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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78화 (735/2,000)
  • 978화. 발견

    *

    “답례요?”

    그 말에 한립은 웃음을 머금었다.

    “제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나중이 아니라 지금 당장 대가를 지불할 수도 있습니다.”

    규 씨 사내의 얼굴이 서늘해졌다.

    “한 선배님, 저는 천외마갑 수리를 오랫동안 연구해왔습니다. 돌아가는 대로 천외마갑을 완벽하게 수리해 드릴 것이며 수백 년 후에 진린본원을 찾으실 계획이 있다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섬섬은 굉장히 평온한 기색이었는데 한립의 선택을 믿는 눈치였다. 과연 그녀의 예상대로 한립이 곰곰이 생각하다 규 씨 사내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지금에 와서 그냥 지켜볼 수는 없으니 수사께서 알아서 판단하시지요.”

    “…….”

    한립의 말에 규 씨 사내가 분노해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피비린내가 한층 농염해졌다.

    콰릉!

    한립은 짧게 한숨을 쉬고는 금빛 뇌전을 번득여 삼두육비의 법상을 불러냈다. 발밑에는 수십 자루의 푸른 비검들이 선회하며 푸른 연꽃으로 피어났다. 그리고 한립은 뒷짐을 지고 규 씨 사내를 바라보았다.

    섬섬은 미소를 짓더니 한 손에 기린 도안이 그려진 푸른 부적 뭉치를 꺼내 들고, 다른 손에는 검은 깃발을 쥐었다. 주술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진 부적과 깃발은 모두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여인이 부적 뭉치와 깃발을 흔들자 검은 바람과 푸른 기린 허상이 동시에 나타나 허공에서 합쳐졌다. 몸집을 불린 기린 허상이 호시탐탐 규 씨 사내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난폭한 성정의 사내라도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정족 여인은 몰라도 홀로 혈령을 처리한 한립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가 일대일로 혈령을 상대했다면 승산이 반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천외마군의 화신이 깃들어 있었다지 않은가.

    “좋습니다. 앞날이 창창하니 다음번에 만날 때까지 모두 몸조심하길 바랍니다.”

    규 씨 사내가 냉랭히 말하고 회색 기운을 일으켜 원뿔 형태의 비차를 불러냈다. 새빨간 표면에 희미하게 귀물 환영이 번득였다. 사내는 비차를 타고 핏빛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승산이 크지 않다는 것을 알고 즉시 내뺀 것이다.

    섬섬은 한결 편해진 얼굴로 기린 허상을 흩어버리고 부적과 깃발을 거둬들였다. 그녀는 웃음을 머금고 한립을 향해 예를 취했다.

    “한 선배님 덕분에 저 추악한 자를 쫓아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놓이는가? 내가 선자를 제압해 추혼술로 천외마갑을 수리할 비술을 알아낼 수도 있을 텐데?”

    한립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저희가 오래 왕래한 사이는 아니지만 수사께서 어떤 분인지는 이미 파악했습니다. 이유 없이 그러실 분은 아니지요. 게다가 제가 수행은 높지 않으나 혼백을 봉쇄할 비술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꽤 됩니다. 혼백이 흩어질망정 정보를 내어드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섬섬은 한립의 냉랭한 말투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 말에 한립은 할 말이 없었다.

    한립은 역천의 보물을 얻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당장 어찌할 수 없었고, 천외마군의 분혼을 잡아먹은 제혼의 상태가 걱정되어 마음이 번잡했다. 당장 돌아가 이 일에 대해 살펴봐야할 것 같았다.

    “이번 성계 마원의 재료는 전부 내 것이네.”

    “그러시지요. 돌아가는 대로 천외마갑을 수리해드리고 따로 작은 선물도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저를 도와주신 은혜로요.”

    섬섬은 얌전히 수긍하며 따로 보상까지 하겠다고 했다. 상대가 눈치 있게 나오자 한립도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전투로 주변 마수들이 낌새를 챘을 것입니다. 바로 이곳을 떠나시지요.”

    섬섬이 바닥의 괴물 잔해를 우울하게 내려다보며 서둘러 제안했다.

    “꽤 소란스러웠을 테지. 바로 움직이세.”

    한립도 주위를 살피고 동의했다. 그들은 하얀 빛줄기와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올랐다.

    * * *

    반나절 후, 그들은 마원이 있던 산맥을 벗어나 둔광을 거두고 월종과 헤어진 산봉우리 위에 나타났다.

    섬섬이 말없이 손에서 은색 빛을 뿜었고, 주변을 수색하던 빛이 그녀의 소매 속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씁쓸한 얼굴로 한립을 돌아보았다.

    “제 예상대로 월 수사께서 화를 입은 것 같습니다. 규 수사나 혈령에게 들켜 죽은 고계 마수의 소행이겠지요. 진작 이럴 줄 알았으면 위험해도 월 수사와 같이 움직일 걸 그랬습니다. 안내자가 없으면 돌아가는 길이 더욱 위험할 텐데요.”

    “월 수사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마기 통로에 데리고 들어갔더라도 살아남았을지 알 수 없는 일이네. 돌아가는 길은 왔던 경로를 따라 그대로 되돌아가지. 어쨌든 와봤던 길이니 낯선 곳을 떠도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네.”

    침음하던 한립이 결정을 내렸다.

    “예, 서둘러 움직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섬섬도 별다른 방법이 없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그들은 다시 둔광을 일으켜 왔던 길을 따라 날아갔다.

    한립은 전혀 몰랐지만 아주 멀리서 수백 마리의 화형 마수들이 그들이 왔던 경로를 따라 미친 듯이 수색을 벌이고 있었다. 마수들을 이끄는 자는 성계 다안마의 또 다른 수하, 검은 뿔의 오읍이었다.

    새까만 갑옷을 걸친 오읍의 얼굴이 어두웠다. 마수는 손에 쥔 핏빛 구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구슬은 이미 깨져 빛을 잃은 상태였다.

    구야의 요청에 성계 다안마는 직접 움직일 수 없어 고계 마수들을 모아 구야가 남긴 위치를 따라 추적할 것을 명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위치를 알려주던 구슬이 깨진 것이다.

    그것은 십중팔구 구야가 죽었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되면 상대를 추적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오읍은 주인의 음산한 얼굴이 떠올라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번 일을 실패하면 구슬이 아니라 주인의 손에 쪼개질지도 몰랐다. 마음이 급해진 오읍은 길게 울부짖으며 추격하는 마수들을 재촉했다. 마기가 섞인 바람이 요동을 치고 마수들의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 * *

    마금산맥 가장자리, 작은 골짜기 위에서 네 명의 수사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회백발의 노인과 궁장 여인 그리고 녹색 머리카락을 지닌 이족인과 날렵한 인상의 마른 사내였다.

    “우리더러 무작정 비키라니 너무 한 것 아닙니까?”

    노인은 뇌운각에서 본 언 씨 성의 현지 수사였다.

    “흥, 이곳을 둘러보는데 그것을 누가 지켜보게 둘 수는 없지.”

    녹발 이족인이 무례하게 대꾸했다.

    “사람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이곳은 분명 우리가 먼저 찾았는데 무조건 떠나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참다못해 궁장 여인 소리쳤다.

    “원래 힘센 놈이 장땡이라는 말도 모르나? 곱게 떠나기 싫으면 우리랑 붙어 보던가.”

    녹발 이족인은 당장이라도 싸움을 벌일 기세였다.

    “너무 성급한 결정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 다들 진법 원반이 골짜기에서 반응을 보여 지선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허나 진법 원반이 아무 곳에서나 반응을 보인 것이 어디 한두 번인지요. 일단 함께 수색하고 진짜 지선을 찾으면 그때 겨루어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언 씨 노인이 차분하게 제안했다.

    노인의 말에도 녹발인은 성큼 나서 무력을 쓰려했다. 그때 곁에 선 사내가 녹발 이족인에게 다가가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를 알려주는 듯했다.

    잠시 고민하던 녹발 이족인이 냉랭히 입을 열었다.

    “일단 골짜기 속에 무엇이 숨어 있는 지나 봅시다. 만약 지선이 아니라면 제 갈 길 가는 것이고, 맞다면…….”

    녹발 이족인이 서늘한 눈초리로 노인과 궁장 여인을 훑고는 날렵한 사내와 빛줄기로 변해 골짜기로 내려가 버렸다.

    “숙부님, 어찌할까요? 저들을 따라 골짜기로 들어가 보실 건가요?”

    “당연히 들어가야지. 진법 원반이 반응을 보였는데 수색하지 않을 도리가 있느냐.”

    언 노인은 머뭇거리지 않고 답했다.

    “하지만 저 둘은 그럼…….”

    “지선이 없다면 저들도 굳이 우리에게 힘을 빼지 않을 것이다. 있다면 우리도 물러날 수 없겠지!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온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가 괜한 말을 했습니다. 골짜기를 수색하러 가겠습니다.”

    “너무 걱정할 것 없다. 내 아직 부상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이보를 준비했으니 지선을 얻을 수만 있다면 달아나는 것은 가능할 것이야.”

    노인은 자신만만해 보였다. 그들은 멀어진 녹발 이족인과 사내를 떠올리며 서둘러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그런데 산골짜기에 들어가자마자 언 노인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평범해 보이던 산골짜기가 마치 심연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고 주위의 검은 기운도 무언가 이상했다.

    그는 이상한 주변 풍경에 반색했다. 산골짜기가 기이하다는 것은 지선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언 노인과 궁장 여인은 각각 진법 원반을 꺼내들고 신호를 확인하며 더 깊이 들어갔다.

    녹발 이족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효율적인 수색을 위해 서로 다른 곳을 찾아보았겠지만 지금 따로 다니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같은 시각, 산골짜기의 깊은 계속 속에서 검은 물체가 눈을 떠 녹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 * *

    골짜기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거대한 두꺼비 마수 거서가 진법 원반을 물고 일곱 마리의 마수와 함께 날아가고 있었다.

    거서 옆에 있던 새빨간 마수가 진법 원반을 들고 무어라 재잘거렸다.

    “대인, 이쪽입니다. 저 골짜기 쪽에서 파동이 느껴집니다. 그곳에 마악(魔鰐)이 살고 있는데 저는 상대가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대인을 청한 것입니다.

    “네가 함부로 침입했다가는 그 악어에게 한입에 잡아 먹혔을 것이다. 마악은 성계 진입이 코앞이라 대인들께서도 함부로 건들지 않으니까. 그런데 확실히 진법 법기가 골짜기를 가리킨 것이 맞더냐? 만약 아니라면 경을 칠 줄 알거라.”

    “안심하셔도 됩니다. 인족의 법기가 확실히 저 산골짜기에 반응을 보였습니다.”

    “알았다. 산골짜기 안에서 지선을 찾는다면 후한 상을 내릴 것이다.”

    거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한마디 해주었다. 지금까지 고계 마수들은 마금산맥을 뒤져 영계인들을 죽이고 진법 원반을 빼앗지만 진법 원반이 착오를 일으켜 지선 코빼기도 찾을 수 없었다.

    거서 일행이 심드렁한 얼굴로 날아가고 있을 때 멀리서 옅은 핏빛 안개가 조용히 그들을 쫓았다. 핏빛 안개 속에는 보일 듯 말 듯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 * *

    한립과 섬섬은 무척 순조롭게 이동해 겨우 닷새 만에 왔던 길의 절반을 되돌아가 인면취를 죽였던 옅은 안개지대까지 도착했다.

    옅은 안개 속에서는 아무리 갈 길이 급해도 속도를 줄이고 주변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의 한립도 계속 영목 신통을 발휘해 주위를 살폈고 두 손에는 영석을 쥐고 영력을 보충했다.

    서둘러 이동하느라 제대로 쉴 시간이 없었지만 며칠간 다량의 최상급 영석을 소모해 법력을 거의 다 보충했다. 물론 범성진마법상의 회복은 갈 길이 멀었지만.

    의식으로 가끔 소매 속 검은 영수환을 살필 때마다 한립은 답답함을 금치 못했다. 갑자기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제혼이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엄청난 회복력으로 법력과 체력은 꽤 돌아왔는데 깨워도 별 반응이 없었다.

    제혼을 강제로 깨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립은 고민 끝에 포기했다. 경험상 영수들이 스스로 깊은 잠에 빠지는 경우는 진화를 하거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강제로 깨웠다가 어떤 해를 끼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립은 제혼에 대한 생각을 접고 의식으로 몸을 살폈다. 단전에서 푸른 원영이 두 손을 합장하고 있었고, 원영 앞에는 은빛 불덩이가 둥실 떠있었다.

    은빛 화염 속에는 하얀 불씨들이 섞여있었고 은색 주술문자들이 반짝였다. 한립은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하얀 불씨는 인면취에게서 얻은 금조진화였다.

    온갖 화염을 흡수해 융합하는 서령천화의 신통은 정말 대단했다. 계속 다른 화염들을 흡수하며 어디까지 위력을 키울 수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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