당히 놀라 안색이 달라졌다.
“운족에 대해 아시나 봅니다. 저희 운족은 정족과 함께 13종족 중 가장 수가 적지만 세력은 약하지 않지요.”
허 노괴의 말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실례를 했군요. 처음으로 운족 수사를 뵙게 되어 몰라 뵈었습니다.”
“아닙니다. 저희 일족이 머릿수가 적다하나 적잖은 이들이 지금 운성에 머물고 있습니다. 대부분 신분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고요. 아마 수사께서 다른 종족 수사라고 여기고 지나쳤던 인물 중에 운족 수사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허 노괴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허나 저희 운족이 다른 종족들을 압도할 수 있는 것은 변신술 때문은 아닙니다. 또 다른 천부적인 신통 때문이지요.”
“본명 운수(雲獸)!?”
“그렇습니다. 본명 운수는 영수와 화신의 중간에 속하는 것으로 스스로 운수를 제련해 내야 진정으로 운족 사람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도 본명 운수에 대해서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일단 운수를 제련해 내면 신외화신이 생긴 것과 마찬가지로 위기의 순간 운수와 하나가 되어 운수거령(雲獸巨靈)으로 변할 수 있다지요. 그렇게 되면 수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강력한 신통을 펼칠 수 있고 말입니다. 수사께서 이번에 저를 찾아오신 것은 본명 운수 때문입니까?”
“통찰력이 대단하십니다. 다만 노부의 운수가 아니라 바로 이 아이의 본명 운수와 관련된 일입니다.”
허 노괴는 뒤쪽에 선 소년을 가리켰다.
“오, 무슨 일인지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만.”
한립은 신중하게 소년을 훑었다.
“노부 후인이 많지 않아 곁에 두고 돌보는 이는 윤상이가 유일합니다. 제 자랑 같지만, 아이가 자질이 뛰어나 운성에서도 인정받고 있고요. 백년 내로 상족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노인이 따뜻한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증조부님께서 저를 좋게 보아주시는 것뿐입니다.”
쑥스러운 듯 소년이 두 손을 저었다.
“허허, 겨우 십 년 만에 지금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예전의 나보다 낫다.”
허 노괴가 호탕하게 웃었다.
“확실히 허 현질의 자질이 뛰어난 듯합니다.”
한립의 말에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더는 무어라 하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앞으로 저보다 더 크게 될 아이인데, 안타깝게도 일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자랑스러워하던 기색을 지우고 얼굴을 굳혔다.
“자질은 굉장히 뛰어나지만 하필 본명 운수를 제련하는데 문제가 생겼지 뭡니까! 항상 제련을 코앞에 두고 실패했지요. 경험상 본명 운수를 빨리 제련해 낼수록 앞으로의 수행과 실력에 큰 도움이 될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한 수사를 찾아와 그날의 천지원기에 대해 물어본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십니까?”
“노부는 우연이 지난번에 모아온 천지원기가 이 아이의 본명 운수 제련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대부분 써버린 터라 이렇게 수사를 찾아와 부탁하게 되었습니다.”
“천지원기가 필요하다면 허 수사께서 분명 모을 방법이 있으실 텐데요. 어찌 저를 찾아오신 것입니까?”
“이미 여러 번 시도해보았으나 평범한 천지원기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수사가 만들어낸 천지원기가 특수했던 모양입니다. 그 안에 함유된 특수한 성분이 윤상이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고요.”
허 노괴는 속이 타는 것 같았다.
“그렇습니까?”
한립은 생각에 잠겼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는 진령본원 알갱이가 녹으며 만들어낸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특별한 효과가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수사께서 저를 도와 지난번과 똑같은 천지원기를 한 번 더 모아주신다면 반드시 그 답례를 하겠습니다.”
“……돕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일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기대에 부푼 노인을 보며 한립이 머뭇거렸다. 기린본원이 얼마나 진귀한 물질인데 스스로 연화할 수는 없어도 제혼의 수행을 위해 아무렇게나 낭비할 수 없었다.
제혼 체내의 기린본원 알갱이가 퍽 많더라도 나중에 딱 한두 알이 모자라 더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 할지 누가 알겠는가. 잘 알지도 못하는 이족인을 위해 자신의 영수에게 피해를 입힐 수는 없었다.
“이건 제 후인의 전도가 걸린 일입니다. 도와만 주신다면 영석은 부르는 대로 드릴 것입니다.”
노인은 뭔가 느낌이 좋지 않은지 재빨리 덧붙였다.
“이건 영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난 번 천기 현상은 비술이나 공법으로 불러낸 것이 아니라 소모성 보물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보물인지는 말씀 드리기 어려우나, 천기 현상의 규모만 봐도 얼마나 귀한 보물인지 추측하실 수 있겠지요. 게다가 보물이 몇 개 남지 않아 함부로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고민 끝에 한립이 사정을 설명했다.
“소모성 보물?”
“또한 제게는 큰 쓸모가 있는 보물이라 아무리 많은 영석을 주셔도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모성 보물을 써야하는 일이라면 저도 영석으로 보답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귀한 보물이라도 가격을 매길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가진 보물이 적지 않으니 비슷한 값어치의 보물로 한 수사와 교환하고 싶습니다.”
허 노괴는 오기 전에 여러 가지 상황을 대비했는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교환이요?”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렸다. 적당한 물건이 있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의 표정변화에 허 노괴는 타협의 여지가 있음을 깨닫고 즉시 탁자를 향해 소매를 털었다. 붉은 기운 속에서 옥함 여덟 개가 나타났다.
“오랜 세월 지니고 있던 귀한 물건들입니다. 이 중 두어 가지는 목숨을 걸고 구한 것이고요. 어떤 것이라도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드리겠습니다. 이 일만 도와주시면 그 은혜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허 노괴가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한립은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탁자 위 옥함들을 훑었다. 허 노괴는 연허 최상급의 존재이고 상당한 실력을 지닌 운족인이었다. 그가 귀한 물건이라고 자부하는 것들이 평범할 리 없었다.
그러나 합체기 수사들도 오매불망할 현천의 보물을 두 개나 지닌 그의 눈에 차는 물건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수사 덕에 안목을 넓히는 셈 치고 살펴보겠습니다.”
한립은 먼저 희미하게 작열하는 기운이 느껴지는 새빨간 옥함을 끌어왔다. 푸른빛을 날려 뚜껑을 열자 뜨거운 기운이 훅 하고 퍼져 대청 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