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2화. 녹발인
*
은색 불덩이들은 핏빛 화염을 그냥 두지 않았고, 은색 불길이 날아드는 곳마다 핏빛 화염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눈 깜빡할 사이에 불바다를 이루던 핏빛 화염이 거의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핏빛 궁장 여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부채를 향해 입에서 핏빛 기운을 뿜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운을 보충하기도 전에 핏빛 부채가 갈라져 터져버렸다.
‘이럴 수가!’
핏빛 부채는 비범한 위력을 지닌 보물이었다. 극독을 품은 핏빛 화염을 방출해 대부분의 보물이나 보호막에 닿기만 해도 상대를 오염시킬 수 있었다. 덕분에 여인은 핏빛 부채를 이용해 수많은 적을 물리쳐 왔다.
그런데 핏빛 화염이 한립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괴이한 은색 불새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이에 보물과 의식이 연계되어 있던 여인은 피를 뿜고는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그러나 지금은 놀랄 때가 아니었다. 은색 불새가 깃털을 회수하고 그녀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여인은 입가의 피를 닦아내고 허리춤에서 핏빛 호리병을 꺼내 들었다. 그녀가 아끼는 또 다른 보물이었다. 주술소리가 울리고 호리병 안에서 핏빛이 반짝였다.
쉭!
핏물은 폭포처럼 쏟아져 나와 핏빛 파도를 만들어 은색 불새를 덮쳤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핏물은 검은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다.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공격이었다.
서령불새는 핏물을 향해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그대로 돌진하지 않고 입에서 우윳빛 기운을 분출했다.
츠츠츳!
우윳빛 기운과 핏물이 충돌하며 괴이한 소리를 내며 하얀 수증기가 생겨났다. 우윳빛 기운은 금조진화가 변한 것으로 정순한 양기를 품고 있어 음산한 사기를 지닌 핏물과는 상극이었다.
은색 불새로부터 우윳빛이 계속해서 흘러나왔고 핏빛 호리병의 핏물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은 둘 사이의 대치가 지속될 듯했다.
한립은 핏빛 호리병을 조종하느라 여념이 없는 궁장 여인과 멀리 언 노인을 살폈다. 차가워진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녹발 이족인에게 고정되었다.
셋 다 연허기 최고봉이었지만 언 노인의 기운이 가장 약하고 핏빛 궁장 여인의 기운이 가장 넘쳤다. 중간인 녹발인만 제거하면 셋의 협공은 순식간에 깨질 것이다.
한립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등 뒤로 수정 날개 한 쌍과 금빛 비늘 갑옷을 불러냈다.
꽈광!
그는 날개를 펄럭이며 청백색 뇌전 속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그의 발밑에 있던 푸른 연꽃이 백여 개의 푸른빛으로 변해 언 노인과 궁장 여인을 향해 튀어나갔다.
여인과 노인은 푸른 검빛들이 달려들자 표정이 달라졌다.
이에 언 노인이 은색 원반에서 접시를 꺼내 던지자 접시가 열댓 개로 불어나 은색 보호막이 되어 푸른 검기를 막았다. 그리고 궁장 여인은 입에서 핏빛 실 뭉치를 내뿜었다.
핏빛 실 뭉치는 가느다란 바늘이 되어 검빛과 부딪쳐 요란한 불꽃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잠시 여인과 노인의 시선이 푸른 검빛에 집중되었다.
멀리서 한립이 사라진 것을 본 녹발인은 가슴이 철렁해 즉시 수결을 맺어 직각의 창날을 지닌 노란 청동 과(戈)를 불러냈다.
거의 동시에 녹발인 머리 위로 청백색 뇌전이 번득이고 누군가 새하얀 손을 뻗었다.
하얀 손에서 퍼져나간 오색 한염이 오색 거대 손으로 변해 녹발인을 잡아채려 했다.
그리고 멀리서 허천정이 푸른 실 뭉치를 날렸다. 실 뭉치는 솥을 떠나자마자 번득이며 종적을 감추었다.
이미 경계를 하고 있던 녹발인은 한립이 나타난 순간 주저하지 않고 노란 청동 과를 발동했다. 청동 과는 바르르 몸을 떨며 눈부신 빛을 뿜어내 거대 손을 베었다.
청동 과는 녹발인이 상고 유적에서 찾은 이보로 술법을 깨트리는데 위력적이었고 웬만한 술법 공격은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잘려나갔다. 그러나 거대 손 역시 오색 한염을 응결해 만든 것이었다.
노란빛이 오색 거대 손을 파고들었지만 더는 나가지 못하고 막혀버렸다. 눈을 빛낸 한립이 재빨리 법결을 발동했고 오색 거대 손은 청동 과를 꽉 쥐었다.
식겁한 녹발인이 법력을 끌어올려 다른 신통을 펼치려는데 허공에 파동이 일며 푸른 실 뭉치가 나타나 그를 돌돌 감아버렸다.
녹발인은 몸에서 맹렬히 녹색 화염을 일으켜 실을 태우려 했지만 괴이하게도 푸른 실은 영기의 빛을 반짝일 뿐 타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한립은 비웃으며 한 손을 들어 허천정을 불러들였다. 손가락으로 솥을 튕기자 그윽한 울림이 퍼져나갔다.
댕!
녹발인을 감싸고 있던 푸른 실들은 빛을 머금고 더욱 세게 조여 왔다. 한립의 수행이 늘어남에 따라 허천정의 위력도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이때 노란 청동 과를 쥔 오색 거대손이 떨어져 내렸다.
엄청난 압력에 녹발인의 몸이 부서질 듯 빠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특수한 공법을 익혀 육신이 단단해서 이 정도였지 평범한 수사였다면 바로 온몸이 터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녹발인은 거대 손이 머리로 떨어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콰직!
녹발인의 머리가 수박처럼 쪼개지자 몸을 감고 있던 푸른 실이 사라지며 머리를 잃은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시체가 바닥에 충돌하자마자 녹색 불덩이가 빠르게 솟구쳐 달아나기 시작했다. 공간 파동이 일고 멀리서 나타난 불덩이 안에 조그만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그러나 녹색 불덩이가 다시 순간이동을 하기 전 푸른빛이 번쩍이고 비검이 날아들었다. 원신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두 동강나 흩어졌다.
멀리서 한립이 손짓하자 비검이 다시 돌아와 그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서늘한 눈빛으로 핏빛 궁장 여인과 언 노인을 보았다.
언 노인과 여인은 비검들의 공격을 막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무슨 일이 생겼는지 똑똑히 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한립이 수중의 솥을 다시 발동하려는 찰나, 저 멀리서 황소울음 소리가 들리고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들려왔다.
한립과 언 노인 그리고 궁장 여인이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 교전하고 있던 검은 물결과 붉은 구름이 서로 떨어져 나와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검은 물결은 맹렬한 파도였고 붉은 구름은 새빨갛게 출렁이는 화염이었다.
하늘을 뒤엎은 검은빛과 붉은빛에 한립은 물론이고 언 노인과 핏빛 궁장 여인의 안색도 달라졌다.
한립은 신속히 작은 솥을 거두고 노인과 여인이 있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은색 불새가 폭발해 불씨를 남기고 소실되었고, 언 노인의 머리 위에서 하얀 구름과 대치하던 검은 산봉우리도 환영처럼 사라졌다.
한립이 검은 산과 은색 불새를 회수하자 노인과 여인을 괴롭히던 푸른 검빛들도 일시에 울며 퇴각했다. 한립 주변에 반짝이던 비검들도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심지어 주인을 잃은 노란 솥까지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립은 보물을 모조리 챙기고는 날개를 펄럭여 청백색 뇌전을 번득였다. 뇌전 빛이 몇 번 더 반짝이자 그는 하늘 저편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노인과 여인은 감히 그 뒤를 쫓지 못했다. 녹발인을 단숨에 죽인 그의 실력을 보았기 때문이다. 지선이 아무리 중요해도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멀리서 다가오는 검은 물결과 붉은 구름을 보고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여인은 핏빛 속에서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노인은 하얀 구름으로 변한 보물을 거두고 하늘을 가르며 달아났다.
그 속도가 굉장히 빨라 뇌둔술을 펼치는 한립에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허공에는 핏빛 궁장 여인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가까워오는 붉은 구름과 검은 물결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굉음과 바람이 불고 붉은 구름과 검은 물결이 도착했다.
“혈영, 지선은 어디 있느냐?”
붉은 구름 속에서 거대한 두꺼비 마수 거서가 나타났다. 피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두꺼비는 두 눈을 감고 있었는데 이마에는 회색 구슬이 괴이한 빛을 빛나고 있었다.
“농담이시지요? 제가 지선을 지니고 있었으면 철 백부님께서 바로 알아보셨겠지요. 게다가 그런 영물을 얻었으면 벌써 도망갔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궁장 여인이 뜻밖에도 거서를 향해 공손히 답했다.
“너나 혈비 모두 겉으로는 얌전해도 무슨 꿍꿍이를 지녔는지 알 수 없는 부류가 아니더냐. 확실히 묻지 않고는 너를 그냥 보낼 수가 없구나. 노부를 속였다가는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겠지?”
거서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주인 철시마가 거서의 몸에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쓸데없는 말이나 하며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닙니다. 어서 지선을 쫓아야지요. 힘을 보태면 이수주(璃水珠)를 주기로 한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검은 물길이 출렁이고 그 안에서 기다란 입을 가진 악어가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마악 수사, 성계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행도 공고히 하지 못했으면서 조금 말을 가려하시지요? 아무리 화신에 불과하다지만 지금 상태로도 당신은 충분히 때려눕힐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거서의 입을 빌려 철마가 냉랭히 경고했다.
“그런가요? 정말 그런지 확인해보고 싶어지는데요.”
마악이 사납게 눈을 번득였다. 이에 거서의 미간에서 회색 구슬이 빛나고 주변의 붉은 구름들이 활활 타올랐다. 마악도 큰 입을 벌리자 검은 물결이 세차게 출렁였다. 당장이라도 맞붙을 기세였다.
“흥! 예전 당신의 주인의 체면을 보아 참겠습니다. 지선만 찾으면 이수주는 약속한 대로 내어줄 것이고요.”
냉랭한 말투와 달리 철마는 마악을 꺼리는 눈치였다.
“같은 성계로 겨우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 믿어 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지선이 저 아이에게 없으면 달아난 외부인이 지녔다는 것입니까? 어찌 된 것인지 정황을 물어봐야 하지 않습니까.”
마악이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저 아이에게 물어보라고요? 혈비나 저 아이나 지선이 노부의 손에 떨어지기를 원할 것 같습니까? 차라리 우리 둘이 각각 한 명씩 쫓는 것이 확실할 겁니다.”
거대 두꺼비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알겠습니다. 저는 저쪽으로 가보지요. 지선을 찾는 대로 이수주와 바꾸러 오겠습니다.”
마악이 웃음을 터트리고 검은 물결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쿠릉!
검은 물결이 노인이 달아난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붉은구름 속 거서는 한립을 향해 날아갔다. 이번에도 역시 복잡한 얼굴의 궁장 여인만이 남겨졌다.
멀어지는 붉은 구름과 검은 물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녀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마악이 성계로 진입할 줄이야! 이 일을 어서 부친께 알려야 한다. 쯧, 지선은 차라리 한 가 녀석이 들고 달아나 버려야 할 텐데.”
그녀가 핏빛 빛줄기로 변해 허공을 갈랐다.
멀리서 한립은 뇌둔술을 펼쳐 달아나는 중이었는데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붉은 구름이 쫓아왔다.
한립은 한숨을 내쉬었다. 벽사신뢰가 얼마 남지 않아 계속 풍뢰시를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쫓는 자의 기세가 남달라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몸을 빼기 어려울 듯싶었다.
‘여기쯤이면 되겠지.’
그렇게 한참을 날아가다 한립은 거대 산봉우리들 사이에서 멈추었다. 그는 뇌전을 거두고 무수히 많은 푸른빛을 뿜어냈다. 푸른빛들은 도처의 허공으로 날아가 종적을 감추었다.
추격하는 존재가 평범하지 않다는 생각에 춘려검진을 펼친 것이다. 검진이 있으면 합체급 존재라 해도 죽일 자신이 있었다.
콰르릉.
그가 검진을 펼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이 핏빛으로 물들며 붉은 구름들이 몰려왔다. 불의 신이 강림한 듯 장관을 이루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