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0화. 거울
*
붕!
청봉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백 마리의 마봉들이 일시에 흩어져 안개 속을 헤집었다. 오읍과 청봉 마응도 서로 입술을 달싹이며 전음을 주고받았다.
안개 속을 마구 돌아다니는 푸른 벌들과 달리 청봉 본체는 움직임이 느렸지만 오읍은 타박하지 않았다. 천봉분신술을 펼치는 동안은 어쩔 수 없었다.
마봉들은 안개 속을 꼼꼼하게 날아다니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회색 안개가 그렇게 넓지는 않았기에 일각이 흐른 후에는 절반 정도를 수색했다.
그러나 아무런 수확이 없자 오읍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고 나머지 마수들도 긴장한 기색을 드러냈다.
서걱!
더욱 짙은 안개 속을 수색하던 마봉 수십 마리가 금빛이 번뜩이며 반으로 잘려나갔다. 무척 빠르고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이어서 금빛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튀어나갔다.
“잡아라! 어서!”
신이 난 청봉이 분신들을 재촉했다.
붕붕붕!
마봉 떼들은 서둘러 그 뒤를 쫓았고, 오읍과 마응은 시선을 마주치고 몸을 날렸다.
펑.
두 마수는 함께 검은 마풍을 이뤄 금빛이 날아간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푸른 거대 벌은 날개를 파닥이며 보통의 속도로 그 뒤를 따라갔다. 순식간에 금빛 그림자와 마봉 떼 그리고 검은 바람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을 본 청봉은 눈을 껌뻑이다 아예 날갯짓을 멈추고 숨을 돌렸다.
쉭!
바로 그때 마수의 머리 위에서 파공음이 들리고 금빛이 날아들었다. 금빛은 휘황찬란했고 닿기도 전에 엄청난 영기의 압력이 느껴졌다.
그는 세 마수 중 수행이 제일 낮았고 천봉분신술을 쓰느라 수행이 제약당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청봉은 허공에 떠서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금빛이 청봉의 머리를 뚫기 직전 하얀 뼈창이 나타나 금빛을 막았다.
챙!
뼈창에 검은 화염이 일며 금빛을 쳐냈다. 빙글 돌아 원형으로 돌아온 금빛 역시 기다란 창이었다. 청봉 앞에 노란 빛이 나타났고 그 안의 인물은 분명 아까 먼저 출발한 황포인이었다.
황포인이 손을 뻗어 뼈창을 회수한 다음 검빛 방패를 들어 앞을 막았다. 그는 금빛이 튀어나온 회색 기운을 경계했다.
이때 허공에서 갑자기 검은 빛이 반짝이고 검은 그림자 두 개가 떨어져 내렸다.
휘잉!
광풍이 불고 검은 그림자가 지나간 자리에 공간이 왜곡되었다. 그러자 아래쪽에 있던 금빛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빛 그림자는 한립으로 위치가 발각되자 당황한 기색으로 서둘러 위쪽으로 주먹을 뻗었다. 금색 주먹 허상을 날리고 금빛 빛줄기로 변해 자리를 피하려 한 것이다.
“어딜 도망가려고!”
검은빛이 반짝이며 허공에서 괴성이 울렸다.
쾅!
떨어져 내리던 검은 그림자들은 금빛 주먹을 박살내고 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거대한 검은 망치들이었다.
망치는 빙글빙글 회전하며 강력한 흡입력을 선보였다. 그러자 금색 인영이 얼마 가기 못해 무형의 힘에 이끌려 속도가 느려지고 말았다.
기회를 보던 황포인이 번개처럼 뼈창을 던졌고, 청봉은 꼬리를 털어 푸른 실을 뿜어냈다.
뼈창과 푸른 실이 앞뒤로 금빛 인영을 공격했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푸른 실이 먼저 금빛 인영으로 스며들었다. 금빛 인영이 몸을 부르르 떨고 피비린내를 뿜으며 빛이 약해졌다.
푹!
그다음에는 검은 창이 금빛 인영의 내단을 꿰뚫었다. 창 표면에서 검은 불길이 옮겨 붙어 인영을 활활 태우기 시작했다. 허공의 검은 망치 중 하나가 그대로 검은 불길로 쇄도했다.
꽝!
땅이 꺼질 듯 엄청난 굉음이 올리고 검은 화염 속 금빛 인영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제야 허공에 파문이 일고 쌍뿔 마수 오읍이 나타났다.
그가 만족스럽게 웃자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마응과 청봉도 미소를 머금었다. 미리 계획한 대로 청봉의 벌 떼로 상대를 궁지로 몬 다음 일부러 약점을 노출해 유인한 것이다.
세 마수가 마음을 놓은 순간, 청봉의 뒤에서 푸른 장검이 불쑥 나타나 눈부신 검빛으로 변해 돌진했다.
“헛!”
청봉은 뒤쪽의 이변을 감지하고 원뿔형의 벌침 부위를 흔들었다. 그러자 푸른 독침이 터지며 청봉을 감쌌다.
그러나 그 위를 푸른 검빛이 스치고 청봉은 부르르 몸을 떨며 반으로 갈라져 추락했다. 독침으로 만들어낸 보호막도 소리 없이 조각나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푸쉭!
녹색 화염 덩이가 조각난 청봉의 시체 속에서 빠져나왔다.
“마응 수사, 살려주시오!”
녹색 화염 속의 청봉은 다급하게 소리치며 황포인 쪽으로 날아갔다. 이에 마응도 변고가 생긴 것을 알고 검은빛을 뿜어 청봉의 원신을 구해주려 했다. 그런데 허공에서 코웃음 치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황포인은 송곳으로 머리가 찍히는 듯한 두통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고 몸을 가누지 못해 추락했다.
꽈광!
그가 떨어지자 지척에서 청백색 뇌전이 번뜩이며 새하얀 손바닥이 불쑥 튀어나와 오색 화염이 황포인을 감쌌다.
순식간에 새하얀 손바닥이 금빛으로 빛나며 황포인의 가슴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이에 황포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극심한 고통은 참기 어려웠지만 생사가 걸린 일이었기에 그는 필사적으로 의식 한 줄기를 움직였다.
그러자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금색 방패가 밝게 빛나며 몇 배로 커졌고 표면에 열댓 개의 크고 작은 주술문자가 떠올랐다. 방패의 위력이면 금빛 손바닥을 막을 수 있을 거라 믿은 것이다.
두통이 빠르게 가시고 있으니 이번 일격만 버티면 반격을 날려 복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 금빛이 반짝이고 금색 손바닥이 방패와 부딪쳤다.
날카로운 충돌음이 들리고 손바닥이 놀랍게도 방패를 뚫고 그대로 황포인의 몸속에서 마핵을 뽑아내 버렸다.
화륵.
손바닥은 은빛을 반짝이며 은색 화염을 흘려보내 마응의 시체를 불태웠다. 마응은 원신도 달아나지 못하고 푸른 연기로 소멸해버렸다.
청백색 뇌전이 반짝이고 그 안에서 날개 달린 푸른 장포 청년이 등장했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한 팔을 거두었고, 그의 손에는 새까만 빛의 마핵이 들려있었다.
그는 바로 한립이었다.
전력을 다해 황포인에게 날아들던 청봉 원신은 혼비백산에 방향을 틀려했지만 너무 늦었다. 그 모습에 한립은 실소를 터트리며 회색 기운을 뿜어 청봉의 원신을 가두었다.
그 안에서 원자신광의 회색 기운이 밝게 빛나자 초소형 청봉은 회색 기운의 압력에 그대로 터져나가 녹색 빛으로 흩어졌다.
청봉 원신이 소멸당하자 안개 속의 마봉들은 작은 폭음을 내며 터져나갔다. 청봉과 마응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한립은 추락한 마응의 시체는 쳐다보지도 않고 시선을 마지막 고계 마수에게 돌렸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눈빛이었다.
그의 눈빛에 쌍뿔 마수 오읍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갔다. 청봉과 마응의 수행이 그보다 못한다 해도 천지차이는 아니었다. 그들을 손쉽게 죽이고 원신마저 처리했다는 것에 그는 소름이 끼쳤다.
오읍은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눈앞의 청년이 진짜라면 그들을 유인한 자와 나중에 청봉을 기습하려다 망치에 맞아 죽은 금빛 그림자는 뭐란 말인가?
둘 다 상당한 영기의 압력을 발산했기에 속을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전면전을 펼치면 죽는다. 일단 후퇴해 도움을 구해야 한다.’
오읍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두 손을 뻗자 망치가 원래 크기로 변해 돌아왔다. 이어 그는 입을 벌려 삼각형 청동거울을 꺼내 수결을 맺었다.
우웅!
청동 거울이 서늘한 빛을 뿜었고, 괴이하게도 빛을 쬔 오읍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예상치 못한 상대의 행동에 한립도 당황했다. 그가 얼굴을 굳히자 두 눈에서 남색 빛이 소용돌이쳤다. 혼백이라도 끌어당길 듯한 눈빛이었다.
무언가를 감지한 한립은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다른 손으로는 미간을 찍었다. 그러자 검은 빛이 반짝이고 파멸법목이 나타났다. 요목은 새까만 빛을 반짝였고 희미하게 주술문자들이 요동쳤다.
쉭!
검은 빛기둥이 파멸법목을 떠나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잠시 후 어딘가에서 경천동지할 폭음이 울리고 허공이 극심하게 떨리며 파동이 일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서늘한 기운이 튕겨 나와 휘청거렸다. 그리고 빛이 가신 자리에는 기겁한 쌍뿔 마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마수 위로 청백색 뇌전이 번득이고 누군가 나타났다.
“안 돼!”
쌍뿔 마수는 사납게 소리치며 들고 있던 망치들을 힘껏 던졌고, 망치는 뇌전 속에 나타난 누군가를 으깨려 달려들었다.
동시에 앞섶이 번뜩이고 푸른 깃발이 날아올라 남색 보호막으로 변해 마수를 감쌌다. 마수는 화살처럼 튀어나가 한립과 거리를 벌리려 했다.
그러나 청백색 뇌전이 천둥소리를 내며 은빛 찬란한 뇌전으로 바뀌더니 거대한 푸른 붕새로 변했다. 은색 뇌전을 품은 대붕은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달려드는 검은 방패들을 발톱으로 잘라버렸다.
콰릉!
천둥소리가 들리고 종잇장처럼 찢겨나간 망치가 튕겨나가며 폭발했다. 거대한 발톱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쌍뿔 마수 오읍의 남색 보호막을 노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평범해 보이던 남색 보호막이 빛을 머금고 수정 보호막으로 변했다. 거대한 발톱의 괴력도, 은색 뇌전도 수정 보호막에는 통하지 않았다.
보호막 속 오읍이 한시름을 놓으며 미소를 되찾았다. 바로 그때 대붕의 부리가 보호막을 쪼아댔다.
쾅! 쾅! 콰앙!
푸른빛이 연달아 때리고 대붕이 계속 쪼아대자 결국 수정 보호막에 금이 가더니 남색빛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익!”
오읍은 화들짝 놀라 두 팔을 휘둘렀다. 열 개의 손톱에서 수많은 검은빛들이 튀어나가 빼곡한 검은 그물을 형성해 그를 보호했다.
그러나 푸른빛이 번뜩이자 은색 뇌전이 검은 그물의 미세한 구멍으로 지나갔다. 미친 듯이 허공에 손톱을 휘갈기던 오읍은 멍하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가슴에 핏빛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안에서 은빛이 반짝였다. 겁에 질린 오읍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은빛 뇌전이 폭발해 마수의 몸을 휩쓸었다.
천둥소리는 한참을 이어지다 멎었다. 오읍의 육신을 물론이고 원신까지 맹렬한 뇌전 폭발의 여파로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 자리에는 삼각형 청동 거울만 둥실 떠있었다. 푸른 대붕의 몸이 줄어들어 다시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왔고, 한립은 푸른 거울을 끌어와 살폈다.
대충 봐서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관심이 가는 물건이었다. 거울은 여러 수사의 법력을 연결했고, 다른 이를 데리고 둔술을 펼칠 수 있었다. 마수가 어떻게 얻은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한립은 저물탁에 거울을 넣어두었다. 끈질기게 따라붙던 마수들을 빠르게 죽이느라 태일화청부와 갑원부 두 장을 한 번에 썼지만 이것을 얻었으니 손해는 아니었다. 한립은 다시 푸른 빛줄기로 변해 안개 속을 다시 날아갔다.
* * *
시간이 흐르고 검은 마풍이 하늘 저편에서 불어왔다. 안개를 앞두고 선회하던 마풍 속에서 다섯 마수들이 나타났다.
“이곳이 마지막으로 기운이 느껴지는 곳입니다.”
작은 짐승이 안개를 훑으며 신중한 얼굴로 말했다.
“오읍 대인과 다른 수사들이 힘을 합쳤는데 이렇게 빨리 소식이 끊긴 것이 이상합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요?”
구렁이 머리 마수가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알 수 없지요. 허나 어찌 되었든 모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움직여야 합니다.”
작은 짐승을 비롯한 마수들은 마풍을 일으켜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 * *
반각 후, 그들은 한립이 쌍뿔 마수와 마응 그리고 청봉을 죽인 자리에 도착했다. 그들은 놀란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고, 그중 오리를 닮은 괴수가 하얀빛으로 변해 주변에 스며들었다.
잠시 후 아래쪽에서 마기가 요동치고 오리 마수가 튀어나왔다. 물갈퀴가 달린 양발에 조각난 소뿔들이 들려 있었다.
“오읍 대인의 뿔이 아닙니까! 이게 부서지다니 정말 목숨을 잃으셨나 봅니다.”
작은 짐승이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영계인은 달아나 버렸고 저희로서는 따라잡을 방법이 없습니다.”
구렁이 마수가 한숨을 쉬며 작은 짐승을 보았다.
“상대가 오읍 대인과 나머지 수사들을 죽였으니 따라잡아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봤자 적수가 되지도 못하겠지요. 돌아갑시다.”
작은 짐승은 콧방귀를 뀌며 고민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
“이대로 돌아가면 나중에 주인님께 할 말이 없을 겁니다. 분명 펄펄 뛰실 텐데요…….”
또 다른 마수가 눈치를 살피며 앞날을 걱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