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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77화 (734/2,000)

977화. 형수(刑獸)

*

잠시 후, 참혹한 비명소리가 들리고 커다란 검은 기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핏빛 쇠사슬은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눈앞에 둔 것처럼 검은 기운을 꽁꽁 묶었고 천둥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검은 기운은 겁에 질려 비명을 질러댔고 십여 가지의 모습으로 형태를 바꾸며 달아나려고 발버둥 쳤다. 그 중에는 흑포 사내와 묵기린의 모습도 있었다.

그러나 핏빛 쇠사슬은 거머리처럼 검은 기운에 딱 달라붙어 절대 달아날 틈을 주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거대 얼굴의 분노에 찬 괴성이 들려왔다. 이 때 제혼이 변한 거대 귀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털이 복슬복슬한 거대한 손으로 자신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가시 하나를 뽑아낸 제혼은 뼈를 쥐고 처음 들어보는 낯선 주술을 읊었다.

그러자 새까만 뼈 가시에 금색 주술문자가 빼곡하게 나타났고 점차 신비로운 금빛 뼈창으로 변했다.

우웅!

뼈창이 진동하고 커지는 동안 금빛이 창끝에 모이며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뼈창 표면의 주술문자가 주변으로 떠오르자 소름끼치는 살기가 느껴졌다.

“금전문(金篆文)!”

“천벌신모(天罰神矛)!”

놀란 목소리가 한립과 검은 그림자에게서 터져 나왔다. 검은 그림자는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그 순간 멀리 핏빛 사슬에 갇혀 있던 검은 기운이 돌연 몸을 수축했다가 펑! 하고 터져버렸다. 뜻밖에도 스스로 폭발한 것이다.

수많은 검은빛으로 변한 검은 기운은 그 여파로 핏빛 사슬을 벗어나 도처로 쏘아져나갔다. 거대 괴물이 자신의 일부를 터트려 기운의 일부라도 달아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핏빛 쇠사슬이 진동하고 흐릿해지더니 수십 개의 핏빛 실로 변해 검은빛을 꿰뚫었다. 검은빛들은 강제로 끌려와 하나로 뭉쳐졌고, 핏빛 실들은 다시 굵은 쇠사슬로 변해 검은 기운을 구속했다.

쉬익!

제혼의 뼈창이 금빛을 휘날리며 날아갔다.

그런데 꿈틀거리던 검은 기운이 낯선 얼굴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거대 얼굴과 달리 두 개의 뿔이 달리고 얼굴이 다섯 가지 색으로 분리된 채 핏빛 화염에 둘러싸여 있었다. 눈알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은빛 덩어리가 빙글빙글 돌고 있어 보기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전의 거대 괴물은 사람의 얼굴과 비슷했다면 지금은 한 번도 보지 못한 마물의 모습이었다.

“상선(上仙) 살려주십시오! 어서 형수를 멈춰 주세요! 제 본체는 천외마군(天外魔君)의 분혼으로 살려만 주시면 상선의 마노(魔奴)로 살겠습니다.”

“천외마군!”

한립은 깜짝 놀랐지만 귀몰로 변한 제혼은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제혼과 이미 의식 연계가 끊겨 있었고 그저 본능에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어찌 제혼을 멈출 수 있단 말인가.

결국 금빛이 절망에 빠진 마물의 얼굴을 꿰뚫고 지나갔다. 마물 얼굴에 손가락 크기의 구멍이 뚫렸고, 그 안에서 금빛이 흘러넘쳤다. 순간 마물의 얼굴은 화석처럼 굳었다.

흐응.

제혼이 두 눈을 번뜩이며 콧김을 뿜었고 노란 기운이 날아가 검은 기운과 마물의 얼굴을 모조리 휘감고 돌아왔다. 마물이 제혼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핏빛 사슬도 허공에서 흩어졌다.

그리고 번득이며 쏘아져나갔던 뼈창은 제혼의 등 뒤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이제 뼈에는 금전문도 사라지고, 제혼도 검은빛이 크게 줄어 어둑해졌다.

풀썩!

거대 괴물을 삼킨 제혼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거대한 몸은 검은빛 속에서 작은 원숭이로 돌아갔다.

한립은 제혼과의 의식 감응이 회복된 것을 느끼고 움찔했다.

그는 서둘러 의식을 이용해 제혼의 몸을 살피고 깜짝 놀랐다. 제혼의 수행과 의식이 고갈되어 있었다. 마치 강적과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싸운 것처럼 말이다.

한립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제혼의 괴이한 변화와 거대 괴물 얼굴이 천외마군의 분혼이라는 사실 등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분명 제혼을 형수(刑獸)라고 불렀는데…….”

마음이 복잡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검은 공간이 요동치더니 조각조각 부서져 그 틈으로 하얀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한립은 재빨리 주위를 살폈지만 진린본원으로 보이는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일단 제혼을 소매 속으로 거둬들이고 몸을 날렸다.

다음 순간 고공에 파문이 일고 푸른 보호막으로 둘러싸인 한립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거대한 괴물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서둘러 주변을 살핀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섬섬이 멀쩡하게 떠올라 수백 개의 하얀 비도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녀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규 씨 사내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한 선배님께서 혈령을 해치우신 것입니까?”

정족 여인이 놀라 물었고, 규 씨 사내도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괴물을 죽인 것이 믿기지 않는 것인가?”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너무 빨리 혈령을 해치우셔서 조금 놀랐을 따름입니다.”

그 때 규 씨 사내가 냉랭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진린본원은 어디 있습니까? 수사께서 챙기신 것인지요.”

“혹시 혈령에 깃들어 있던 존재에 대해 아는 바가 있습니까?”

한립은 규 씨 사내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궁금해 하던 것을 물었다. 뜻밖의 질문에 규 씨 사내와 섬섬이 시선을 마주쳤다.

“한 선배님께서 석연치 않아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석연치 않다기보다는 괴물이 죽기 전에 스스로 천외마군의 분혼이라 칭했네. 이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지 물은 것이고.”

“천외마군!”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번에는 섬섬과 규 씨 청년이 동시에 놀람과 두려움을 표했다.

“천외마군이란 것을 처음 들어보는데 두 분은 잘 아시나 봅니다.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들의 반응에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규 씨 사내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다물자 섬섬이 잠시 머뭇거리다 나섰다.

“천외마두(天外魔頭)에 대해서는 아실 것입니다. 천외마군은 천외마두 중에서도 최상급 존재를 일컫는 것으로 보통 화신(化身)이 수도 없이 많지요. 진령 급 존재도 겁을 치를 때 천외마군이 의식에 침투하면 마화되어 꼭두각시가 되기도 한답니다.”

“진령도 꺼리는 존재란 말인가?”

한립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진령뿐인가요. 듣기로는 진선계의 선인들도 천외마군을 만나면 마화되어 통제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사실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요. 선배님, 정말 혈령에 깃든 자가 자신을 천외마군의 분혼이라 칭한 것입니까?”

섬섬이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섬 선자는 내가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아니요, 워낙 사안이 중대하여 그저 확인을…….”

“나는 수사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섬섬이 무어라 말을 맺기도 전에 규 씨 사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립이 의외의 얼굴을 하자 섬섬이 먼저 고개를 돌려 물었다.

“흥, 모르는 척은. 천지 생령인 혈령에 평범한 존재가 깃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최소한 너와 나는 불가능하지 않더냐.”

규 씨 사내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섬섬을 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상대가 진령의 혈과 진린본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이상합니다.”

섬섬이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추측이지만 이계로 떨어진 천외마군의 화신이 우연히 우리와 비슷한 존재를 잡아먹고 이곳에 대해 알아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우연히 이곳에서 혈령을 마주치고 곧바로 혈령에 깃든 것일 수도 있겠지.”

“확인해 보면 알 일입니다. 기억대로라면 천외마군이 깃들었던 생령은 죽고 나면 마진(魔塵)으로 변한다더군요. 혈령이 특수한 생령이기는 하나 이 점은 다르지 않겠죠.”

섬섬이 말을 하며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그 말에 괴물이 허물어진 자리를 본 한립이 화들짝 놀랐다. 회백색 돌덩이로 변했던 괴물 얼굴의 잔해가 어느새 대량의 검은 먼지로 변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한참을 쳐다보고서야 검은 먼지가 괴물과 비슷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정족 여인이 작게 탄식했고 규 씨 사내는 손을 뻗어 검은 먼지를 한 움큼을 불러들였다.

“확실히 마화된 먼지군.”

규 씨 사내는 먼지를 털며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한 선배님의 말씀대로 혈령은 천외마군의 화신에 조종을 받고 있었습니다. 상대의 덫에 걸린 저희를 구해주셨으니 감사드립니다.”

섬섬이 웃으며 한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니네, 나도 운이 좋아 마물을 잡은 것뿐이니까. 신통이 괴이하여 상대하기 쉽지 않더군.”

한립은 불사신의 위력을 내뿜던 흑포 사내들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혈령이 실체를 지니지 않은 생령이라 본 위력을 내진 못했을 겁니다. 영계 진선에 맞먹는다는 천외마군인데, 그 화신에 부림을 받는 존재도 원래는 위력이 대단할 테니까요. 허나 앞으로 한 수사께서는 비승하기가 더 어려워지겠습니다. 화신이 당했으니 마물이 직접 나타나 훼방을 놓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규 씨 사내가 차갑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비승이라? 그렇게 먼 훗날의 일을 지금부터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한립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낮게 미소 짓고 말았다.

“그럼 저와 섬 수사가 마물의 정체를 밝혀 드렸으니 이제 진린본원의 이야기로 넘어 가시지요?”

“저는 진린본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합니다. 혈령 체내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요.”

이번에는 한립도 말을 돌리지 않고 흔쾌히 대답해주었다. 그 말에 규 씨 사내의 얼굴이 굳어졌고 섬섬도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의심을 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규 수사께서는 어찌 보십니까?”

정족 여인이 빙긋 웃으며 규 씨 사내를 향해 물었다.

“한 수사 몸에서 진린본원의 파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본래 같은 곳에서 출발했으니 아무리 숨겨도 감응을 피할 수 없겠지. 하지만 분명 혈령과 싸울 때는 그 안에서 본원의 존재가 느껴졌거늘!”

“그렇다면 규 형께서도 저와 같은 결론을 내리셨군요.”

섬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래, 한 수사에게 진린본원은 없다. 혈령이 죽으면서 흩어져버렸거나 아니면 다시 진령의 혈속으로 돌아갔겠지. 그렇다면 다음 혈령이 탄생하기를 기다려야 진린본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전자라면 다시는 기회가 없겠고 후자라 해도 수백 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정족 여인이 씁쓸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둘 중 어느 것이 맞는지 알아낼 방법은 있는지요.”

한립이 팔짱을 낀 채로 관심을 드러냈다.

“없습니다. 흩어져 버렸다면 흔적을 쫓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고, 진령의 혈속에 있다 해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섬섬이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 말에 한립은 조금 실망했다. 약간만 얻어도 합체기에 오를 수 있다면 수백 년을 기다려서라도 다시 노려볼 만 했던 것이다.

여인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그는 명청령안을 발동하고 의식을 퍼트려 인근을 샅샅이 수색했다. 그러나 아무런 실마리도 찾지 못했다.

한립의 이런 행동에 섬섬과 규 씨 사내는 더욱 그의 말을 믿게 되었다. 그들은 묵묵히 이 일에 대해 고심했다.

오래 공들인 일이 실패하자 섬섬은 낙담했고, 규 씨 사내도 곁으로는 무덤덤 했지만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하하, 이번에는 정말 헛고생을 한 셈입니다. 은교의 몸에 깃들어 수백 년 기다리는 것이 별 것 아니란 점이 다행이지요.”

“은교의 몸이야 수백 년 허송세월을 해도 성계에 진입할 가능성이 있지만 저는 아닙니다. 수백 년 후에 진린본원을 얻는다 해도 충분히 연화할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겠지요.”

“그럴 바에야 아예 나와 하나가 되어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어떻겠느냐?”

섬섬의 말에 규 씨 사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의식 융합도 가능합니다. 제가 주의식이 될 수 있다면!”

섬섬이 눈썹을 끌어올리며 단호히 답했다.

“흥, 어디서 헛소리를!”

규 씨 사내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전신에서 피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했다.

“규 수사께서는 저와 한 선배님을 이길 수 있다고 보십니까?”

가슴이 철렁했지만 섬섬은 내색하지 않고 호기롭게 외쳤다.

“한 수사, 이 일에서 빠지시면 내 나중에 후하게 답례하겠습니다.”

규 씨 사내가 얼른 한립을 향해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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