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3화. 다시 나타난 현천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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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원의 원신은 얼굴이 피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챙강.
아래에서 여섯 개의 금빛 거대 주먹과 금빛 도검이 반으로 갈라졌고 쏟아지던 푸른 화살들도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마원의 육신만이 서있었다.
그의 육신은 창백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이곳저곳 갈라지고 검게 타들어가 있었다. 심지어 열댓 군데는 손가락만한 구멍이 뚫려 피로 얼룩졌다.
육신이 부상당하자 마원은 어쩔 수 없이 마공을 펼쳐 원신을 분리한 것이다. 이에 한립은 난색을 표했다. 연달아 쏘아 보낸 강력한 공격으로 마수를 죽일 줄 알았는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으하하! 수백 년 간 요양한 육신을 네 놈이 전부 망쳐놓았구나! 이제 육신이고 뭐고 네 놈을 잡아 이 원통함을 풀어버리겠다. 네 놈을 죽여 내 화신으로 만들면 그만이겠지!”
마원은 처참한 몰골의 육신을 보고 분노했다. 마원은 곧장 들고 있던 칼날 조각을 휘둘렀다. 그러자 핏빛이 튀어나왔고 핏빛은 검진이 아니라 그의 육신으로 달려들었다.
푸쉽.
마원의 보라색 갑옷은 핏빛을 그대로 통과시켰고 핏빛을 흡수한 육신은 빠른 속도로 말라가기 시작했다. 핏빛이 번득이며 다시 허공으로 떠올랐을 때 육신은 이미 어두운 보랏빛의 목내이(木乃伊)가 되어 있었다.
핏빛을 회수한 칼날 조각은 새빨갛게 변해 피비린내를 풍기며 검은 기운을 뿜어냈다. 마원은 칼날 조각을 허공에 던져 수결을 맺은 채 주술을 읊기 시작했다.
그러자 난해한 고어(古語)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한립은 마원이 무엇을 하려는지 몰랐지만 육신의 정혈을 몽땅 뽑아 펼치는 술법이라면 분명 강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한립은 수결을 맺어 검진을 움직였다.
빛의 장막이 진동하며 수백 송이의 연꽃들이 떠올랐다. 연꽃들은 빙글빙글 돌며 마원을 향해 푸른 빛기둥을 내뿜었다. 그러나 곧 한립의 안색이 굳어졌다.
마원이 사방에서 몰려드는 빛기둥을 힐끗 보고는 새빨간 칼날 조각을 튕기자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며 무형의 파동이 퍼져나간 것이다. 그러자 수백 개의 빛기둥이 모두 말라비틀어진 고목처럼 빛을 잃었다.
그 순간 마원의 원신 주위로 보라색 기운이 모여들어 보라색 허상이 떠올랐다. 마원과 비슷하게 생긴 보라색 거대 원숭이는 오색 빛으로 빛났다. 그리고 가슴에는 은색으로 산(山)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산악거원!’
한립은 진령 산악거원을 본 일은 없었지만 허상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가슴에 저런 기괴한 문양이 있는 것은 산악거원 뿐이었다.
검진 속에 나타난 보라색 허상을 본 한립은 눈을 반짝였다. 산악거원은 경칩12결로 변할 수 있는 진령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진령의 피를 얻을 수 있다면 새로운 변신술을 익히고 다른 변신술의 위력도 크게 높일 수 있다.’
한립은 그 순간 성계 마원을 반드시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소매를 털어 서금충이 든 영수환을 불러냈다. 비장의 한 수를 써서라도 원신을 죽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서금충을 부리면 의식 소모가 크겠지만 단시간에 승부를 보려면 이만한 것이 없었다. 연허기에 이른 후 의식의 힘도 크게 늘어났기 때문에 백 마리 정도는 부릴 만했다.
만일 춘려검진의 보조가 없었다면 무턱대고 시행하지 못했겠지만 마수가 검진에 갇혔으니 서금충이 나서기에 최적의 장소다. 유일하게 걸리는 것은 의식이 크게 줄어든 상태로 산맥을 빠져나가다 강적을 만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일단 눈앞의 강적을 없애는 것이 최우선이고 나중 일은 상황을 보아 판단하면 된다. 그가 막 영수환을 발동하려는데 검진 속 산악거원의 허상이 낮게 으르렁 거렸다.
그리고 허상의 입에서 핏빛 안개가 흘러나와 새빨간 칼날 조각으로 스며들었다.
칼날 조각이 빙글빙글 돌며 진득한 마기를 분출했고 검은빛들은 그 주위로 불나방 떼처럼 몰려들었다.
‘이건…….’
한립은 주변의 천기원기의 흐름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주위를 살폈다. 통로를 꽉 채우고 있던 마기들이 살아 움직이듯 스스로 꿈틀거리며 검진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춘려검진이 소용돌이로 변해 주변의 마기를 모조리 끌어당기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 마기들은 검진의 푸른빛의 장막에 막혀 검은 구슬들로 변해 주변을 떠다닐 뿐이었다.
“진마기(眞魔氣)!”
검은 기운의 정체를 알아본 한립은 인상을 찡그렸다.
콰릉!
그 순간 검진 속에서 굉음이 울리고 통로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무시무시한 영기의 압력이 터져 나와 푸른빛의 장막이 불안하게 깜빡였다.
한립은 얼른 시선을 검진 중앙으로 돌렸다. 그러자 검진 전체에 크고 작은 주술문자들이 가득 차올랐고, 새까만 빛의 주술문자들 중심에 핏빛 칼날 조각이 떠있었다.
그리고 어느 틈엔가 부리진 칼끝이 회복되어 있었고, 핏빛 칼날에 정체모를 금색 고대문자가 반짝였다. 두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은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검진을 가득 채운 검은 부적들이 깜빡일 때마다 칼날 조각도 같이 깜빡였다. 마치 검의 통제를 받는 듯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마원은 괴상한 웃음을 흘리며 수결을 맺었고 거대 원숭이 허상은 긴 팔을 뻗어 핏빛 칼날 조각을 불러들였다.
웅!
그러자 칼날 조각의 금빛 고대문자가 살아서 꿈틀거렸고 울음소리를 내며 빛을 방출했다. 한립이 검진 속 천지원기가 혼란스러워진 것을 감지했을 때는 이미 검은 부적들이 칼날 조각으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부적들을 빨아들인 새빨간 칼날 조각은 점점더 새카맣게 변해갔다. 수많은 부적들이 사라지고 맑은 울음소리를 내며 반짝이던 검은 기운도 사라졌다.
칼날 조각 표면의 금빛 고대 문자들이 더욱 신비롭게 보였다. 남색빛을 일렁이며 동공을 수축한 한립은 갑자기 한쪽 팔뚝을 잡고 새까만 칼날을 노려보았다.
“현천의 보물! 그럴 리가…… 역천의 천지법칙을 지닌 보물을 가진 마수가 어째서 중상을 입고 이곳에!”
한립은 얼굴에 핏기가 가신 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네가 어찌 현천의 보물을 아느냐?”
그의 말에 마원이 크게 놀라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한립은 지금 마원의 물음에 답할 여력이 없었다. 팔뚝이 불로 지진 것처럼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바로 현천의 검이 봉인된 팔뚝이!
산악거원 법상이 칼날 조각을 들고 휘두른 순간 뜬금없이 이런 증상이 나타났다. 새까만 칼날에 자극받기라도 한 것처럼 현천의 검이 요동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문뜩 생각난 것을 말해본 것뿐인데 마원이 부인하지 않은 것이다.
‘정말 현천의 보물이란 말인가!’
팔뚝의 현천의 검을 억누르느라 안간힘을 써야 하는 것도 그렇지만 상대가 현천의 보물을 부린다면 서금충으로도 승산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현천의 검을 쓰자니 지난번 현천의 보물을 발동한 대가가 떠올라 치가 떨려왔다. 마수들이 우글거리는 이곳에서 법력과 의식이 바닥난다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난번 현천의 검이 발휘한 위력을 생각하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만약 칼날 조각의 위력이 그것의 절반만 되어도 그가 막을 방법은 없을 것이고 춘려검진 또한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마원은 그의 물음에도 한립이 답이 없자 분노하며 머리 위 법상을 움직였다. 산악거원의 허상은 한립을 향해 칼날 조각을 조준했다.
그 모습에 한립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공간을 갈라버리는 현천의 보물의 위력을 생각하면 여기서 달아난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었다.
‘잠깐! 상대는 육신을 잃고 수행이 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이다. 그런데 현천의 보물을 부린다고? 그것도 본체가 아니라 진령 법상으로…….’
위기의 순간 한립의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그 때 보라색 거대 원숭이 법상이 검은 칼날을 천천히 휘둘렀다. 이에 한립이 이를 악물고 팔뚝을 쥐고 있던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노란 나무방망이가 나타나 손에 들렸다. 바로 현천과실이었다. 금빛이 반짝이고 한립의 머리 위에 다시 떠오른 범성진마법상이 팔 하나를 움직여 현천과실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방망이를 들지 않은 나머지 팔들이 수결을 맺었고 삼두육비의 거대한 법상이 온몸에서 금빛을 방출했다. 금빛이 물처럼 현천과실로 흘러들어가고 과실 표면의 어두운 녹색 문양이 더욱 짙어졌다.
그것을 본 한립은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
슉-
그 때 검진에서 괴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거무튀튀한 파동이 새까만 칼날 조각을 빠져나와 거대한 파도로 변해 한립을 향해 밀려 들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은 파도가 푸른빛의 장막을 덮쳤다.
웅!
빛의 장막이 진동하여 푸른 연꽃들을 방출했지만 검은 파도 앞에서는 전부 박살나 흩어졌다.
푸른빛의 장막이 얇은 종잇장처럼 뚫리자 한립은 다급히 법결을 날렸다. 그러자 주변에 무수히 많은 오색빛의 점들이 구름 떼같이 몰려들더니 나무방망이 끝이 비취색으로 빛나고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울처럼 매끄러운 칼날에 다섯 개의 비취색 주술문자가 서늘한 빛을 발산했다.
금색 법상은 검은 파도를 향해 비취색 장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한립의 몸에서 대량의 법력이 빠져나가자 법상의 표면에 흐르는 금빛이 더욱 강해졌고 금빛 기류는 모두 검으로 흘러들어갔다.
범성진마법상의 체구가 절반으로 줄어들며 또렷하던 모습도 점점 흐릿해졌다. 그리고 주변의 천지원기들이 극심하게 요동치며 셀 수 없이 많은 오색 주술문자들이 떠오르자 천둥소리가 몰아쳤다.
이에 달려들던 검은 기운이 강한 힘에 밀려 주춤했다.
금색 법상이 든 현천의 검은 주변의 천지원기를 모두 끌어 모은 듯 엄청난 울림과 눈부신 빛을 방출했다. 검은 마기로는 절대 가릴 수 없는 강력한 빛이었다.
새까만 파도와 검빛으로 인해 통로 속이 두 개의 세계로 분리된 것 같았다. 위쪽은 오색 주술문자가 꿈틀거렸고, 아래쪽 검은 파도가 출렁이며 새까만 빛이 번뜩였다.
두 빛이 충돌하자 연달아 폭발이 일어났고, 무형의 파동이 통로를 폭풍처럼 휩쓸었다.
쿠콰콰콰쾅!
한립과 마원이 있는 공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부서져 먼지로 변한 것이다. 춘려검진도 엄청난 힘에 몇 번 깜빡거리다 허물어졌고, 72자루의 비검들도 파동을 이기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비취색 검빛이 품은 천지법칙의 힘이 검은 파도보다 강한 것은 확실했다. 간신히 버티고는 있었지만 비취색 빛 속에서 검은 기운이 점점 와해되고 있었다.
마원의 원신 위에 떠있던 산악거원 법상은 안그래도 칼날 조각을 휘둘러 체구가 절반으로 줄어 있었는데 비취색 검빛의 막강한 힘에 힘없이 사라져 버렸다.
게다가 허상이 들고 있던 칼날 조각마저 금이 갔다.
“현천의 보물! 온전한 현천의 보물이 나타나다니!”
마원의 원신을 둘러싼 핏빛이 부들부들 떨리며 그의 심경을 대변해 주었다.
비취색 기운에 혼비백산한 원신은 핏빛을 일으켜 대청 쪽으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비취색 검이 번득이고 천지법칙의 힘이 마원의 원신을 가두었다.
다음 순간, 마원의 원신 주변 공간이 쨍강거리며 깨져나갔다. 깨진 거울처럼 하얀 균열이 생긴 공간 안에서 마원 원신의 비명소리가 울리고 목각 인형처럼 갈라졌다.
놀랍게도 기세등등하던 성계 마원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공간이 깨진 자리에는 새까만 구멍이 형성되었고, 마원 원신의 잔해가 인근의 공간 파편과 함께 소리 없이 검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팟-!
구멍은 검은 빛을 번득이며 기이하게 사라졌고, 원형을 회복한 보라색 칼날 조각은 허공에 가만히 떠있었다. 한립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재빨리 수결을 맺어 법상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법성진마법상이 현천의 검을 가볍게 흔들었고 검은 다시 뭉툭한 현천과실로 변해 서서히 아래로 내려왔다.
한립이 푸른 기운을 쏘아 보내 회수하려 했지만 현천과실은 녹색 빛줄기로 변해 그의 팔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순간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며 팔뚝에 노란 표식이 새겨졌다.
한립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현천과실이 그의 팔에 아예 자리를 잡았는지 알아서 스스로 봉인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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