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987화 (744/2,000)
  • 987화. 이수주(璃水珠)와 원합오극산(元合五極山)

    *

    한립은 칼날 조각을 허공에 던지고 수결을 맺어 온몸에 금빛 비늘 갑옷을 불러냈다. 그리고 그의 등 뒤로 삼두육비의 금색 법상이 떠올라 반짝였는데 이전보다 훨씬 크기도 작고 흐릿했다.

    범성진마법상은 팔을 휘둘러 허공의 금색 칼날 조각을 끌어왔다. 한립은 깊게 숨을 내쉬며 속으로 법결을 발동하는 중이었다. 법상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발산되어 밀실 전체를 금빛으로 물들였다.

    이에 한립이 낮게 기합을 넣자 법상이 들고 있던 금색 칼날 조각이 살짝 흔들렸다.

    귀가 찢어질 듯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고 법상의 몸에서 금빛이 물처럼 칼날 조각으로 흘러들어가더니 크고 작은 금빛 주술문자로 변해 떠올랐다. 주술문자들은 칼날 조각 속으로 빨려 들어가 종적을 감추었다.

    이때 법상은 체구가 또 약간 줄어있었다.

    칼날 조각을 뒤덮고 있던 금빛이 사라지고 칼날 조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부러졌던 위쪽 칼날이 복원되었고 표면에 못 보던 금빛 주술문자 세 개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금색 칼날에서 느껴지는 영기의 압력에 한립은 웃음이 절로 났다.

    ‘법상의 힘과 영력을 소모해야하기는 하지만 역시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야.’

    그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금색 칼날 표면의 주술문자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현천과실이 변한 보검의 것과 비슷해 보였다.

    “금과문! 또 다른 현천의 보물이 맞았구나.”

    그가 무언가를 감지하고 시선을 삼두육비의 법상으로 돌렸다. 법상의 몸에서 소량의 금빛이 금색 칼날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현천의 보물은 제 모습을 갖춘 후에도 법상 본원의 힘을 쉼 없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에 한립은 미간을 좁히고 손을 뻗어 법상을 가리켰다. 그러자 법상은 칼날을 놓아주었고 또렷한 두 개의 얼굴은 입을 벌렸다. 입 안에서 금색 바람이 불어와 칼날을 휘감았다.

    펑!

    폭음이 울리고 칼날의 금색 기운이 바람에 휩싸여 법상 쪽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삼두육비 법상은 금색 기운을 모조리 흡수하고는 다시 커졌고, 금색 칼날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한립은 손짓하며 칼날 조각을 거두었다. 현천의 보물을 발동하는 법을 확인하니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는 새로 얻은 현천의 보물을 조심스럽게 넣고 또 다른 물건 두 개를 꺼내 허공에 띄웠다.

    그것은 남색 구슬과 하얀 기운에 둘러싸인 옥함이었다. 한립은 먼저 남색 구슬을 끌어왔다. 유리처럼 보이는 구슬 안에는 정순하기 그지없는 물 속성 영력이 물씬 풍겼다.

    그는 구슬을 집어 의식과 영목 신통을 이용해 살펴보다 깜짝 놀랐다.

    “설마 말로만 듣던 그것이란 말인가.”

    한립은 미심쩍은 얼굴로 손끝에서 영력을 내뿜어 구슬에 주입했다.

    펑!

    구슬 표면에 영기의 빛이 흐르고 남색 물빛이 흘러나와 아주 얇은 물의 장막으로 한립을 둘러쌌다. 이에 한립은 입에서 푸른빛을 쏘아 보냈다.

    쨍!

    물의 장막에 부딪힌 푸른빛은 금속성의 울림과 함께 튕겨 나오며 작은 비검으로 변했다. 물의 장막을 뚫지 못한 것이다. 청죽봉운검의 날카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는 깜짝 놀랐다.

    “천리수정(天璃水精)! 정말 이수주(璃水珠)로구나!”

    한립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푸른 비검을 삼키고 손끝에서 불덩이를 쏘아 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물의 장막에 닿는 순간 불덩이가 사그라졌고 물의 장막은 미동도 없었다.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리고 소매 속에서 은백색 불새를 날려 보냈다. 바로 서령불새였다. 불새는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날개를 펼치고 물의 장막으로 돌진했다.

    츠츳.

    은색 화염과 남색 물빛이 교전하다 몸을 떨며 떨어져나갔다. 서령천화도 잠시 동안은 물의 장막을 어쩌지 못하는 듯했다.

    “천리수정이 확실해!”

    은색 불새를 거둬들인 한립의 눈빛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그런 열기는 점점 식어갔다.

    “물 속성 공법을 수련하지 않은 것이 아쉽구나. 수련했었다면 천천히 구슬을 흡수해 전설상의 ‘이수(璃水)의 몸’으로 체질을 바꿀 수 있었을 텐데.”

    이수의 몸이 되면 물 속성 공법을 익히는 속도가 배로 늘고 물과 관련된 천지법칙을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합체급 존재라도 탐낼만한 보물이었다.

    그가 구슬에서 영력을 거두자 물의 장막이 흩어졌다. 그는 구슬을 들고 조용히 생각에 빠졌다.

    ‘그렇지!’

    한립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수결을 맺어 허리춤에서 하얀 그림자 하나를 불러냈다. 한립이 와와라고 이름을 지어준 통령괴뢰였다.

    한립은 연허 초기 신통을 지닌 꼭두각시를 한 번도 소환한 적이 없었다. 앞으로의 잠재력을 생각하면 쉽게 망가지게 둘 수 없어서였다.

    한립은 주술을 읊으며 한 손으로 꼭두각시를 가리켰고, 하얀 뱀은 수정빛을 반짝이며 미모의 여인으로 변했다.

    하얀 의복을 흩날리며 허공에 떠있는 여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하얀 한기(寒氣)를 뿜어내는 몸은 얼음 덩어리 같았다.

    “얼음 속성은 본디 물 속성에서 기원한 것. 와와에게 이수주를 지니고 다니게 하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결정을 내리고 남색 구슬을 와와에게 주었다. 그러자 이수주는 남색빛으로 변해 날아갔다. 짙은 물 속성 영기가 꼭두각시의 얼음장 같은 몸을 감싸 안았다.

    한립을 멍하니 바라보던 와와가 갑자기 남색 구슬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훅!

    그녀는 갑자기 입에서 하얀 기운을 불어내 구슬을 삼켰다. 구슬을 삼킨 와와의 얼굴에 남색 기운이 드리우더니 속눈썹을 파르르 떨다가 곧 사라졌다. 그런 와와를 지켜보던 한립은 실망하지 않았다.

    어떤 효과가 있든 단시간 내로는 결과를 확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통령괴뢰를 다시 거둬들이지 않고 석문을 가리키며 명했다.

    “폐관수련을 계속할 것이니 너는 거처 안에서 자유롭게 지내면 된다. 나를 대신해 약재 밭을 돌보거라.”

    와와는 아직 영성이 높지 않았지만 간단한 명령은 알아들었다. 게다가 통령괴뢰도 자주 이런저런 활동을 해야 영성을 키울 수 있었다.

    와와는 고개를 끄덕이고 하얀빛으로 변해 석문 너머로 사라졌다. 주변의 금제는 그녀를 전혀 막지 못했다. 금제를 열어주려던 한립은 움찔 놀랐고, 통령괴뢰에 대한 기대도 한층 높아졌다.

    이제 그의 시선이 허공에 떠있는 옥함으로 향했다. 그는 옥함을 살피다 법결을 날리자 여러 장의 금제부적들이 소리 없이 떨어져나갔다.

    옥함이 열리며 그 안에서 은빛이 튀어나와 달아나려 했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한립은 손에서 푸른빛을 뿜었다.

    쉭!

    은빛은 무형의 힘에 끌려오며 우윳빛 옥패로 변했다. 은색 주술문자들이 반짝이는 옥패는 마원의 핏빛 침상에서 얻은 금궐옥서의 잔본이었다.

    이것에 기록된 현천연기술은 그가 이해하고 익힐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지만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피며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확인했다.

    한립은 옥패를 이마에 대고 의식을 불어 넣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한참이 흘러갔다.

    거의 반나절이 지나서야 눈을 뜬 그는 경악하고 말았다.

    “원합오극산(元合五極山)! 최상급 통천령보 다섯 개를 하나로 합치는 제련법이 있다니 놀라운 일이구나! 충분한 재력과 시간만 있다면 단 하나뿐인 현천의 보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이 아닌가. 허나 웬만한 종족은 일족이 총력을 기울여도 해내기 어려운 일이지. 그렇다면 이합극산(離合極山)을 제련하는 것은 어떨까? 다섯 개를 합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중 두 개만이라도 융합할 수 있다면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야.”

    한립은 생각을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현천연기술 마지막 부분에 후천적으로 현천의 보물을 제련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이 몇 가지 적혀 있었다. 대부분은 영계에서 구할 수 없는 보물이거나 아니면 생전 처음 듣는 재료들이었다.

    유일하게 ‘원합오극산’의 재료와 제련법만이 영계에서 실현가능성이 있었다. 일단 합체기 이상은 되어야 간신히 제련을 시도해 볼 수 있고, 주재료는 산봉우리였다.

    물론 아무 산봉우리나 가능한 것은 아니었고 몇 가지 희귀한 속성과 특수한 위력을 지닌 산이어야 했다. 원자신산도 그중 하나였다.

    그가 지니고 있는 원자신산은 금궐옥서 잔본에 기록된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반드시 희귀한 재료들을 더 주입하고 오랫동안 특수한 제련을 거쳐 배양해야 조건에 부합할 것이다.

    나머지 네 가지 산봉우리에는 대량의 북극원광을 함유하고 있는 북극원산(北極元山)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립은 옥패를 든 채 침묵했다. 평소 같았으면 이미 현천의 보물과 현천잔보(玄天殘寶)를 지닌 그가 다른 현천의 보물에 집착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원합오극산 제련법 마지막에 기록된 문장이 그를 유혹했다. 이 현천의 보물은 뇌겁의 위력을 절반 가까이 줄여주는 신통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현천의 보물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게 된다.

    다섯 가지 산봉우리를 전부 모을 수는 없더라도 두세 개만이라도 찾아 제련에 성공한다면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은 이미 연허기 수사였다. 3천 년에 한번 찾아오는 대천겁은 화신기나 원영기 수사가 겪는 소천겁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보통 첫 번째 대천겁은 대부분 무사히 넘어가지만 두 번째나 세 번째 대천겁 부터는 슬슬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네 번째, 다섯 번째 대천겁을 겪는 이들은 수명이 거의 영생에 가까워진 연허 후기임에도 대천겁을 겪다 유명을 달리 하는 이들이 10명 중 두세 명은 되었다. 그 후로는 태반이 죽어나간다고 보면 된다.

    인족이 영계에서 자리를 잡은 후 연허급 수사 중 아홉 번째 대천겁을 이겨낸 이가 없다고 들었다. 아홉 번째 이후의 대천겁을 버틴 이들은 합체급 이상이었다.

    이건 인족과 요족 수사들의 경우였지만 요족도 일단 화형을 하면 인족과 비슷해진다. 하지만 영계의 다른 이종족들은 수명과 공법 그리고 체질이 완전히 달랐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천겁을 치러야하는 것은 같지만 그 강도나 과정은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어떤 종족은 천겁이 만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대신 위력이 몹시 강했다. 인족보다 수명이 짧은 종족은 수십 년에 한번 천겁을 치르는 대신 위력이 십분의 일 정도밖에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수행이 합체기에 이르면 대천겁의 위력은 연허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겁을 치를 때마다 생사의 기로에 선다.

    겁을 치르는데 실패하면 다시 윤회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고, 순조롭게 이겨내면 수행이 어느 정도 늘어나게 된다. 겁이라는 시련을 이겨내면서 수련의 고비를 뛰어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뇌겁의 위력을 절반이나 줄여준다는 원합오극산이 얼마나 귀한 보물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것을 제련해 낸다면 앞으로 겁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대폭 높아진다.

    문제는 원자신산 말고 다른 네 개의 산봉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주재료인 산봉우리들을 제외하고 보조 재료도 전부 희귀해 몇몇 가지는 한립도 평생 보지 못한 것이었다.

    한립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고심하며 차차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옥패를 다시 옥함 속에 넣고 금제 부적들을 붙인 다음 챙겨두었다. 아직 다른 재료를 찾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은 인연에 달렸다.

    원래 억지로 쫓는다고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기연이 아닌가!

    그는 잠시 조용히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소매 속에서 둥근 고리를 뿜었다.

    파앗!

    둥근 고리 속에서 검은빛이 떨어져 내리며 작은 원숭이가 웅크리고 앉아 꼼짝하지 않았다. 마금산맥에서 돌연 강력한 신통을 발휘해 혈령에 깃든 천외마군을 잡아먹은 영수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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