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8화. 허 노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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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어두운 얼굴로 푸른 기운을 뿜어 작은 원숭이를 끌어왔다.
그의 미간에서 한 줄기 수정실이 쏘아져나가 작은 원숭이를 파고들었다. 제혼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의식을 실처럼 응결해 영수의 몸에 불어넣은 것이다.
수정실이 몸속으로 들어갔는데도 제혼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립은 반쯤 눈을 감고 의식으로 샅샅이 영수의 몸을 점검했다.
“어찌 이런 일이!”
한참 후 한립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쇠약해졌던 기운은 벌써 회복이 되었고 육체나 경맥을 흐르는 법력이 이전보다 배는 강해져 있었다. 그가 관찰을 하는 동안에도 이런 변화는 지속되었다.
“또 진화를 하려는 것인가.”
마금산맥에서 강력한 신통을 발휘한 이후 이렇게까지 육체가 강화되고 법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의외였다. 한립은 다시 제혼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이건 뭐지? 이전에는 이런 게 없었는데…….”
제혼의 단전에 보일 듯 말 듯 투명한 알갱이들이 수없이 많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알갱이들은 좁쌀보다 더 작고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제혼 체내의 섭혼신광이 각각의 알갱이를 품고 연화시키고 있었다.
한립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제혼이 마금산맥에서 혈령의 원신을 죽이고 단숨에 삼켰던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이 결정들이 혈령의 원신 혹은 그것에 깃들어 있던 천외마군이 남긴 물체란 말인가!’
이전에는 아무리 강력한 귀물과 혼백을 삼켜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었다. 한립은 한동안 할 말을 잃고 침음했다.
‘그건 아니겠지!’
한립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제혼 체내에서 돌아다니는 수정실을 움직여 단전 속의 알갱이 하나를 몸 밖으로 끌어냈다. 육안으로는 제대로 보기 어려울 만큼 작았지만 한립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푸른 실이 뻗어나가 알갱이를 감싸 눈앞으로 끌고 왔다. 한립은 명청령안을 극성으로 발휘해 시선을 알갱이에 고정했다.
얼마 후, 길게 숨을 토해낸 그는 작은 옥병을 꺼내 알갱이를 그 안에 넣어두었다. 옥병을 챙긴 후에는 아직 골아 떨어져 있는 제혼을 거둬들였다.
그는 즉시 몸을 일으켜 밀실을 빠져나갔다. 의식으로 와와가 약재 밭을 잘 지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푸른빛줄기로 변해 동부를 빠져나와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영수 마차를 타고 운성 중심가로 나가 보름 넘게 경전을 취급하는 점포들을 돌며 대량의 서적을 사들였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잡다한 내용을 다룬 서적들로 특수한 공법과 비술이라든지 아니면 다양한 기인기사(奇事)들의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었다.
한립은 경전을 모두 동부로 가져가 놀라운 속도로 내용을 파악하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루 만에 실망한 기색으로 다시 거처를 떠나 운성의 다른 점포들을 돌며 각종 서적들을 사 모았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겨우 보름 만에 경전 구입에 엄청난 액수의 영석을 써버리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낡은 옥 조각을 들고 정신없이 살피던 한립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래, 이거야! 아무리 진령본원에 대해 아는 자가 드물어도 상고경전 중에는 기록이 있을 줄 알았지.”
그는 신중한 표정을 짓고는 다시 자세히 옥 조각을 탐독했다. 정신을 집중하고 꼼짝도 하지 않던 한립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길게 한숨을 쉬고는 옥 조각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이럴 수가! 이런 엄청난 기연을 놓치다니!”
한립은 크게 실망하며 알갱이를 넣어둔 작은 병을 꺼내들었다. 바로 뚜껑을 열자 알갱이가 서서히 떠올랐고 그것을 보는 한립의 표정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경전에 따르면 진령본원이라는 것이 실재했다. 진령급 존재가 탄생할 때 분리된 미량의 혼돈(混沌)의 기운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진령본원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그것을 복용하면 거의 환골탈태에 가까운 변화를 일으켜 수행이 크게 늘었고 합체급 존재가 될 수도 있었다. 영계에 진령급 존재가 몇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진령본원이 얼마나 희소한지 알 수 있었다.
진령본원은 기운의 형태를 지니는데 워낙 함유한 본원의 힘이 강력해 복용해도 연화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일정시간이 지나면 진령본원은 체내에서 알갱이 형태로 변했다.
알갱이에 함유된 기운을 완전히 흡수하려면 적게는 수십 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는 쾌재를 불렀지만 이후의 내용을 보곤 기운이 쭉 빠졌다. 진령본원이 결정 형태를 띠면 이미 본체와 기운이 동화되어 다른 수사가 흡수해 연화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수사가 강제로 흡수하면 결정은 평범한 기운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진령본원 알갱이를 노려보는 한립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경전의 내용이 틀릴 수도 있으니 확인을 해봐야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기회를 이렇게 날릴 수는 없었다. 그는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푸른실을 날려 알갱이를 감쌌다.
푸푸푹!
연달아 여러 색깔의 법결을 알갱이로 쏘아 보냈다. 처음에는 투명했던 알갱이가 옅은 붉은 색에서 검은 색으로 변하더니 나중에는 황금처럼 금빛으로 반짝였다. 그것을 본 한립이 수결의 모양을 바꾸었다.
알갱이를 감싼 푸른빛에서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아주 작은 빛의 진법을 이루었다. 금색 알갱이는 진법 정중앙에 있었다.
한립의 입에서 푸른 영화가 분출되어 진법으로 향했다.
펑!
주술문자가 만들어낸 빛의 진법이 밝게 빛나고 영화가 그 속으로 섞여 들어가자 진법 중앙에 푸른 불씨가 나타나 금색 알갱이를 품고 타올랐다.
우웅!
푸른 불씨 속에서 금색 알갱이는 더욱 강한 빛을 머금었고 나중에는 낮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
한립이 다른 법결을 날리려는데 진법 속에서 작은 폭음이 들리고 알갱이가 금빛 기운으로 흩어졌다. 금빛 기운은 빙글빙글 휘몰아치며 요란한 천둥소리를 냈고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배로 불어났다.
기운을 감싼 푸른 불씨와 진법이 얼마 버티지 못하고 터져나갔고, 커다란 금빛 기운은 깜빡 거리며 언제라도 통제를 잃고 폭발할 듯했다. 그 안에 함유된 어마어마한 힘에 한립의 표정이 달라졌다.
쉬익!
그의 한 손이 새까맣게 변하며 회색 기운을 뿜었다. 회색빛의 장막이 금빛 기운을 휘감았다.
콰릉! 쿠르릉!
회색빛과 금빛이 교전하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원자신광마저도 요란하게 번뜩이며 힘들어했다. 한립은 순간 두려움을 느끼며 미끄러지듯 밀실 구석으로 물러나 소매 속에서 수정 방패를 불러냈다. 방패는 커다랗게 변해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 순간 원자신광이 견디지 못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고 금빛이 그 안에서 흘러넘쳤다. 한립은 가슴이 철렁해 거대 방패 속으로 법력을 불어 넣었다. 동시에 그의 몸에 금빛이 반짝이고 금색 비늘들이 떠올랐다.
엄청난 충격에 대비한 한립은 밀실 아니 동부 자체가 견딜 수 있을지 걱정했다. 그런데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일어났다.
푹.
구속을 벗어난 금빛 기운이 더 이상 몸집을 부풀리거나 폭발하지 않고 빛기둥으로 변해 밀실 천장을 뚫고 솟구친 것이다. 밀실 천장은 종잇장처럼 뚫려 나갔고 작은 구멍을 남긴 빛기둥은 하늘로 사라져버렸다.
한립이 놀라 고개를 쳐들자 지붕에 뚫린 구멍으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강력한 영력의 파동이 느껴지고 산봉우리의 천지원기들이 극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한립은 입 꼬리를 비틀며 하얀 법결을 던져 밀실 지붕을 복구하고는 푸른 빛줄기로 변해 밀실을 벗어났다. 둔광이 번뜩이고 동부에서 날아오른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얼굴을 구겼다.
고공에서 금색 돌풍이 나타나 아주 요란스럽게 포효를 하며, 그 주변으로 오색찬란한 빛의 점들이 마구 몰려들어 기세가 엄청났다. 그것을 본 한립의 안색이 일순 창백해졌다.
무턱대고 알갱이를 삼키지 않아 다행이지 뱃속에서 저린 기운이 발작했다면 지금쯤 처참한 꼴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한립의 소란에 산봉우리에 동부를 마련한 다른 수도자들이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산 곳곳에서 영기의 빛이 반짝이며 수도자들끼리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한립은 이마를 긁적이며 대책을 강구하려 했다. 누가 이 일에 대해 묻기 전에 적당한 변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때 산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화통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흐하하! 누가 새로운 비술을 연구하다 이렇게 많은 천지원기를 불러 모았는지 모르겠군! 안 그래도 노부가 보물을 제련하느라 대량의 천기원기가 필요한 참이었는데 수고를 덜었어.”
다홍색 빛줄기가 산 아래에서 날아올라 그대로 하늘 위 돌풍 속으로 뛰어들었다. 붉은 화염이 치솟은 다홍색 빛줄기는 커다란 불 속성의 교룡으로 변해 입을 벌렸다.
콰르르르.
화교(火蛟)의 입 안에서 붉은 기운이 흘러나와 하늘을 뒤덮은 빛의 점들과 금색 돌풍을 죄다 휘감았다. 삽시간에 천지원기를 흡수한 화교가 웃음을 터트리며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허공에 떠올랐다.
다부진 얼굴에 보라색 장포를 입은 노인은 백발을 휘날리며 보란 듯이 들고 있는 물건을 들어올렸다.
다홍색 호리병 표면에는 불꽃 문양과 새빨간 악교(惡蛟)가 새겨져 있었다. 조금 전 하늘을 휩쓸고 다니던 화교와 똑같이 생긴 교룡이었다.
“저건 허 노괴가 아닌가?”
“저 노괴가 어찌 나타난 거지!”
“이전보다 실력이 더 늘었구만.”
아래쪽에서 보라색 장포 노인을 발견한 수사들이 소란스러워졌다. 대부분 노인을 아는 지 속닥거리기 바빴다. 한립은 재빨리 의식으로 훑어 그가 연허 후기의 수행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합체급 수사가 머물지 않는 산봉우리에서 최고의 수행을 가진 존재였다. 그래서 다른 이종족 수사들이 놀란 것이다.
상대의 등장에 당황했지만 진령본원이 초래한 이 현상을 해결해주어 다른 수사들의 이목을 끌지 않아 다행이었다.
한립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푸른 빛줄기로 변해 거처로 돌아간 다음 동부와 밀실의 금제를 복구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검은 빛 속에서 제혼을 불러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상황을 통해 경전의 내용이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기린본원은 제혼이 천천히 흡수하는 중이었다. 그의 영수가 앞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진령본원이 수백 년 후에 다시 세상에 나타나 다른 수사의 손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한립은 생각을 정리하고 아쉬운 마음을 털어버렸다.
그는 제혼을 불러들이고 신중한 얼굴로 푸른 옥병을 꺼냈다. 병 입구에 여러 금제부적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는 눈썹을 끌어올리며 병을 허공에 던지고 소매 속에서 열댓 개의 진법 깃발을 불러냈다.
휘익!
주술들을 외자 깃발들이 다양한 색의 빛으로 변해 밀실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웅.
그러자 주술문자들이 돌아다니는 노란 빛의 장막이 펼쳐졌다. 작은 진법을 하나 더 펼친 후에야 한립은 옥병의 입구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금제 부적들이 떨어져 내리고 병뚜껑이 열리자 안에서 빛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리고 병 안에서 다채로운 빛깔의 무언가가 나타났는데 사람의 모습을 한 인형처럼 보였다.
인형을 살피던 한립은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연달아 법결을 던져 넣었다. 다양한 빛깔의 법결을 흡수한 인형은 점점 커지며 원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웬만한 사람 보다 두 배는 큰, 사지에 보라색 잔뿌리가 난 괴물이었다.
그것은 한립이 마금산맥에서 포획한 지선이었다. 지금 지선은 온 몸에 붙은 다양한 부적에 완전히 제압당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래위로 지선을 훑는 그의 얼굴에 호기심이 어렸다.
화형 영약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그의 구곡영삼도 영성을 지녀 하얀 토끼의 모습으로 약재 밭을 뛰어다녔었다. 하지만 지선은 화형에 그치지 않고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는데 성공했다. 구곡영삼을 훨씬 뛰어넘는 등급의 영물이란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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