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986화 (743/2,000)

986화. 산맥을 벗어나다

*

“저자를 계속 회유할 생각이야?”

“기영! 깨어났구나.”

반가운 기색으로 섬섬이 소매 속에서 푸른 기운을 뿜어냈다. 푸른 기운이 허공을 한 바퀴 돌더니 주먹 크기의 작은 기린 허상으로 변했다. 기영은 착잡한 얼굴을 했다.

“며칠 전 간신히 정신을 차리긴 했지! 연달아 비술을 펼친 타격이 너무 커서 조용히 쉬고 있었어.”

“이번 일이 실패하기는 했지만 살아남은 것만 해도 다행이야. 진령의 혈의 혈령이 다른 존재의 지배를 당하고 너와 비슷한 존재까지 나타났잖아. 운이 나빴다면 목숨을 잃었을 거라고.”

“맞아. 저 한 가 녀석의 실력이 상상이상이라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우리 힘만으로 마금산맥을 벗어나기는 힘들었을 거야. 그런데 다음번 진령의 혈을 노릴 때를 대비해 저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거야?”

“다음번 진령의 혈이 언제 나타날 줄 알고 지금부터 준비를 하겠어. 다만 성계 초급과 맞먹는 존재와 친분을 쌓아두면 나쁠 것도 없잖아?”

섬섬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미소 지었다.

“상족 7계의 존재가 저런 어마어마한 신통을 지니다니 확실히 그럴 가치가 있긴 해.”

한립의 신통을 떠올린 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그나저나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고 목숨까지 잃을 뻔했는데 아무 소득도 없이 끝나서 어쩌지?”

섬섬은 소매 속의 손을 잡고 속상한 기색을 드러냈다.

“뭘 또 그렇게 의기소침하고 그래? 기린본원을 얻을 수 없더라도 네 정족 체질을 개선해 성족으로 이끌어줄 다른 방법이 없는 건 아니라고.”

기영이 생각을 정리하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뭐? 설마 또 다른 진령의 혈이라도 알고 있는 거야?”

“하하! 그건 아니지만 상고 유적이 있는 곳은 알고 있지. 아주 오래전 유명했던 단약 제련의 명사가 거주했던…….”

기영이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를 해나갔다.

* * *

마금산맥의 음산하고 습한 습지 안.

새까만 장포를 입은 거한이 비취색 암석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거한이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인근의 마기가 춤을 추듯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거한은 길게 숨을 내쉬고는 입을 벌려 주변의 마기를 전부 들이마시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눈을 떴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곤 얼굴을 굳혔다.

“……!”

하얀 치마를 입은 누군가가 맨발로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흑발의 여인은 가히 경국지색으로, 입이 조금 큰 것을 제외하면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와 곧은 코 그리고 눈처럼 새하얀 피부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성조 대인! 마악이 대인을 뵙습니다.”

추한 사내가 여인의 얼굴을 확인하곤 즉시 암석에 머리를 수그리며 예를 올렸다. 거한은 성계로 진입한지 얼마 안 된 흑연악이었다.

한 달 전쯤, 그는 언 노인을 따라잡아 죽였지만 지선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 한립을 쫓았던 거서가 죽었다는 소식에 어안이 벙벙한 채로 거처로 돌아와 불안정한 경지를 다지기 위해 잠시 수련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줄곧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백의 여인이 찾아왔으니 이게 복인지 화인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눈앞의 성조 여인이라면 눈 깜짝할 사이에 그를 죽이고도 남았다.

“그만 일어나게. 정말 자네가 성계로 진입하다니, 명라 수사가 자네를 괜히 아낀 게 아니었어. 사룡진혈(邪龍眞血)도 깨어난 듯하고 말일세.”

“대인께서도 알고 계셨습니까?”

“당연히 알고 있었네. 그렇지 않았다면 명라 수사가 아무리 자네를 아꼈어도 그리 많은 영약을 내주었겠는가. 사룡(邪龍)은 진령혈맥 중에서도 마성이 가장 강한 혈맥이지. 성년이 된 사룡족(邪龍族)의 경우 천외마두를 잡아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천외마군이라 해도 밀리지 않을 걸세. 자네는 사룡의 피를 계승한 것뿐이지만 성계 중기의 존재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지. 내 수하들도 일대일 대결에서는 자네를 압도하지 못할 테고 말이야.”

“성조 대인께서 저를 좋게 봐주신 것입니다. 제가 어찌 혈비나 철마, 다안 수사와 같이 거론될 수 있겠습니까.”

추한 거한도 여인 앞에서만은 아주 겸손했다.

“성계대전(聖界大戰)에서 갑자기 실종되기 전까지 내가 명라 수사와 서로 친자매처럼 지냈다는 것을 알 것이네. 앞으로 한동안은 나를 따르게나. 내 잠시 바깥에 다녀올 것이니 자네도 떠날 준비를 하게.”

“마금산맥을 나서실 계획이십니까?”

“그렇다네. 나를 따라나서기 꺼려져서 그러는 것인가?”

“보화 대인 곁에 머물 수 있다면 제 복일 것입니다. 대인의 명이라면 어딘들 못 가겠습니까!”

여인의 차분한 말에 거한이 식은땀을 흘리며 황급히 변명을 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바로 떠나도 되겠군.”

백의 여인은 거한의 반응을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다 웃음기 어린 말투로 재촉했다.

“예! 소인 딱히 챙길 것도 없습니다.”

거한은 고분고분 답했고, 백의 여인은 활짝 웃으며 소매 속에서 분홍빛을 불러냈다. 그러자 기이한 향이 퍼지며 여인과 거한이 그 안으로 사라졌다.

빛이 가신 후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운성의 운몽산.

한립은 거처로 돌아오자마자 금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바로 침상에 올라 잠에 빠졌다.

마금산맥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지만 아슬아슬한 순간이 많았다. 그만큼 법력도 많이 소모했지만 정신적 피로도 굉장했다. 이렇게 한립은 이틀을 내리 자고나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한결 맑은 정신으로 눈을 뜬 그는 침실을 나와 곧장 밀실로 향했다. 이제 마금산맥에서 얻은 것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쿠릉.

그는 밀실로 들어가 석문을 닫고 푸른 기운으로 내부를 엄밀히 봉쇄했다. 그리고 밀실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러자 그의 손목이 반짝이고 검은 저물탁이 날아올랐다.

쿵!

저물탁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목내이처럼 변한 성계 마원의 시체였다. 한립은 마른 시체를 보고 흐뭇해졌다. 마핵도 파냈고 정혈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뼈와 근육이 매우 단단해서 법기를 제련하는데 큰 쓸모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마원의 시체를 챙겨온 것은 제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세하게 남아있을지 모르는 산악거원의 진혈을 얻기 위해서였다.

평범한 수사였다면 진령의 피를 어떻게 정련할지 고민하느라 골머리를 썩겠지만 경칩결을 익힌 한립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진령의 피를 이용해 변신하는 술법이었기에 영수의 체내에서 강제로 진혈을 추출하는 비술도 같이 익힐 수 있었다.

물론 얼마나 정순한 피를 얻을 수 있는가는 영수가 계승한 혈맥과 수행에 따라 달라진다. 혈맥 자체는 별로여도 스스로 수행을 통해 체내의 진령의 피를 더욱 정순하고 농후하게 갈고닦은 덕이었다.

이전에 얻은 진령의 피 중 가장 정순한 것은 천붕족의 곤붕진혈이었고 가장 양이 많은 것은 오색공작의 진혈이었다. 진룡이나 천붕의 진혈은 양도 적고 정순함에서도 떨어졌다.

우연히 아주 약간을 얻었을 뿐 아니라 화신기 밖에 되지 못한 진령세가 자손들에게 취한 것이라 그랬다.

진룡과 천붕은 진령 중에서도 가장 앞줄에 속했지만 한립은 곤붕이나 오색공작 변신술을 썼을 때 더욱 강한 위력을 낼 수 있었다.

천붕족 대장로의 의식에서 얻은 비술이기에 아무래도 곤붕과 같은 조류 진령의 변신술에 대한 깨달음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원은 합체 중기의 마수였으니 아무리 산악거원의 피를 적게 이어받았더라도 기대해볼 만했다.

‘일단 시체 속에 진령의 피가 남아 있어야겠지만 말이다.’

그는 눈을 감고 주술을 외우며 마수의 시체에 연달아 빛을 쏘아 보냈다. 그러자 마원의 시체에 다양한 빛이 감돌며 크고 작은 주술 문자들이 떠올랐고 주술 소리가 커질수록 빛도 진해졌다.

“떠올라라.”

한립의 말에 가만히 누워있던 시체가 둥실 떠올랐다.

콰직.

그리고 괴이하게도 주변 빛들이 엄청난 압력으로 시체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마원의 몸이 뒤틀리며 점점 압축되고 있었다. 순식간에 시체는 3분의 1로 줄어들었고 일다경이 지난 후에는 아주 납작해졌다.

그때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한립이 뒤통수를 두드렸다. 그러자 금색과 푸른색 기운이 번쩍이고 원영이 나타나 눈을 번뜩이며 마원의 시체를 응시했다.

원영은 곧 싱글거리며 입에서 푸른 불길을 내뿜었다.

푸른 불꽃은 마원 시체에 닿자마자 기세 좋게 타올랐다.

원영은 가부좌를 튼 채로 한 손으로 법결을 외우며 눈을 감고 있었고, 한립은 그 아래에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이 상태로 사흘이 흘렀다. 연허 초기의 한립에게도 매우 힘들고 지치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흘째 되는 날, 푸른 영화(嬰火)가 펑! 하고 터지며 흩어졌고 마원의 시체가 있던 자리에 주먹 크기의 반짝이는 물체가 떠올랐다.

원영이 불꽃을 멈추고 미소 짓더니 금빛과 푸른빛을 반짝이며 괴이하게 사라졌다. 이에 한립은 푸른 기운을 날려 반짝이는 물체를 끌어왔다. 그것은 핏빛 수정처럼 생겼다.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살펴보다 핏빛 수정을 향해 손끝을 튕겼다.

파사삭!

수정이 깨지고 그 안에서 진득한 검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액체는 허공에 노출된 순간 빛을 머금고 작은 아기 원숭이로 변했다.

펑!

작은 마원은 끽끽 소리를 지르며 검붉은 빛 속으로 사라졌다가 폭음소리와 함께 다시 밀실 벽에서 튕겨 나왔다. 마원은 정신없이 다른 방향으로 돌진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립이 먼저 목이 긴 옥병을 꺼내 허공에 던졌다.

쉭!

옥병에서 하얀 실 뭉치가 뻗어나가 검붉은 마원을 돌돌 감고는 옥병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잠시 부들부들 떨리던 옥병은 한립의 손으로 떨어졌다.

의식으로 옥병을 살핀 한립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스쳤다.

“좋았어! 산악거원의 진혈이 확실해. 이렇게 정순한 진혈을 얻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앞으로 천붕 변신술보다 더 뛰어난 위력을 낼 수도 있겠어.”

한립은 밝은 얼굴로 중얼거리며 금색과 은색 부적을 꺼내 옥병에 붙여 조심스럽게 저물탁에 넣었다.

새로운 진혈의 피를 얻어 기쁘지만 당장 연화를 시작할 수는 없었다. 며칠간 영화로 마원의 시체를 불사르느라 원기와 법력을 소모했기에 일단을 휴식을 취하는 것이 먼저였다.

한립은 단약을 복용하고 영석 두 개를 꺼내 손에 쥐고 눈을 감았다. 하루가 지나자 그의 안색이 한결 편해보였다. 한립은 충만한 활력과 법력을 느끼고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영석들을 거두고 금빛 칼날 조각을 꺼냈다. 마원에게서 얻은 현천의 보물로 의심되는 칼날 조각이었다. 보물을 얻었을 때는 자세히 살펴볼 시간이 없었고 섬섬과 운성으로 돌아오는 동안은 그녀를 의식해 보물을 꺼내 볼 수 없었다.

“…….”

한립은 칼날 조각 표면의 울퉁불퉁하게 새겨진 문양과 주술문자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의식으로 칼날 조각을 훑어보려 해도 현천과실처럼 표면에서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튕겨 나왔다. 그러면서도 전혀 영력은 느껴지지 않아 고철 덩어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칼날 조각이 그런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현천과실이 현천의 검으로 변해 막지 않았다면 그 일격으로 그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상황을 되뇌며 한립은 명청령안을 발동해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금빛 주술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는 것을 제외하면 이상한 점은 없었다.

한립은 칼날 조각을 살펴보다 미소 지었다. 어찌되었든 칼날 조각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현천과실을 발동하느라 법상의 힘을 절반이나 잃었기에 다시 회복하려면 시일이 꽤 걸릴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팔뚝에 봉인된 현천과실은 그가 소환하고 싶다고 불러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음번에 강적을 만나 현천의 보물이 필요할 땐 불러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현천과실의 위력이 대단하고 그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했다하더라도 이렇게 불확실한 방법에 목숨을 맡길 수는 없었다.

칼날 조각은 현천과실에 비해 위력이 조금 떨어졌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직접 확인해 봐야 할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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