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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90화 (747/2,000)

990화. 마념(魔念)의 습격

*

“꼬마야, 이리 와 보거라.”

지선은 손뼉을 쳐 흰 토끼를 불렀다. 마치 그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주저하던 토끼가 껑충 뛰어올라 놀랍게도 지선의 품에 안겼다. 지선은 반가운 얼굴로 토끼의 털을 쓰다듬으며 기분이 썩 좋아보였다. 토끼 역시 상대의 호의를 느꼈는지 지선의 손을 핥았다.

“하하, 금방 지능을 지닐 수 있겠습니다. 한 수사께서 이 아이를 자유롭게 지내게 둔 것을 보면 꽤나 아끼시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 아이의 지능 개발을 돕고 이런저런 것들을 전수해도 되겠습니까?”

토끼를 쓰다듬던 지선이 한립을 향해 진지하게 물었다.

“자네가 말인가?”

“저 같이 영약이 영성을 띠게 되어 얻은 깨달음과 공법은 동류만이 계승해서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녀석이 앞으로 수련하며 헤매지 않게 작은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이 아이가 저처럼 사람의 형상을 갖추게 된다면 앞으로 수사께도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안 될 것은 없지만 무엇을 하든 내 꼭두각시가 곁에서 지켜볼 것이네.”

한립은 지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도록 하십시오.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될 비밀도 아니니까요.”

“그럼 1년 동안 이곳에서 잘 지내도록 하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이 꼭두각시에게 말하면 될 것이야.”

한립이 뒤쪽을 향해 손짓하자 와와가 앞으로 나섰다.

“오늘부터는 지선 수사를 따라 다니거라. 한시도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

한립의 말에 와와가 눈을 빛내고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선은 담담히 미소 지으며 보라색 기운을 이용해 토끼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구곡영삼의 본체가 심어져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섰다.

파앗.

비취색 빛이 한동안 그의 몸을 흐르고 다시 두 팔과 다리에서 보라색 잔뿌리가 자라나 땅 속으로 박혀 들어갔다. 지선의 몸이 점점 녹색으로 물들어갔다.

한립은 사람만한 보라색 영지가 약재 밭에 자리를 잡은 것을 보고 발길을 돌렸다. 지선의 다른 용도가 궁금했지만 출타할 일이 있었다.

천외마갑을 수리하기로 한 일자가 다 되었던 것이다. 한립은 표린수와 제2원신까지 거처에 남겨두고 동부의 모든 금제를 발동한 다음에야 안심하고 떠났다.

몇 시진 후 그는 섬섬의 점포에서 내렸다. 문이 굳게 닫힌 것이 장사를 접은 듯했다. 한립의 소매 속에서 작은 불덩이가 날아가 문 안으로 사라졌다.

“…….”

잠시 후 대문이 끼익 하고 열리더니 섬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딱 보름이 되자마자 찾아주시다니 역시 약속을 잘 지키시는 분이군요.”

“갑옷을 수리할 생각에 마음이 급해 서두른 것이니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한립이 점포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대문이 저절로 닫혔다. 안에는 온화한 여인이 그녀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한립을 확인한 섬섬은 곧바로 수결을 맺어 전송진법을 발동했다.

웅.

빛이 반짝이고 한립과 섬섬은 점포의 공간균열 내부로 전송되었다. 진법에서 걸어 나오자마자 한립의 시선이 공간 어딘가로 향했다. 그곳에는 새까만 열댓 개의 수정돌이 박힌 대형 진법이 펼쳐져 있었다.

진법의 눈에는 푸른 청동 솥이 놓여 있었는데 안에서 하얀 안개가 피어올랐고 청동 솥 허공에는 하얀 안개로 휩싸여 있었다. 모양은 달라졌지만 음랭한 마기는 그대로인 마원의 성계 마핵이었다.

마핵은 지금 완전히 보석처럼 변해 검게 반짝이고 있었다.

“어떠십니까? 그간 쉴 새 없이 대량의 진귀한 재료를 사용해 마핵에서 성계 마원의 자취를 지워냈답니다. 이전처럼 마기가 난폭하지 않고 정돈이 되어있지 않습니까?”

전송진에서 걸어 나오며 섬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섬 선자는 마핵을 통째로 천외마갑 안에 끼워 넣지 않고 따로 연화할 요량이군.”

“연기술에도 정통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맞습니다, 그렇게 할 계획입니다. 마핵을 통째로 천외마갑에 끼워 넣어도 갑옷의 주요한 손상 부위를 복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머지 자잘한 균열은 어쩌지 못하겠지요. 그런 사소한 차이가 적을 상대할 때 승패를 좌우하기도 하니까요.”

한립의 물음에 섬섬이 약간 놀란 기색으로 설명했다.

“내 연기술은 고명하지 못하니 선자의 생각대로 수리해주면 되네. 정족의 연기술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갑옷을 수리하기 전에 이 공간에 금제를 발동할 것입니다. 그때 선배님의 도움이 약간 필요합니다. 아마 사흘 후에는 수리를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는군. 보물을 수리하기 위함이니 아낌없이 돕겠네.”

“그러시면 바로 시작하시지요.”

섬섬은 곧바로 진법 원반을 꺼내 머리 위로 날렸다. 손가락을 튕겨 여러 색의 법결을 날리자 진법 원반이 빙글빙글 돌다 허공에서 사라졌다.

쿠릉.

곧 공간 위쪽에 광풍이 불고 먹구름이 몰려들며 사방에서 회색 기운이 흘러나왔다. 주변이 어두침침하게 변해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한립은 당황하지 않고 소매 속에서 하얀 빛구슬을 날려 주변을 떠돌게 했다. 그러자 섬섬이 가벼운 걸음으로 대형 진법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그도 주저하지 않고 신형을 옮겼다. 천천히 두 걸음 정도 걸었는데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그녀의 바로 뒤로 이동해 있었다.

우웅.

섬섬이 진법을 향해 법결을 날렸고 검은 빛이 흐르며 진법이 발동하려 했다.

‘마기가 정순하기도 하구나.’

진법에서 발산되는 마기의 양과 정순함이 대단했다. 언제 이렇게 많은 마기를 모았는지 알 수 없었다.

섬섬이 주술을 외자 등 뒤로 푸른빛이 일고 커다란 기린 허상이 떠올랐다.  기린 허상은 움직임이 없다가 여인의 주술소리가 빨라지기 시작하자 천천히 입을 벌리고 사람 머리통만한 불구슬을 분출했다.

불구슬은 괴이하게도 검은색과 푸른색의 기운을 동시에 함유해 진법 중앙의 청동 솥으로 날아갔다.

화륵.

청동 솥 표면에 흑청색 불길이 타올랐다.

“한 선배님 천외마갑을 꺼내주십시오.”

섬섬이 고개를 돌려 청하자, 한립은 곧바로 커다란 옥갑을 꺼내 들었다. 한 손으로 옥갑에 붙은 금제 부적을 털어내자 뚜껑이 저절로 열리고 안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검은 기운 속에서 보라색 갑옷이 나타났다. 어깨와 무릎에 날카로운 가시가 있고 검은 문양으로 뒤덮인 갑옷은,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주변에도 균열이 심했다.

섬섬이 수정빛 보호막을 불러내고 옥갑을 가리켰다.

쉬익!

보라색 갑옷이 무형의 힘에 끌려 진법 속으로 날아갔다. 천외마갑이 아직 진법 중앙에 다다르기 전, 청동 솥이 진동하고 흑청색 화염으로 갑옷을 휘감아 빨아들였다.

솥 안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고 문양들이 검은 빛으로 반짝였다. 동시에 대형 진법 곳곳에서 은색 주술문자가 떠올라 솥 안으로 세차게 흘러들어갔다.

쿠릉.

섬섬이 다시 주술을 읊자 진법 주변의 땅이 진동하며, 진법 네 모서리에서 옅은 노란색의 디딤돌들이 솟아올랐다. 디딤돌들은 표면이 매끈했고 각각에 거무튀튀한 깃발이 하나씩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다양한 용기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한립은 미미하게 표정이 달라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주술 소리가 점점 커지자 깃발이 거대하게 커져갔고 섬섬이 법결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수리를 하는 동안 제 말에 따라 깃발에 법력을 불어넣어 주시면 됩니다.”

“알겠네.”

여인이 허공의 진법 법기를 가리키자 그 안에서 수많은 법결들이 튀어나와 공간 곳곳으로 날아갔다. 먹구름이 더욱 많아지고 사방의 회색 기운도 짙어졌다.

잠시 후에는 한립과 섬섬의 모습이 어둠에 잠겨 굉음만이 들려왔다.

사흘 후, 점포 대문이 열리고 누군가 차분히 걸어 나와 영수 마차를 잡아타고 그곳을 벗어났다.

“…….”

섬섬은 아직도 공간균열 속에서 멍하니 청동 솥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멀쩡하던 청동 솥에 잔뜩 금이 가있었다. 게다가 아래쪽 진법이나 곳곳에 박힌 수정 돌들도 전부 터져있었다.

작은 기린 허상이 허공에 떠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 갑옷, 뭔가 있어. 평범한 천외마두의 갑옷이었으면 이런 일이 생겼겠어?”

“그렇겠지. 갑옷을 수리하자 다른 계면의 마물이 공간을 뛰어넘어 의식을 보내다니! 하마터면 이곳의 마기와 마물의 의식이 응결해 실체를 드러낼 뻔 했잖아.”

여인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떨려왔다.

“한 가 녀석이 벽사신뢰로 마기가 응결하기 전에 해결해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고생 좀 했을 거야.”

“……계면을 뛰어넘어 의식을 강제로 강림하게 할 정도면 진령에 맞먹는 존재였을 텐데. 그 갑옷의 정체는 대체 뭐였을까? 수리하는 동안 이상한 점을 느끼지는 못했는데 말이야.”

“그 일이 있고 너무 시간이 없어서 나도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천외마갑을 절대 넘기지 않는 건데! 핑계를 대서 갑옷을 잠시 맡아두고 다른 보물을 주어 보냈어도 좋았잖아.”

섬섬의 말에 기영이 갑자기 그녀를 탓했다.

“나도 그러고 싶었지. 그런데 내가 거기서 갑옷을 넘겨주기 싫다고 말했으면 한 수사가 어떻게 나왔을 것 같아? 그 자가 내내 웃고 있었지만 수틀리면 득달같이 나를 공격했을 거라고. 성족 초계에 맞먹는 상대와 목숨을 걸고 싸웠어야 한단 말이야? 마금산맥에서 달아나느라 귀한 보물을 거의 모두 써버려 이길 가능성도 없는데?”

섬섬은 불퉁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마금산맥에서 크게 원기를 상하지만 않았어도 좋았을 것을. 공간 금제의 힘을 빌리고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갑옷을 가로채 달아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푸른 기린 허상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됐어. 그 갑옷이 아무리 신통하다해도 어쨌든 마기(馬器)야. 남겨놔봐야 제대로 부릴 수도 없는데 겨우 친분을 쌓은 실력자를 잃을 수는 없지.”

“뭐 또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어쩔 수 없고! 어쨌든 괜히 남 좋은 일만 시켰네. 천외마갑이 네게 기연이 될 수도 있었는데.”

“내 기연은 너로도 충분한 것 같은데?”

한숨을 쉬는 기영을 향해 섬섬이 작게 미소 지었다.

“맞는 말이네. 지금 네게 부족한 건 기연이 아니라 수행과 신통이야. 더욱 수련에 매진하지 않으면 언제 또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지 모르니까. 이 일은 넘어가기로 하고, 내가 조사해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아직! 행방을 아는 자가 소수의 성계 노괴들이라 알아내기가 어려워.”

“그래도 알아내야지. 그게 없이 상고유적에 들어갔다가는 죽은 목숨이라고.”

“나도 알아. 그래서 다른 방법을 모색 중이야. 노괴들 문하의 수사에게 구입하거나 빌려보려고 시도하고 있어.”

섬섬은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정족 여인이 기린 허상과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고 있을 때 한립은 영수 마차를 타고 동부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마음이 몹시 심란했다. 겨우 갑옷을 수리했을 뿐인데 이런 사단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

한립은 소매 속의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수리를 마친 천외마갑을 보관한 옥갑이었다. 이전과 달리 옥갑에는 금제 부적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갑옷을 수리하는 동안은 아무 일도 없다가 나중에 가서 연달아 문제가 생겼다. 진법이 아무 이유 없이 작동을 멈추거나 청동 솥이 뜬금없이 갈라진 것까지도 봐줄 만했다.

그런데 갑자기 강력한 의식이 공간장벽을 뚫고 들어와 그대로 천외마갑에 돌진하다니! 워낙 급작스런 일이라 섬섬마저도 어안이 벙벙해보였다.

그나마 한립은 이런 일을 처음 당해본 것이 아니라 얼른 벽사신뢰를 날려 의식의 절반 정도를 흩어버리고 나머지를 튕겨냈다.

보통 이 정도 하면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의식이 공간 너머로 달아나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의식 주인이 갑옷을 꼭 필요로 했는지 놀랍게도 진법 속의 정순한 마기로 뛰어들어 마물 본체를 응결하기 시작했다.

이에 화들짝 놀란 한립은 체내에 남아 있던 벽사신뢰를 남김없이 방출해 작은 공간 안에서 벼락 잔치를 벌였다.

마물 본체의 수행이 아무리 대단해도 아직 응결되지 못한 마체(魔體)로 잇달아 쏟아져 내리는 벽사신뢰를 이겨낼 리 없었다.

금색 뇌전에 구멍이 뚫린 마물은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의식과 함께 무(無)로 돌아갔다. 이렇게 한립과 섬섬은 천외마갑에 심상치 않은 내력이 있음을 직감하게 되었다.

한립은 정족 여인이 고민하는 기색을 알아차렸고 내색은 안했지만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굉장히 아까워하면서도 그에게 천외마갑을 담은 옥갑을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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