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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81화 (738/2,000)

981화. 얼떨결에 얻은 지선

*

“이대로 포기할 것이 아니니 상관없습니다. 다른 수사들과 힘을 합쳐 출구에서 매복하면 그자가 마금산맥을 떠나기 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잠시 고민하던 작은 짐승이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그의 말에 구렁이 머리 마수를 포함한 다른 마수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다들 작은 짐승을 신뢰하는 분위기였다.

마풍이 일며 다섯 마수는 원래 있던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때 한립은 멀리 날아가며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추격자들을 해치웠지만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달아나느라 원래 경로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마금산맥을 벗어나려면 다른 길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예상치 못한 마수를 마주칠 수 있어 위험했다.

나머지 마수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으나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성계 마수만 아니면 태일화청부를 사용하거나 둔술을 펼쳐 충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섬섬의 안부였다. 그녀가 죽으면 천외마갑은 한동안 수리할 수 없을 것이다. 마수들을 앞두고 빠져나간 수법으로 보아 다른 대비책이 있을 거라고 믿기로 했다. 그러나 규 씨 사내의 경우는 그냥 마수 떼들이 처리하는 것이 나았다.

한립은 쓸데없는 생각을 거두고 빠르게 이동하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푸른 둔광이 더욱 밝아지고 속도가 빨라졌다.

그 후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저계 마수들이 종종 튀어나왔지만 손쉽게 처리했다. 지금 그는 관목들이 자라난 언덕 위를 날고 있었는데 검은 기운이 언덕 대부분을 가려 꼭대기밖에 보이지 않았다.

쿠앙!

어디선가 갑자기 굉음이 쩌렁쩌렁 울렸다. 이에 깜짝 놀라 둔광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주시했다.

멀리 하늘 저편이 새빨간 구름으로 물들고 그 속에서 불구슬들이 마구 폭발하고 있었다.

쿠르릉! 쾅!

폭음이 잇달아 들려와 아주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이든 연허급 이상의 존재가 벌인 일임에 틀림없었다.

남색빛을 일렁이며 살펴보던 그는 갑자기 둔광을 일으켜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괜한 일에 말려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마핵을 구했으니 최대한 빨리 마금산맥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한립이 아무리 피하려 해도 성가신 일들이 자꾸 그를 따라다녔다. 잠시 후 새빨간 구름 속에서 영기의 빛 네 개가 튀어나왔다.

가장 앞선 것은 보라색 빛덩이로 불안하게 깜빡깜빡 거리며 한립이 날아간 방향으로 순간이동을 하며 이동했다.

그 뒤를 쫓는 세 개의 둔광은 녹색, 은색 그리고 붉은색이었다. 속도가 보라색 빛덩이에 비해 조금 쳐졌지만 파공음을 내며 순식간에 한립과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한립은 움찔했다. 피해야 할지 아니면 상대해야 할지 판단을 내릴 때였다. 그는 재빨리 회색빛을 뿜어내 몸을 보호하고 푸른 검들을 불러냈다. 검들은 푸른 연꽃으로 변해 피어났다.

‘뭐지……!’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명청령안으로 앞서 날아오고 있는 보라색 물체를 확인하고는 표정이 묘해졌다.

보라색 빛덩이 속에 녹색 얼굴에 두 손과 두 발에 잔뿌리가 난 괴물이 보였던 것이다. 고풍스러운 노란 갑옷을 걸친 괴물은 희미하게 약 냄새를 풍겼다.

“지선!”

옥간을 통해 지선의 초상을 보았기에 즉시 괴물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지선을 노리고 마금산맥에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넝쿨째 굴러온 호박을 차버릴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완전하지 않은 두 손과 두 발을 보니 부상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발각되어 급히 달아나는 중인 것 같았다.

그는 뒤따르는 수사들은 신경 쓰지 않고 한 손으로 허공을 쥐자 거대 손이 보라색 빛덩이를 덮쳤다. 앞에 또 다른 적이 나타나자 무표정한 지선의 눈빛에 절망감이 떠올랐다.

지선은 회색 거대 손이 날아드는 데도 둔광을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그대로 한립을 향해 돌진했다.

펑!

거대손에 붙들리자 보라색 빛이 흩어졌고 지선은 회색 기운에 끌려왔다.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한립의 손에 떨어진 것이다. 지선은 회색 기운에 구속당한 채 그에게 다가왔다.

한립은 희색이 만연해 소매 속에서 열댓 장의 금제 부적을 날려 보냈다.

파파파팟!

금제 부적들이 지선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다채로운 주술문자를 반짝였다.

“멈추시오!”

“죽고 싶으냐!”

날카로운 교성과 고함소리가 세 둔광 속에서 들려왔다. 꽤나 열을 받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한립은 그러거나 말거나 손바닥을 뒤집어 푸른 옥병을 꺼냈다.

“담겨라.”

옥병이 부들부들 떨며 푸른 기운을 뿜어내 제압된 지선을 휘감은 다음 빨아들였다. 그가 옥병을 마저 저물탁에 넣는 순간 세 둔광이 도착해 한립을 둘러쌌다.

살짝 고개를 숙인 한립의 표정은 고요하기만 했다. 아직 추적자들의 면면을 확인하지 않았지만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는 얼굴이었다.

“이런, 한 수사!”

“네 놈은!”

회색 기운이 가시자 그들은 그제야 한립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핏빛 속 누군가가 한마디 말도 없이 두 손에서 핏빛을 뿜었다. 그것을 본 한립은 앞쪽의 회색 기운을 북돋아 쏘아 보냈다.

촤륵.

두 줄기 핏빛의 위력이 보통이 아닌지 회색 기운을 가르기 직전이었다.

그 순간 회색 기운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번득이고 검은 동산 허상이 떠올랐다. 두 핏빛이 동산을 가르려다 괴력에 오히려 튕겨나갔다.

사방의 회색 기운들은 수많은 회색 실로 변해 튕겨나간 핏빛들을 상대했다. 핏빛들은 꿈틀거리며 피하려고 했지만 회색 실들이 너무 촘촘하게 달라붙어 동작이 느려지고 원형이 그대로 드러났다.

핏빛 장검 두 자루가 눈부신 영기의 빛을 머금고 영성이 충만한 모습으로 요동쳤다.

웅!

두 장검은 회색 실에 쌓여 꼼짝도 하지 못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핏빛 속 인물이 기합 소리를 내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회색 실에 붙들려 있던 핏빛 검들이 스스로 폭발했다.

핏빛이 흩어져 원자신광을 빠져나갔고 공간에 파동이 일며 괴이하게 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검령화허.”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핏빛 속 인물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바로 뇌운각에서 만났던 언 노인과 녹발 이족인이었다.

당시 한립의 실력을 살짝 엿보았기에 언 노인과 녹발 이족인은 핏빛 인물이 당하는 것을 보고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핏빛 속 인물은 짙은 눈썹에 앵두 같은 입술을 가진 궁장여인이었다.

그녀는 원자신광의 위력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들은 이대로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저 멀리 붉은 구름 쪽을 살폈다. 아직도 굉음이 들려오며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래쪽에서는 검은 물결이 붉은 구름을 계속해서 공격하고 있었다.

붉은 구름과 검은 물결은 상극인지 교전할 때마다 폭음이 울리고 수증기로 주변을 뿌옇게 만들었다.

“한 수사께서는 월 현질과 함께 산맥에 들어오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이곳에 홀로 계십니까?”

언 노인이 먼저 말문을 뗐다.

“안타깝게도 월 수사는 누군가에게 살해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죽었단 말입니까? 누가 그런 짓을 한 것인지 아시는지요?”

“월 수사가 혼자 있을 때 일어난 일이라 저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언 노인은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믿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의 반응에 한립은 쓴웃음을 지었다. 상대는 월종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가 언 노인과 특별한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굳이 해명하지 않았고, 다른 수사들을 둘러보았다.

“세 분은 어째서 저를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까?”

“흥! 알면서 뭘 물어보십니까. 지선만 내놓으면 보내주겠소.”

녹발 이족인이 사납게 외쳤다.

“지선이라……. 두 분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한립이 냉소하며 언 노인과 궁장 여인의 의사를 물었다. 언 노인이 머뭇거리자 궁장 여인이 차갑게 소리쳤다.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 셋이 저자를 죽이고 지선을 나눠 갖지요. 시간을 지체하다 마악과 철시마의 수하가 쫓아오면 끝입니다.”

그녀는 곧바로 손바닥을 합장해 핏빛 화염으로 불타는 부채를 불러냈다. 옥으로 만든 부채에는 새빨간 주술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좋소! 3분의 1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녹발 이족인은 궁장 여인의 말에 동의하며 오래되어 보이는 작은 솥을 방출했다. 그 모습에 언 노인도 주저하다 소매 속에서 은빛 인장을 불러냈다. 은빛 은장은 커다랗게 변하며 희미하게 바람소리와 천둥소리를 냈다.

그들이 힘을 합쳐 지선을 빼앗기로 결정하자 한립은 내심 탄식했다. 그들은 전부 연허 최상급 수사였기에 속도는 비슷할 것이다. 여기서 물러나면 그들을 따돌리고 달아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유일한 방법은 저들을 전부 죽이는 것뿐이었다. 지선을 거둘 때부터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예상했기에 그는 기다리지 않고 먼저 움직였다.

검은 산의 허상이 회색빛을 뿜으며 노인 위로 떨어졌다. 작은 동산이 그새 거대한 산으로 변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언 노인이 급히 물러나며 은색 인장을 가리켰다.

웅!

인장은 맑은 소리를 내며 몇 배로 불어나 산봉우리와 맞붙었다.

쿠릉!

산봉우리 아래에서 눈부신 빛이 터지고 무형의 파동이 넘실넘실 퍼져나갔다. 은색 인장도 위력이 대단한했지만 두 번째 제련을 마친 원자신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인장은 잠시 버티다 결국 거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조각났다. 거산은 흉흉한 기세로 대량의 회색 기운을 이끌고 노인을 덮쳤다.

이에 언 노인은 기겁하며 손수건을 분출했다. 그러자 손수건은 즉시 하얀 구름으로 변해 떠올랐고 노인은 거침없이 오색 법결들을 그 속으로 흡수시켰다.

구름 위로 떨어진 거산은 폭신한 솜에 떨어진 것처럼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우윳빛 구름이 작게 진동하며 산봉우리를 받쳐 들었다.

한립은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는 동안 녹발 이족인과 핏빛 궁장 여인이 동시에 공격을 개시했다.

녹발인이 솥을 향해 녹색 정기를 내뿜자 솥이 맑게 울며 솥뚜껑을 날려 보냈다. 솥 안에서 광채가 쏟아져 나와 흩어지더니 갑자기 날씨가 어두워지고 노란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은 노란 풍룡(風龍)으로 변해 한립을 향해 쇄도했다.

궁장 여인 역시 핏빛 부채를 펄럭여 대량의 핏빛 불구슬을 쏘아 보냈다. 그것을 본 한립은 무표정하게 푸른 솥을 꺼내들었다. 바로 허천정이었다.

그는 입에서 은색 화염을 분출했고 화염은 곧바로 은색 불새로 변해 날아올랐다.

“가라.”

우웅!

솥이 진동하자 온갖 짐승들의 문양이 떠올라 모호하게 빛났다. 영기의 빛이 터지고 괴수와 괴조의 허상들이 솥 주위를 맴돌며 노란 풍룡들을 향해 포효했다.

그들은 충돌하자마자 서로 물어 뜯고 할퀴어댔다. 그리고 은색 불새는 날개를 펼쳐 하늘을 뒤덮은 핏빛 불구슬로 돌진했다.

불구슬 표면의 새빨간 화염은 핏물처럼 색이 진했는데 궁장 여인의 태연한 표정으로 보아 불구슬의 위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태연한 표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불구슬들 사이로 뛰어든 은색 불새가 맑게 지저귀더니 바람을 불어 넣은 듯 엄청난 속도로 팽창했다. 그 속도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별안간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커진 은색 불새는 깃털에 하얀 주술문자들이 번득였다.

‘대단하군.’

한립도 속으로 화들짝 놀랐다.

서령불새가 금조진화를 잡아먹고 진화할 거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변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아직 금조진화를 전부 연화시킨 것도 아니었다.

서령불새는 영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한립이 명을 내리기도 전에 날개를 펄럭였다. 그러자 깃털들이 화살처럼 튀어나가 한 번에 핏빛 구슬을 관통했다.

퍼퍼퍼퍼펑!

깃털에 맞은 구슬들은 올록볼록하게 움직이다 폭발해 핏빛 불바다를 이루었다. 이에 열 받은 궁장 여인은 눈을 부릅뜨고 지체 없이 핏빛 부채를 쏘아 허공에 던지고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서 핏빛 빛기둥이 쏘아져나가 부채 속으로 흡수되었다. 부채 표면의 주술 문자들이 꿈틀거리며 진법 형태의 도안을 형성하기 시작해 허공의 핏빛 화염들이 번득이며 한곳으로 뭉치려 들었다.

이때 불구슬들을 관통한 은색 깃털들이 불타올라 주먹 크기의 은색 불덩이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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