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9화. 천봉분신술(千蜂分身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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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령천화가 천천히 금조진화를 연화시키며 별다른 문제가 없자 한립은 의식을 거둬 다시 주변 경계에 전념했다.
옅은 안개는 꽤 넓게 퍼져 있었지만 한참이 지나도 마수와는 마주치지 않았다. 인면취가 옅은 안개 속의 유일한 고계 마수였던 것 같았다. 이에 한립과 섬섬은 지난번보다 빠르게 안개를 통과했다.
반나절 후 그들은 안개 지대의 끝에 이르렀다. 그러나 푸른 빛줄기는 안개를 빠져나오자마자 우뚝 멈춰 섰다.
한립은 눈앞의 광경에 약간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들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검은 마풍(魔風)을 휘날리며 수백 마리의 중, 고계 마수들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마수 무리 앞에는 한 쌍의 검은 뿔을 지닌 반인반수의 마수가 뜻밖이라는 얼굴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마수 앞에는 은색 갑옷을 입은 사내가 원뿔 형태의 새빨간 비차를 밟고 대치중이었다.
은색 갑옷의 사내는 그들과 헤어진 규 씨 사내였다. 우연인지 그도 한립과 같은 경로로 마금산맥을 빠져나가려다 마수 떼에게 길이 막힌 것이다.
“……?”
규 씨 사내는 마수의 표정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안개를 빠져나온 한립과 섬섬을 발견하고는 내심 안심했다.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던 차였다.
대부분 중계 마수들이었지만 고계 마수도 서른 마리가 넘었다. 거기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반인반수 마수는 그와 동급이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정면대결로는 무리고 달아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나 고계 마수 중 일고여덟 마리가 날개가 있는 조류 혹은 곤충류였다. 그러니 어찌 당황스럽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한립과 섬섬이 나타났으니 살아서 달아날 확률이 훨씬 높아졌다.
안개를 나서자마자 이 광경을 본 섬섬은 난색을 표했고 한립은 마수들을 훑으며 생각에 잠겼다. 수백 마리의 마수들이 전부 죽일 듯이 그들 셋을 노려보고 있었다.
“흐하하! 네 놈이었구나! 소주를 죽인 자를 잡아가면 주인님께서 큰 상을 내릴 것이다. 쳐라! 나머지 두 놈은 없애고 저 놈은 될 수 있는 대로 생포한다.”
쌍뿔 마수 오읍이 한립의 얼굴을 확인하고 광소하다 살기등등하게 외쳤다. 명이 떨어지자 중, 고계 마수들이 포효하며 한립과 섬섬 그리고 규 씨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거대한 마풍을 몰고 다른 마수들이 몰려오기 전에 열댓 개의 둔광이 번뜩이며 튀어나왔다.
대부분 머리가 셋인 괴조거나 거대한 날개가 달린 거대 곤충류의 마수들이었다. 녹색 기운에 휘감긴 쌍뿔 마수 오읍만이 녹색 나무판자를 밟고 날아오고 있었다.
오읍이 노리는 것은 오직 한립이었다.
“흩어져 달아나세!”
한립은 상대가 자신을 노리자 푸른 빛줄기로 변해 허공을 갈랐다. 그는 마수 떼를 향해 돌격할 마음도, 옅은 안개로 물러날 마음도 없었다. 그래서 측면을 택해 쏘아져나갔다.
섬섬과 규 씨 사내도 민첩하게 움직였다.
사내는 핏빛을 뱉어 비차에 흡수시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먼 허공에서 번득이며 나타나 검은 빛덩이로 변해 달아났다.
섬섬 역시 작은 깃발을 방출하자 몸에서 하얀 빛이 터져 나오며 하얀 빛구슬로 변해 펑! 하고 폭발했다. 그러자 똑같이 생긴 수십 개의 하얀 빛구슬이 사방팔방으로 튕겨나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잔영을 남기며 공간을 뛰어넘고 있었다. 그 중 몇 개는 마수들에게 걸려 잡히거나 터졌지만 나머지는 달아나는데 성공했다. 수많은 고계 마수들 중 누구도 그 중 무엇이 진짜 정족 여인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한립 일행이 손쉽게 포위를 벗어나자 쌍뿔 마수는 대노했고 두 팔을 뻗어 근처를 지나는 하얀 빛구슬 두 개를 부숴버렸다. 이어 밭 밑의 녹색 나무판자가 빛을 머금고 나무배로 변해 바람을 휘날리며 한립을 쫓았다.
지금 그의 뒤로는 새까만 독수리 마수와 뇌전을 번뜩이는 거대 녹색 벌이 뒤따르고 있었다. 세 마수는 한립을 끈질기게 추격했다.
다른 곳으로 달아난 규 씨 사내도 몇 마리의 고계 마수들에게 쫓겼다. 그리고 비행에 빠른 마수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나머지 하얀 빛구슬을 노렸다.
수백 마리의 마수들은 마풍 속에서 세 무리로 갈라져 각각 한립과 규 씨 사내 그리고 흰 구슬들을 향해 날아갔다.
한립은 뒤를 살펴보고 정족 여인이 무사히 빠져나가자 일단 안심했다.
그는 순식간에 엄청난 거리를 주파하고 있었다. 문제는 고개를 돌리면 세 마수들이 아직도 쫓아오고 있었고 더 멀리서는 마수들이 가득한 검은 마풍이 날아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립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바짝 뒤쫓는 세 마수는 두려워할 것도 없었지만 괜히 그들에게 시간을 쏟다 마수 떼에게 따라 잡히면 큰일이었다. 아직 법력을 다 회복하지 못한 그로서는 무리였다.
꽈광.
그가 재빨리 수결을 맺자 등 뒤로 수정 날개 한 쌍이 나타났다. 날개를 펄럭인 그는 청백색 뇌전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 순간 번득이는 뇌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립은 날갯짓을 반복했다.
절묘한 경지에 이른 뇌둔술을 발휘해 청백색 뇌전이 번뜩일 때마다 그는 세 마수들과 거리를 벌렸다.
“저런!”
흠칫 놀란 오읍은 마음이 급해졌다. 눈앞에서 한립을 놓쳤다가는 그의 목숨이 온전치 못할 것이다.
돌연 오읍의 입에서 삼각형의 기괴한 거울이 나타났다. 오읍은 고개를 돌려 뒤에서 날아오는 고계 마수들에게 무어라 으르렁거렸다.
그 소리에 마응(魔鷹)과 청봉(靑蜂)이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것을 본 쌍뿔 마수 오읍이 다시 사납게 괴성을 질렀다. 이번에는 살기가 충만했다.
이에 마응과 청봉은 기겁하며 억지로 입을 벌려 거울 속으로 검은색과 푸른색 구슬을 분출했다.
삼각 청동거울이 몸을 떨고 거울 표면의 색이 푸른색과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오읍이 기쁜 얼굴로 거울을 허공에 던지고 입에서 회색 구슬을 뿜었고, 회색 구슬도 허공을 선회해 거울 속으로 들어갔다.
우웅!
이제 거울이 발산하는 빛이 검은색, 푸른색, 회색으로 늘어났다. 거울의 빛이 용처럼 꿈틀거리며 세 마수를 뒤덮었고 청동거울도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을 품은 거울은 한 번에 공간을 뛰어넘으며 청백색 뇌전을 뒤쫓았다.
한립에 비해 약간 느렸지만 그래도 오읍은 안심했다. 상대의 수행이 그보다 못했고 보물의 힘으로 세 마수의 법력을 응결했으니 그를 따라잡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청백색 뇌전과 삼색 기운이 서로 반복되며 추적이 계속되었다. 결국 그들은 뒤에서 따라오던 거무튀튀한 마풍의 시야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검은 바람이 걷히고 나타난 서른 마리의 중, 고계 마수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어쩝니까. 영계인이 너무 빨라 오읍 대인도 겨우 따라갔는데요.”
“당연히 계속 쫓아야지요. 오읍 대인께서 자신의 위치를 나타내는 법기를 나눠주시지 않았습니까! 이걸 따라 가면 됩니다.”
구렁이의 머리를 한 마수의 말에 멧돼지를 닮은 마수가 조용히 답했다.
“흥, 그 속도로 어찌 오읍 대인을 쫓는다고! 추격만 하다 늙어 죽겠습니다.”
구렁이 머리 마수가 눈을 부라렸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당신 혼자 빠르고 나머지는 너무 느려 방해만 된다는 것입니까?”
멧돼지 마수는 열 받아 씩씩 대는 것 같으면서 교묘하게 다른 이들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구렁이 머리 마수는 냉소하며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자연히 다른 마수들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됐습니다. 연망 수사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제각각 속도가 다르니 우르르 몰려가다가는 추격에 실패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으니 속도가 빠른 이들은 추격을 계속하고 나머지는 돌아가 기다리는 것으로 하지요.”
몸이 투명해 다채로운 빛깔을 내는 작은 짐승이 말했다. 꼭 명령하는 말투였지만 구렁이 마수를 포함한 다른 마수들은 그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잠시 다투며 속도가 빠른 다섯을 가린 후 나머지는 돌아갔다.
남은 다섯 마수에는 구렁이 머리 마수와 작은 짐승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둔광을 하나로 연결해 이전보다 빠르게 쏘아져나갔다.
* * *
한립은 아직도 마수들이 쫓아오자 얼굴을 찌푸렸다. 반나절 넘게 달아나며 거리를 벌리고 있었지만 완전히 떨구기는 어려워 보였다.
마금산맥에서 그는 외지인으로 의식이 크게 제약당하지만 마수들은 마기 속에서 그의 기운을 추격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보름을 날아가도 저들을 따돌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마금산맥 주위의 진법을 다시 봉쇄할 날이 십여 일 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대로 달아나느라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산맥에는 성계 마수도 존재할 텐데 머지않아 그들이 나설 수도 있었다.
뇌둔술을 오래 펼치다 보니 벽사신뢰를 적잖이 소모했고 그가 경계하던 마수 떼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마수들을…….’
시간이 흐를수록 한립은 살심이 강해지고 있었다. 한식경을 더 날아가자 전방에 회색 안개가 나타났다. 그리 짙지는 않아도 꽤 규모가 있는 듯했다.
한립은 서늘하게 눈을 빛내며 즉시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청백색 뇌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는 남색빛을 일렁이며 안개 속을 살폈다. 주변에 다른 마수가 숨어 있지 않자 보라색 부적을 꺼내 몸에 붙였다.
팟-
부적이 빛덩이로 변해 그를 감쌌고 은색 주술문자들이 요동쳤다. 은빛 속에서 한립이 종적을 감추었다. 태일화청보로 몸을 허상화 시킨 것이다.
이 부적으로 합체 초기 존재도 속여 넘겼으니 그를 뒤쫓는 연허급 마수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허상화한 후 속도가 크게 느려진다는 단점만 없었으면 진작 부적을 사용해 마수들을 따돌렸을 것이다.
안개 속에 숨은 그는 조용히 왔던 방향을 주시했다. 잠시 후 삼색 기운이 번뜩이며 안개 속으로 들어왔다.
“이게 어찌된 걸까요? 그 자의 기운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마응이 녹색 눈을 번뜩이며 주변을 살폈다.
“놓친 건 아니겠죠?”
거대한 청봉도 걱정스럽게 물었다.
“놓쳤을 리 없다. 대인들이라 해도 한 번에 만 리를 날아갈 수는 없는 법.”
오읍이 안개 속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아! 그 자가 고명한 은신술을 펼쳤거나 아니면 기운을 숨길 수 있는 보물을 지니고 있나 봅니다.”
“그렇겠지. 달아날 수 없을 것 같으니 아예 숨어서 우리를 기습할 생각인가 보구나.”
마응의 말에 오읍이 흉악한 웃음을 머금었다.
“하하, 수행이 저보다 낮은 자가 대인과 대적한다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방심하지 말거라! 감히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믿는 바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며칠 전 소주를 죽인 것도 그 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았으면 주인님께서 이렇게 중요한 때에 우리를 파견했을 리 없겠지.”
청봉을 향해 오읍이 경고했다.
“예? 소주께서 이 자에게 당하셨단 말입니까!”
“소주께서는 저 자와 수행이 엇비슷했지만 주인님께서 주신 강력한 보물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상대가 강적이라는 뜻이니 정말 조심해야겠습니다.”
마응이 안색이 달라지며 말했다.
“반드시 상대를 죽이거나 붙잡아야 한다. 이번 일이 실패하면 주인님께 어떤 일을 당할지 모두 알고 있겠지?”
오읍의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그는 곧바로 두 손으로 머리의 뿔을 당겨 뽑아냈다. 그러자 거대한 뿔이 검은빛이 반짝이는 망치로 변했고, 검은 갑옷을 입은 상반신과 하반신이 검은 기운을 뿜었다.
이에 마응과 청봉은 두려운 기색을 보였다. 마응이 먼저 날카롭게 울며 검은 날개를 펄럭여 훤칠한 노란 장포 사내로 변신해 하얀 뼈창과 금빛 방패를 손에 들었다.
뼈창에는 검은 화염이 흘렀고 방패에는 삼두육비의 마물 도안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청봉은 투명을 날개를 빠르게 흔들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푸른 기운이 거대 벌의 온몸을 돌고 날개 주위에서 달걀 크기의 빛덩이들로 뭉쳐졌다. 크기는 작았지만 청봉과 똑같이 생긴 푸른 벌들이었다.
“청봉 수사, 청봉분신술이 이렇게 늘었단 말입니까? 지난번 보았을 때보다 훨씬 많은 마봉(魔蜂)들을 불러낸 것 같은데요.”
주변의 벌떼를 본 황포인이 감탄했다.
“하하, 그간 열심히 수련한 덕에 신통이 조금 늘었습니다. 벌들의 수만 불어난 것이 아니라 공격력도 늘어났답니다.”
청봉이 자랑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잘 되었다. 청봉, 분신들로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오읍이 망치를 들고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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