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975화 (732/2,000)

975화. 진린본원(眞麟本源)

*

거대한 산 밖.

무형의 힘에 산이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흙과 암석들 틈에서 꾸역꾸역 검은 기운들이 흘러나왔다.

열댓 줄기의 검은 뇌전들은 암석에서 빠져나와 번뜩였다. 멀리서 보면 열댓 개의 굵은 촉수가 산봉우리 주변을 채찍질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때 붕괴된 산봉우리 속에서 무언가 울부짖는 소리가 주변에 울려퍼졌다.

쿠앙!

무너진 암석 더미에서 거대한 물체가 나타나 산봉우리 잔해를 완전히 깔아뭉갰다. 검은빛으로 이뤄진 괴물의 표면에는 무수히 많은 뇌전이 흘렀는데 열댓 가닥의 촉수들은 괴물의 일부에 불과했다.

검은빛 중심에서 거대 얼굴이 두 눈을 부릅뜨고 음산한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크아앙!

돌연 용울음 소리가 들리고 거대 괴물의 몸을 핏빛 교룡이 뚫고 나왔다. 핏빛 속에서 교룡은 가시 돋친 은색 갑옷을 입은 사내로 변했다.

바로 마금산맥 바깥에서 보았단 규 씨 사내였다. 시종일관 잔인하고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던 그는 창백한 얼굴로 분노하고 있었다.

쾅!

그 때 거대 괴물의 몸에서 폭음이 울리고 푸른 돌풍이 불어나와 커다란 기린 허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 얼굴은 고함을 지르며 검은 뇌전을 칼처럼 휘둘러 기린 허상을 공격했다.

그러나 거대 기린 허상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잠시 후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신형이 줄어든 기린 허상은 미간에 반짝이는 수정들이 박혀 있었고 분노와 놀람으로 눈빛이 흔들렸다.

“대체 누구시기에 혈령을 장악해 이런 짓을 벌이는 것입니까?”

푸른 기린으로 변한 섬섬이 버럭 화를 냈다. 진령의 혈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규 씨 사내가 들이닥쳤고, 잠들어 있어야할 혈령이 기습해 함께 뱃속에 삼켜졌다.

미리 준비한 비술을 펼쳐 기린 허상에 깃들지 않았다면 혈령에게 그대로 잡아 먹혔을 것이다.

“난 당신에게는 관심이 없소. 그저 진령의 혈에 있던 진린본원이 어디 있는지 궁금할 뿐.”

규 씨 사내가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흐흐, 내가 누구냐고? 이곳에 진령의 혈이 있다는 것을 알만한 자가 누가 있더냐.”

거대 얼굴은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정체를 얼버무렸다. 듣는 이의 모골이 송연해지게 만드는 기이한 목소리였다. 게다가 규 씨 사내와 푸른 기린이 탈출하며 뚫어놓은 구멍이 검은 빛과 함께 원상태로 회복되었다.

“그럼 당신도 역시…… 우리 말고는 이곳에 진령의 혈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를 텐데.”

“흥, 우리? 난 정족의 몸에 빌붙어 사는 너와는 다르다. 나는 은교(銀蛟)의 몸을 완전히 차지했지.”

기린 허상의 말에 규 씨 사내가 눈을 부릅뜨며 조소했다. 이에 기린 허상의 눈빛이 사나워지며 담담히 대꾸했다.

“그건 네가 운이 좋아서일 뿐. 어차피 우리는 본체 의식의 십만 분의 일에 불과하다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 원주인과 공존하는 나나 교룡에 기생하는 너나 별다른 차이를 모르겠는데? 이 정족 여인이 수련해 비승할 수 있다면 나 역시 진령의 몸을 되찾을 수 있을 테지.”

“그 몸으로 비승을 한다? 겨우 정족인이 가당키나 한 소리냔 말이다.”

“불가능할 건 뭐지? 진린본원만 있으면 아무리 재능이 떨어지는 자라도 진선계로 비승할 가능성이 있는데.”

규 씨 사내가 비웃든 말든 푸른 기린은 차분히 말했다.

“진린본원을 겨우 정족인이 복용한다면 그건 엄청난 낭비일 것이다. 은교의 몸을 지닌 내가 복용한다면 만 년이면 확실히 환골탈태하여 진룡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네게 진린본원을 양보하기라도 하란 말인가? 우리가 같은 존재에서 출발했다고 하나 세월이 흘러 서로 독립적인 자아를 지닌 남이 되었다. 게다가 내가 양보하겠다고 해도 저 자가 양보를 할까?”

푸른 기린이 눈짓으로 가리켰다.

“네가 어떻게 혈령의 몸에 깃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진린본원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규 씨 사내는 기린이 도발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으나 거대 괴물을 향해 서늘하게 말했다.

“진린본원은 원하면 주겠다. 내 뱃속으로 들어와 얌전히 한 몸이 되면 그게 그거 아니겠느냐.”

거대 괴물이 키득거렸다.

“벌써 집어 삼켰단 말인가……? 아니야, 진린본원은 실체를 지닌 존재만 흡수할 수 있는데 어찌 혈령 따위가!”

규 씨 사내는 조금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너희가 처음인 줄 아느냐?”

“그게 무슨 뜻이지?”

침묵하던 거대 괴물이 차갑게 반문하자 푸른 기린이 흠칫 놀라 물었다.

“너희 같은 것들을 이미 서넛은 잡아먹었다는 말이지. 너희까지 잡아먹으면 충분한 진령의 피를 확보하게 되니 진령의 몸을 갖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터!”

거대 괴물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지 검은빛을 반짝이며 검은 뇌전 두 줄기를 쏘아 보냈다. 각각이 거대한 창으로 변해 기린 허상과 규 씨 사내를 뚫을 기세로 달려들었다.

괴물의 말에 규 씨 사내는 얼굴이 일그러지며 흐릿하게 변해 세 명으로 몸을 불렸다. 그 중 한 명이 은색 비검을 휘둘러 검으로 검은 뇌전 창을 갈랐다.

그리고 푸른 기린 허상은 갑자기 머리가 몇 배로 커져 검은 뇌전 창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그 때 규 씨 사내의 화신 중 하나가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소리쳤다.

“대탄멸술(大呑滅術)! 그 정도면 나와 힘을 합쳐 싸울 자격이 되겠구나. 같이 저 괴물을 죽이고 진린본원을 나누기로 하자. 진령의 본원이 겨우 저런 자에게 집어 삼켜졌다니 벌써 연화됐을 리 없다.”

“좋다. 그러기로 하지.”

푸른 기린도 잠시 생각하다 과감히 응했다. 규 씨 사내를 믿을 수는 없지만 일단 눈앞의 강적을 먼저 해치우는 것이 먼저였다. 푸른 기린이 빛을 반짝이고 몸을 부풀려 엄청난 기운을 발산했다.

규 씨 사내의 세 화신은 하나는 머리에서 은빛을 번뜩이며 거대한 검기를 불러냈고, 다른 하나는 두 손을 교차해 새빨간 불꽃으로 주위를 감쌌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빙글 돌아 은색 교룡으로 변했다.

그 순간 거대 괴물이 괴상한 웃음을 터트렸다.

“나와 대적을 해보겠다? 좋다, 그럼 본때를 보여주지. 하지만 그 전에 다른 불청객을 처리해야겠다.”

콰릉!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가장 굵은 열댓 개의 검은 뇌전이 거침없이 허공을 갈랐다. 아무 것도 없던 허공에서 은빛이 반짝이고 호리호리한 인영 이 나타나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열댓 개의 뇌전들은 하나로 뭉쳐져 엄청난 속도로 은색 빛줄기를 덮쳤다. 둔광 속 인영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그는 줄곧 한립을 추적하다 인근에 은신술을 펼쳐 숨어 있던 고계 화영 마수 ’구야’였다.

연허 중기의 수행을 지닌 그녀는 검은 거검에 맞고 즉사하고 말았다. 그 엄청난 위력에 규 씨 사내와 거대 기린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그런데 거검이 방향을 틀어 그들을 공격하지 않고 아무 것도 없는 땅바닥을 갈랐다.

규 씨 사내와 푸른 기린은 영문도 모른 채 유심히 지켜보았다.

콰앙!

거검이 흉맹하게 떨어져 대지를 가르자 땅 속에서 맑은 울음소리가 들리고 72자루의 푸른 검들이 솟구쳐 올랐다. 수십 자루의 검들은 한데 뭉쳐서 푸른 거검으로 변해 눈부신 금빛 뇌전을 번뜩이며 검은 거검을 공격했다.

콰콰쾅!

금색과 검은색 뇌전이 교차하며 교전했다. 검은 거검이 훨씬 컸지만 푸른 거검의 날카로움과 금빛 뇌전의 위력도 만만치 않았다.

거대 괴물이 냉소하며 검은 기운을 일으켰다. 그 순간, 땅 속에서 푸른 빛줄기가 날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검은 거검이 밝게 빛나며 그림자처럼 똑같이 생긴 검빛을 만들어 푸른 빛줄기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챙!

푸른 빛이 가시고 괴이한 수정 보호막이 나타나 검은 검을 흘려보냈다. 보호막 안에는 웬 청년이 뒷짐을 지고 서있었다. 바로 붕괴된 산 속에 깔려있던 한립이었다.

그는 거대 괴물과 규 씨 사내 그리고 푸른 기린 허상을 훑고 말없이 어딘가를 향해 손짓했다.

웽!

머지않은 곳에서 주먹만 한 금색 꽃잎이 솟구쳐 그를 향해 날아왔다.

한립이 섬섬을 추적하라 붙여 놓은 서금충이었다. 서금충은 그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고 영충에 깃들어 있던 의식은 그의 원신으로 돌아왔다.

‘이런…….’

서금충의 기억을 모두 흡수하자 그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거대 괴물은 한립이 가뿐히 자신의 일격을 막자 경계심을 드러내며 공격을 멈추었다.

“마원의 기운이 사라졌는데 네가 죽인 것이냐?”

거대 괴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 그것을 벌써 아시고 감응 능력이 뛰어나십니다. 제가 여기 있으니 마원은 이미 죽었다고 봐야겠지요.”

“흥, 일부러 마원을 유인해 이곳에서 요상하게 했건만 남 좋은 일만 시켰구나. 진령의 몸을 갖게 되면 보양하려 했더니! 멍청한 마원 놈은 이곳이 애초부터 정순한 마기로 가득 차 있는 줄 알았겠지.”

“그랬군요! 어쩐지 부상당한 마원이 이렇게 많은 마기를 모아둘 여력이 없었을 텐데 이상하다 했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집니다. 혹시 천지의 영(靈)의 일종이십니까?”

“천지의 영이라뇨! 그저 진령의 기운에 힘입어 탄생한 잡다한 괴물입니다. 본래 지능이 낮은 영체가 외부에서 유입된 힘에 통제를 당하고 있지요. 교활한 자이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푸른 기린이 끼어들었다.

“……섬 선자인가?”

한립은 기린에게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썹을 끌어올렸다.

“예, 접니다. 두 의식이 잠시 힙을 합쳐 기린 법상을 조종하고는 있지만 주의식은 제가 맞습니다.”

푸른 기린이 작게 탄식하며 솔직히 말했다.

“그 말은 섬 선자가 나를 이곳으로 불러낸 진짜 목적은 진린본원 때문이었군. 성계 마핵으로 천외마갑을 수리할 수 있다는 말은 거짓이었고.”

한립이 감정 없는 눈빛으로 푸른 기린을 응시했다.

“아닙니다. 천외마갑을 수리하는데 성계 마핵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진린본원 때문에 선배님을 이용한 것은 맞지만, 피해를 입힐 생각은 없었습니다. 성계 마수가 부상을 당해 이곳에서 상처를 회복하고 있다는 정보도 모수 사실이지 않았습니까.”

섬섬은 갑자기 가련한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했다.

“수사의 말대로 내가 손해 볼 것은 없지. 그런데 선자의 계획에 변수가 많은 것 같네만.”

한립은 규 씨 사내의 화신들과 아래쪽 거대 괴물을 훑으며 말했다.

“저도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허나 눈앞의 혈령만 제가하면 진린본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린본원이란 진령 기린이 탄생할 때 남겨진 본원의 힘의 일부입니다. 그것을 복용하면 환골탈태는 물론 엄청난 효과를 볼 수 있는데, 한 선배님이시라면 약간만 복용하셔도 합체기에 이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인은 과감히 말했다. 어차피 진린본원을 독차지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이곳에서 가장 약한 그녀는 한립을 끌어들이는 것이 이득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진린본원을 또 나누자고? 내 몫은 절대 나눌 수 없으니 그렇게 하려거든 네 몫에서 절반을 내줘야 할 것이다.”

규 씨 사내가 변한 은교가 냉랭히 소리쳤다

“안 그래도 그럴 것입니다. 한 선배님, 저와 다시 한 번 거래를 하시지요. 저를 도와 혈령을 죽여주시면 제 몫의 진린본원 일부를 내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진린본원을 연화하는 특수한 비법도 알려드리고요. 수사께서는 진령 기린의 의식을 지니지 않으셨기에 양이 많으면 오히려 독이 될 것입니다.”

기린 허상 속에서 섬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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