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989화 (746/2,000)

989화. 타협

*

한립은 지선을 깨우지 않고 가느다란 검빛을 날려 얇은 보라색 잔뿌리 하나를 베었다. 푸른빛이 지나가자 상처가 벌어지며 우윳빛 액체가 몇 방울 흘러내리고 진한 약향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

한립은 눈을 번뜩이며 미리 준비한 작은 병을 날리고 입에서 푸른 기운을 뿜었다. 뿌리에서 흘러내린 우윳빛 액체는 남김없이 병 안으로 들어갔고 푸른 기운을 머금은 상처는 보랏빛으로 반짝이며 회복되었다.

그는 우윳빛 액체가 담긴 병을 끌어와 향을 맡아보았다. 굉장히 정순한 영력이 느껴졌지만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았다. 그는 작게 탄식하며 표면에 아름다운 문양이 가득한 은색 사발을 꺼냈다.

파앗.

작은 병을 기울여 우윳빛 액체 한 방울을 사발에 담고 저물탁 속에서 다양한 용기들을 불러냈다. 바닥에 다양한 모양의 용기들이 가득 놓이자 한립은 그것들을 하나씩 불러들여 무언가를 첨가하기 시작했다…….

세 시진이 지나자 밀실 안은 다양한 약재의 향으로 자욱했다. 한립은 남색빛 눈동자로 은색 사발을 관찰하며 말이 없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바닥을 뒤집어 사발을 치웠다.

“지선의 피를 연단 재료로 쓰는 것도 효과가 크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합체급 존재가 눈독 들였을 리 없어. 또 다른 용도가 있을 것 같은데…….”

한립은 허공에 떠있는 지선을 보며 턱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갑자기 열손가락에서 은색 실들이 날아가 지선의 몸 곳곳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한립은 두 손을 거두고 가만히 서서 지선을 지켜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선의 몸에서 보랏빛이 반짝였고 꼼짝 않던 영물이 천천히 눈을 떠 그와 눈을 마주쳤다. 옅은 녹색의 눈동자가 은빛으로 빛나 몹시 괴이했다.

“끝내 당신에게 붙들렸군요. 여기가 어디인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지선은 화내는 기색 없이 무척 담담했다. 마치 길을 지나다 만난 사이처럼!

“이곳은 마금산맥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운성일세! 이런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는 것을 보니, 지능이 발달한지 꽤 되었나 보군.”

“소란을 떨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가 애원한다고 하여 수사께서 저를 놔줄 것도 아닌 것을요.”

“그건 그렇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천지 영약이 영계에서도 희귀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네.”

한립이 미소를 지었다. 이런 느긋한 반응에 지선도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나 곧 한립이 상처를 냈던 뿌리를 훑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눈을 감았다.

“궁금한 것이 있네. 영약이나 단약의 재료로 쓰이는 것 말고 어떤 능력이 있기에 고계 존재들이 욕심을 낸 거지?”

지선은 분명이 그의 말을 들었지만 조소하며 입을 다물었다.

“지능이 발달했으니 원신과 혼백도 지니고 있을 테지. 내 추혼술을 사용하기를 바라는 것인가.”

“추혼술을 사용해 제게 뭔가 알아낼 수 있다고 믿으신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한립의 협박에 지선이 냉소했다. 영계에 범성진마공처럼 혼백을 봉인할 수 있는 공법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꽤 많을 것이다. 오랜 세월 살아온 지선이 그 중 한 가지를 익히고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른 용도를 몰라도 수사를 제련하면 내 최상급 단약은 얻을 수 있을 것일세. 허나 원신을 갖춘 천지영물은 특수한 비술이나 공법을 익힌 수사에게 큰 쓸모가 있다고 알고 있네. 오랜 세월 고된 수행을 견뎌 영성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런 자들의 손에 떨어지면 얼마나 고생을 하게 될지 모르겠군.”

“저를 협박하는 것입니까!”

지선이 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협박이라기보다는 나도 큰 위험을 감수하고 마금산맥에 다녀왔네. 그런데 합당한 보상을 얻지 못한다면 대책을 궁리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웃고 있었으나 한립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면 원신을 풀어주기라도 하겠다는 말입니까? 당신을 어떻게 믿고 제가 그렇게 한단 말입니까.”

그의 의도를 읽은 지선이 냉랭히 물었다.

“자네의 원신을 풀어주는 것은 불가하다네. 다른 존재의 몸을 빼앗아 목숨을 연명하거나 다른 수사에게 붙들리면 나에 대해 발설할 것이 아닌가. 그 대신 어떠한 고통도 없이 혼백이 윤회의 길로 들어서게 해줄 수는 있네. 믿고 안 믿고는 수사의 마음이지만 다른 선택은 없지 않은가?”

한립은 유쾌하게 미소 지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어도 조건을 걸 수는 있을 것입니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지선이 입을 열었다.

“어디 어떤 조건인지 들어나 보세.”

“거래 내용은 동일하지만 거래 방식은 제 뜻에 따라 주셔합니다. 당신의 말대로 원신을 흩어 윤회할 수 있다면 다음 생에는 사람으로 태어나 수행을 이어갈 기회가 생길 테니까요. 제 방식에 따르시지 않겠다면 혼백이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일언반구(一言半句)도 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방식인가?”

“타고난 신통을 이용해 제 원신을 둘로 분리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의식을 함유한 원신과 약간의 기억을 지닌 원신으로 말입니다. 당신이 주의식을 보내준다면 남은 원신이 약속대로 비밀을 알려줄 것입니다. 그 후 나머지 원신도 흩어버린다면 서로 뒷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아니지. 주의식을 지닌 원신을 보내줬는데 남은 원신이 말을 바꾸면 어떡하나. 그럼 나만 손해를 볼 텐데.”

솔직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지만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에게 붙잡히기 전에도 저는 이미 심한 부상을 당한 처지였습니다. 누구에게라도 언젠가 붙잡혔겠지요. 당신에게 원한이 있는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차피 되찾을 수 없는 육체를 위해 원신의 절반을 두고 도박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구도 원신이 윤회를 도는 과정을 모르니 온전치 못한 원신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어찌합니까.”

지선이 감정에 치우지지 않고 냉정히 말했다. 이에 한립은 지선의 표정을 살피며 미소 지었다.

“수사의 말대로 하지.”

“정말이십니까?”

시원시원한 그의 답에 지선이 멍하니 물었다.

“더 좋은 방법이 있는가?”

“없습니다. 다만 조금 더 고려해보실 줄 알았습니다.”

“이런 일에 고민은 무슨. 이제와 말이지만 자네를 잡은 것도 의외의 수확이었네.”

의미심장한 말에 지선이 눈을 반짝였지만 무어라 대꾸하지는 않았다.

“원신을 분열하는 비술은 얼마나 걸리는가? 수십 년이 걸린다고 말할 생각은 접게.”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 1년 내로 비술을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동안 제 몸에 걸어두신 금제 일부를 풀어주셔야 합니다.”

“1년이라! 알았네. 자네가 비술을 마칠 때까지 대부분의 금제를 거두어 주지. 이것을 기회라 여겨 딴 생각을 품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남겨둔 금제가 신묘하기에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니까.”

“잡히기 전에도 중상을 입어 겨우 억누르고 도망 다녔습니다. 어찌 달아날 여력이 남아 있겠습니까.”

한립의 차분한 경고에 지선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지선의 대답에 한립은 소매 속에서 금빛과 은빛의 꽃잎을 날려 보냈다. 금색 딱정벌레와 은색 불새였다. 둘 다 손톱보다 작아 마치 금과 은으로 된 장신구 같아 보였다.

“서금충!”

불새는 그렇다 치고 금색 딱정벌레를 한눈에 알아본 지선이 식겁해 소리쳤다.

“오, 영충을 다 알아보고 견문이 깊군 그래. 서금충의 위력을 안다면 더더욱 딴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할 것이네.”

한립의 뜻에 따라 금색 딱정벌레와 은색 불새가 서서히 지선에게 날아갔다. 그 모습에 지선의 얼굴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게다가 눈앞의 영충은 서금충 성체였다. 금제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만 아니라면 벌써 달아나려 발버둥 쳤을 것이다.

화염으로 된 은색 불새도 서금충과 같이 방출한 것으로 보면 그에 못지않은 위력을 낼 것이 틀림없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딱정벌레와 불새를 보고 지선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금빛과 은빛이 반짝이며 영물의 몸 안으로 스며든 순간, 한립은 수십 가닥의 은색실들을 지선의 몸에서 불러들였다. 그러자 다채로운 기운이 지선의 몸에서 흘러나와 다섯 장의 부적으로 변한 다음 사라졌다.

파앗.

금제가 사라지자 지선의 몸에서 발산되던 보랏빛이 한층 뚜렷해졌다. 그리고 두 팔과 다리의 잔뿌리들이 흐릿하게 변해 완벽한 사람의 모습을 갖추었다.

“하하, 천지영물은 다르군. 중상을 입고도 벌써 이 정도까지 회복하다니.”

“이곳에도 약재원이 있겠지요? 본체를 약재원에 심어 두어야 주변 영약들의 도움을 받아 더 빨리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원신을 분열하는 작업도 그만큼 빨리 끝낼 수 있겠지요.”

“나를 따라 오게.”

한립이 전혀 거리끼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약재 밭에서 머물겠다면 와와를 시켜 감시할 수 있었다. 수행 자체도 그리 높지 않고 삼엄한 동부의 금제 속에 있으니 연허 초기의 와와가 충분히 관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은 바닥에 늘어놓은 용기들을 치우고는 밀실 석문을 향해 걸어갔다. 한립이 먼저 나서자 머뭇거리던 지선이 그 뒤를 따라갔다.

석문 밖에는 무표정한 여인이 한기를 발산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본 지선이 멍하니 고개를 숙였다. 한립은 별 말 하지 않고 약재 밭으로 향했다. 운성에서 구할 수 있는 동부가 제한되어 있어 약재 밭도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지선은 내부를 둘러보고는 만족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넓지는 않아도 영기가 농밀합니다. 거처로 좋은 곳을 고르셨습니다.”

“하하, 좋은 곳을 고를 것도 없이 이곳의 영산(靈山)이 다 이렇다네. 어디든 원하는 곳을 골라 본체를 심게.”

“알겠습니다.”

지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립을 앞질러 약재 밭으로 향했다. 한립은 서두르지 않고 그 뒤를 쫓았고 와와도 소리 없이 뒤따랐다.

약재 밭을 꼼꼼하게 둘러보던 지선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밭의 절반 이상에서 만년 이상 된 영약들이 자라고 있었다. 한 움큼 뽑아내면 수천 년 된 영약들을 무더기로 얻을 수 있을 듯했다.

범인(凡人)이 약의 향이 충만한 이곳에 한동안 머문다면 수명이 늘어나지는 않아도 못 고칠 병이 없을 것이다. 지선은 놀라 약재 밭을 샅샅이 살필 작정으로 방향을 틀었다.

약재 밭이 그리 넓지 않아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니 끝이 보였다. 바로 그때 하얀 물체가 깡충깡충 튀어나왔다. 눈처럼 새하얀 옥토끼는 한립의 구곡영삼의 원신이 변한 것이었다.

“저건…….”

옥토끼를 보던 지선이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왜 그렇게 놀라는가? 화형을 이룬 동류를 처음 보는 것인가?”

“예, 처음 봅니다. 저희는 본래 아주 외진 곳이나 험난한 지형에서 살아가거든요. 노리는 천적이 많고 화형하기 전에는 저항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지요. 수천수만의 영약 중 운이 좋아 영성을 얻게 되는 경우도 몇 되지 않고요.”

지선이 서둘러 대답하며 토끼가 뛰어간 방향으로 걸어갔다. 한참을 가다보니 약재 밭 구석에 구곡영삼이 심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구곡영삼의 화신인 흰 토끼는 주변에 엎드려 약재 밭 어딘가에서 뽑아온 괴상한 줄기를 갉아먹고 있었는데 한립과 다른 수사들이 다가오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먹는 데만 집중했다.

예민하고 겁에 질려 있던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을 본 한립은 이마를 긁적이며 멋쩍게 미소 지었다.

지선이 온화한 얼굴로 성큼 다가가 손을 뻗었다.

보라색 기운이 흰 토끼와 바닥의 줄기를 한데 휘감아 데려왔다. 그러는 와중에도 토끼는 오물조물 무언가를 씹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흰 토끼를 바라보던 지선이 보라색 기운으로 토끼를 쓰다듬으려했다.

“……!”

그의 손이 닿기 전에 토끼는 털을 바짝 세우고는 잔영을 남기며 허공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바닥에 내려 뒷발로 일어서 지선을 향해 날카롭게 울어댔다.

방금 전 함부로 손을 대려한 것에 화가 난 것이다. 이에 지선은 빙긋 웃으며 몸의 기운을 보라색에서 비취색으로 바꾸자 짙은 나무 속성 영기가 주위로 퍼져나갔다.

이를 드러내고 사나운 표정을 짓던 토끼가 분홍색 코로 킁킁 기운을 느끼고는 바로 표정을 풀었다. 심지어 지선을 향한 눈빛에 친밀함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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