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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83화 (740/2,000)

983화. 원기의 검

*

“지선을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붉은 구름 속에서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울리고 거대한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대의 정체를 살피던 한립은 흠칫 놀랐다.

거대한 두꺼비가 등에 새까만 날개를 달고 있었다. 표면에 검은 기운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면 실체가 없는 것 같았고 그 안에 금빛 주술문자들이 흘러 다녔다.

두꺼비의 미간에 박힌 회색 구슬이 괴이한 빛을 반짝였다. 괴물의 모양을 뜯어보던 한립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지선은 제 손에 있습니다. 가져가고 싶으시면 당신의 마핵과 바꾸시지요.”

“하하하하, 어린 녀석이 입만 살았구나! 노부가 그런 소리를 들어 본 것이 몇만 년 만인지 모르겠구나. 나를 웃겼으니 너를 잡으면 반드시 원신을 꼭꼭 씹어 삼켜 충분히 즐겨주마.”

거서가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쉭!

그러나 웃음소리가 그치기도 전에 거서의 입에서 붉은빛이 번득이고 붉은 그림자가 한립의 가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불의의 일격에 대부분의 수사들은 부상을 당했겠지만 한립처럼 전투 경험이 풍부한 자가 당할 리 없었다. 그는 명청령안을 발동해 이미 상대를 경계하고 있었다.

육안으로 포착하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붉은 그림자는 거서의 새빨간 혀였다.

펑!

붉은 그림자가 튕겨나가고 한립 앞에 검은 산이 방패처럼 자리했다. 거서의 혀로는 엄청난 무게의 원자신산을 어쩔 수 없었다. 거서는 기습이 실패한 것이 의외였지만 차갑게 웃고 등 뒤의 검은 날개를 펄럭였다.

허공의 붉은 구름이 신비로운 힘에 이끌리듯 미친 듯이 거대 마수에게 몰려들었다. 붉은 구름을 마구 빨아들이는 거서를 보자 한립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붉은 구름을 모두 빨아들이자 하늘이 맑아졌고 거서의 몸은 강철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거의 반투명하게 변했다.

허공에 뜬 거서 때문에 주변 공기가 삽시간에 끓어올라 진동할 정도였다. 수행이 낮은 저계 수사였다면 이미 육체가 녹아 죽었을 것이다.

한립은 미간을 좁히고 자신의 뒤통수를 때렸다.

화륵.

그러자 은색 화염이 솟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몸을 뒤덮었고, 사방의 뜨거운 공기가 자석에 이끌리듯 은색 화염 속으로 빨려 들어가 한립 주변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한립은 팔짱을 끼고 새빨간 거서를 조용히 응시했다. 상대의 불 속성 영력은 약간의 벽사멸마(闢邪滅魔)의 기운을 보이고 있었다.

마수가 요사한 기운을 물리치고 마를 멸하는 신통을 지니다니 아주 드문 경우였다. 게다가 눈앞의 고계 마수는 불 속성 영력을 다루는 솜씨도 뛰어났다.

‘그렇다고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한립이 냉소하고 두 손을 교차하며 펼쳤다.

콰르릉!

금색 뇌전이 나타나 거대한 원형의 뇌전 그물을 만들어 그를 감쌌다. 그의 두 손에서 기이한 금빛 주술문자들이 마구 뻗어 나가 주변의 뇌전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놀랍게도 그 순간, 뇌전 그물이 폭발해 가닥가닥 끊어졌다가 하나로 뭉쳐져 엄청난 빛이 터져 나왔다.

금빛 광채 속의 한립이 흐릿한 모습으로 주술을 외자 광채가 요동치고 천둥소리가 귀를 울렸다.

콰쾅!

한립의 손 위로 금빛의 구슬이 떠올랐다. 광택이 없어 평범한 법기처럼 보였다.

“벽사신뢰, 제뢰술!”

벽사신뢰가 변한 구슬을 본 거서가 크게 놀라 소리쳤다. 한립은 미소 지으며 거서를 향해 구슬을 던지고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돌연 푸른빛이 반짝이고 연꽃들이 만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푸른빛 속으로 모습을 감췄고 원래 기운을 모아 강력한 비술을 펼치려던 거서는 몸을 날려 화염기둥으로 변해 날아들었다.

쿠르릉!

화염기둥이 푸른 연꽃들과 충돌했다. 연꽃들이 푸른빛으로 흩날리고 새빨간 화염 기둥 역시 푸른빛 속에 잠겼다.

폭음이 울리고 화염기둥 속에서 나타난 거서가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때 허공에서 한립의 목소리가 울렸다.

“기왕 왔으니 춘려검진의 위력을 맛보다 가시지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방팔방에서 푸른빛이 몰려들었다. 안 그래도 무언가 이상하다고 여기던 거서는 입을 버려 붉은 빛기둥을 분출했다.

푸슉.

붉은 기둥은 푸른빛의 장막을 가볍게 뚫어버렸지만 그 속으로 흡수되어 종적을 감추었다. 그것을 본 거서는 거대한 앞발을 들어 천천히 휘둘렀다.

쿠르릉!

붉은 기운이 튀어나가 새빨간 거대 손으로 변해 빛의 장막을 때렸다. 그러자 새빨간 거대 손의 위력이 푸른빛의 장막을 갈랐다.

그런데 그 뒤로는 새까만 허공뿐이었다. 거대 손은 즉시 허공을 향해 몇 줄기의 빛을 날렸지만 푸른 연꽃들이 빼곡하게 피어나 빛을 흡수했다.

놀란 거서가 즉시 법결을 발동했다.

콰쾅!

새빨간 거대 손이 몇 배로 불어나 폭발했고, 붉은 기운은 천둥소리를 동반하며 퍼져나갔다. 연꽃들도 붉은 기운을 만나 푸른 연기로 변해 소실되었다.

사나운 붉은 기운이 푸른빛의 장막을 돌며 푸른 연꽃을 없애려는데 위에서 갑자기 은색 불새가 날개를 펼쳐 하강했다.

은색 불새가 파고들자 붉은 기운이 바르르 떨며 놀랍게도 엄청난 속도로 크기가 줄어들었다. 잠시 후, 수축하던 붉은 기운이 사라지고 은색 불새가 다시 나타났다.

은색 불새는 맑게 지저귀며 펑! 하고 터져 은색 화염으로 흩어졌다. 이에 거서가 화가 치밀어 등 뒤의 날개를 펄럭여 검은 돌풍을 만들고 주술을 외웠다.

그러자 검은 바람과 거서의 몸에서 흘러나온 붉은 화염이 기묘하게 융합되어 검붉은 화염폭풍 기둥이 치솟았다.

주술을 멈춘 거서는 입에서 보랏빛 비검도 한 자루 불러냈다. 비검은 작은 칼날들로 변해 화염폭풍 기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바람 소리가 거세지고 기둥 표면에 보랏빛이 번득였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검진 밖의 한립은 수결을 맺어 오색 빛의 점들을 푸른빛의 장막 속으로 쏟아져 들어가게 했다.

한립은 차가운 눈빛으로 검진을 움직였다.

스스스슷.

검진 안에서 갑자기 덩굴 식물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얇았던 덩굴이 자랄수록 굵어져 순식간에 꽃을 피웠다가 비취색의 작은 호리병박을 맺었다.

사방의 빛의 장막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푸른 연꽃들이 피어올랐다. 연꽃들이 꽃망울을 터트릴 때마다 검 그림자가 번득이며 호리병박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호리병에 푸른 검 모양이 생겨났고 대량의 오색 광채들이 덩굴줄기를 타고 몰려들었다.

오색빛이 강해질수록 검 모양이 또렷해졌다. 바로 춘려검진의 필살기인 검기검호의 신통이었다. 원기의 검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량의 천지원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한립이 처음부터 춘려검진의 장기인 환술을 펼치지 않고 주변의 천기원기를 모으는 데만 집중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거서가 천지원기 조종을 방해할 거라 생각했는데 거서는 검진을 깨느라 정신이 없어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원기의 검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응결이 되었고 아직도 바깥의 천지원기를 마구 흡수하며 위력을 키우는 중이었다. 거서는 검진 밖에서 밀려드는 천지원기의 농후함에 경악했다.

그러나 거서도 반격할 준비를 마친 후였다. 허공에서 갑자기 한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어라.”

호리병이 뒤집어지고 빛의 검이 등장했다. 그것은 오색으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장검이었다.

오색 빛의 검이 서서히 떨어져 내렸다.

거서는 불길한 느낌에 허공의 검붉은 기둥을 하늘로 쏘아 보냈다. 그러자 바람과 불의 힘이 공간을 왜곡하며 오색 빛의 검을 노렸다.

검붉은 기둥 안에서 보라색 빛들이 맹렬한 기세로 검진이 만들어낸 빛의 장막을 흔들었다. 거서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이 술법은 거서의 잠재력을 밑바닥까지 끌어올려 구슬의 합체급 신통을 구현한 것이다. 그러니 결코 검진 따위에 막힐 리 없었다.

그런데 기둥 속에서 기이한 울림이 들리고 어찌 된 일인지 검붉은 화염폭풍이 둘로 갈라졌다. 그 사이로 오색 빛이 반짝이고 거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신이 부르르 떨리고 화려한 오색 빛이 흩날리자 화염폭풍이 알 수 없는 힘에 잘려나갔다. 오색 거검은 빙글 돌아 거서를 정 조준해 허공을 갈랐다. 순간 아무런 소리도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거서 미간의 회색 구슬이 펑! 하고 터져나갔다.

“이건 불가능해!”

거서는 악에 바친 목소리로 절규하며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두 눈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다음 순간 거대한 마수의 머리가 둘로 갈라져 떨어졌다.

붉은 화염이 몸속에서 빠져나와 시체를 뒤덮었고 거서는 원신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재로 흩날렸다. 허공에 푸른빛 반짝이고 한립이 검진 속에 나타나 활활 타오르는 화염을 내려다보았다.

“천지원기를 끌어다 쓰는 술법은 평범한 비술과는 비교할 수가 없구나. 마원을 상대할 때도 마기통로에 있지 않았으면 원기의 검으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을. 괜히 현천의 보물을 쓰느라 법상의 원기만 상하게 했어.”

한립은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리며 명청령안을 발동해 불길을 꼼꼼히 살폈다.

쉭!

그가 갑자기 손을 뻗어 불길 속에서 무언가를 끌어올렸다. 남색 주머니에  각기 다른 주술문자가 새겨져있다.

“……저물대?”

인계의 저물대와 비슷해 보였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곰곰이 궁리하다 그는 회색 기운을 불러내 주머니를 꽁꽁 싸매고는 푸른 법결을 날렸다.

어지럽게 반짝거린 남색 주머니가 서서히 벌어졌다.

쉭!

그런데 남색빛이 그 안에서 빠져나와 내빼려했다. 그러나 한립은 코웃음을 치며 회색 기운으로 남색빛을 덮쳤다. 회색 기운과 맞서며 남색빛이 원형을 드러냈는데, 뜻밖에도 투명한 남색 구슬이었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구체는 유리구슬처럼 보였다. 한립이 의식으로 구슬을 훑고는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내단은 아닌 것 같은데? 법기도 아닌 것 같고.”

그는 구슬을 들고 자세히 살펴봤지만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됐다. 돌아가서 천천히 연구하다 보면 알게 되겠지.”

지금은 이곳을 떠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한립은 옥함을 꺼내 구슬을 거두고, 아래쪽 새빨간 화염을 보았다. 그러자 푸른빛의 장막에서 은색 불새가 튀어나와 불길 속으로 신나게 뛰어들었다.

활활 타오르던 불길은 서령불새의 뱃속으로 사라졌고, 불새는 맑게 지저귀며 날아올라 곧장 한립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수결을 맺자 주변의 푸른 기운이 걷히고 허공을 뒤덮은 푸른 연꽃들이 나타났다. 연꽃들은 작게 몸을 떨고 72자루의 푸른 비검으로 돌아왔다.

푸른 빛줄기로 변한 한립은 비검들을 전부 회수하고는 그 즉시 둔광을 일으켜 그곳을 벗어났다.

* * *

한립이 한창 거서와 싸우고 있을 때 마금산맥 모처의 궁전 안에서는 세 사내가 나란히 서서 새까만 석문을 지키고 있었다.

거서의 숨이 끊기는 순간, 푸른 장포 사내가 얼굴을 찌푸렸다.

“철 형, 어디 불편하십니까?”

옆에 서 있던 혈포 거한이 그것을 눈치채고 쳐다봤다.

“아닙니다. 갑자기 화신이 멸해져서요.”

“화신이요? 혹시 마골주(魔骨珠)를 이용해 다른 존재의 몸에 깃들여 놓은 화신 말입니까?”

그의 말에 온몸이 은빛으로 반짝이는 노인이 끼어들었다.

“다안 형께서는 제 신통을 꿰고 계십니다.”

푸른 장포 사내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노인을 보았다.

“마골주를 사용하면 못해도 본체의 2, 3할의 신통은 발휘할 수 있는 것으로 압니다. 마금산맥에 우리 셋을 제외하고 철 형의 화신을 제거할 자가 있단 말입니까?”

은색 장포 노인은 못들은 척 하고 제 할 말만 했다.

“다안 형, 벌써 잊으셨습니까? 성조 대인을 따라 영계에 온 우리 셋 말고도 동급의 존재가 한 명 더 있지요. 그 마원 놈의 신통이 우리와 맞먹지 않았습니까.”

혈포 거한이 미소 지었다.

“흥, 감히 성조께서 우리에게 공동으로 관리하라며 나눠주신 현천의 보물 조각을 들고 달아난 자가 어찌 감히 소란을 피운단 말입니까.”

은색 장포 노인이 냉소했다.

“알 수 없지요. 마원이 바깥에 나가 현천의 보물을 수리한 다음 그 힘으로 성계로 돌아갈 작정을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혈포 거한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바깥에 나가 현천의 보물 조각을 수리한다고요? 그놈은 자기가 아직 고마계에 있는 줄 아나봅니다. 영계에도 성계만큼이나 실력자들이 많습니다. 성조 대인께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현천의 보물을 파괴해 강제로 고마계와 영계의 계면(界面)을 열고 이쪽으로 넘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은색 장포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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