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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69화 (726/2,000)
  • 969화. 속셈

    *

    마지막 분신은 두 눈을 번득이고 은색 교룡으로 변해 순식간에 월종 위에서 나타나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렀다.

    그러나 월종도 가만히 당하고 있을 자가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쾅! 하는 폭음이 들리고 백골 비검 두 자루가 떠올랐다. 뇌전의 빛을 반짝이는 백골 비검들이 교차해 교룡의 두 발톱을 공격했다.

    챙!

    백골 비검들은 발톱을 막다가 결국 괴력을 이기지 못하고 두 동강이 나버렸다. 그 틈에 월종은 정혈을 뱉어 특수한 둔술을 발동해 달아나려 했으나 은빛 교룡의 핏빛이 쏟아지며 갇히고 말했다.

    잠시 후 월종의 처절한 비명이 들리다가 곧 사그라졌다. 원신조차 달아나지 못하고 은색 교룡의 뱃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나머지 두 분신들이 날아올라 교룡과 합쳐져 규 씨 사내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들이 여기에 나타나다니. 설마 그걸 노리는 것인가? 그걸 아는 자가 있을 리 없는데. 설마……. 어찌 되었든 본 존만이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 누구든 앞을 막아선다면 전부 먹어치워 버리겠어.”

    사내의 눈빛이 흉악하게 번득이다 갑자기 고개를 틀어 매섭게 소리쳤다.

    “거기 누구냐? 당장 나오거라.”

    사내는 텅 빈 허공을 바라보다 눈살을 찌푸리며 은색 비도를 날렸다.

    비도는 아무렇지 않게 허공을 스쳐 지나갔다.

    “……?”

    규 씨 사내는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콧방귀를 뀌고 비도를 회수했다. 그리고 핏빛을 일으키고 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그가 떠나자 그곳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적막해졌다.

    한식경이 지나 고공에 희미하게 은빛이 반짝이고 누군가 나타났다. 귀가 뾰족하고 고운 얼굴을 지닌 ‘구야’라는 인형(人形) 마수였다.

    그녀는 규 씨 사내가 사리진 방향을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

    “저건 누구지? 소주를 살해한 자는 아니지만 실력이 대단한데. 미리 비술을 사용해 기운을 숨겨두지 않았다면 속이지 못했을 거야. 하아, 이번에 들어온 외부인들은 녹록하지가 않구나! 아무래도 지원을 요청해야겠어.”

    구야가 자신의 꼬리에서 털을 뽑아 중얼거리고는 허공에 뿌렸다. 그러자 털들이 가느다란 은빛으로 변해 날아갔다.

    은빛이 저 멀리 사라지자 여인은 한립과 규 씨 사내가 사라진 산맥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 * *

    한립은 마연조를 따라 짙은 마기 속을 걸어갔다. 작은 새가 자꾸 지저귀며 그를 재촉했지만 한립은 신경 쓰지 않고 유유히 움직였다. 마연조는 어쩔 수 없이 속도를 맞춰 그와 같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곳은 손을 펼쳐도 손가락이 안 보일 정도로 마기가 짙었지만 다행히 한립의 몸에서 금빛이 반짝이고, 명청령안을 발동한 덕에 주변 상황을 또렷하게 살필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네모난 통로를 걷고 있었다. 통로는 그가 처음 보는 검은 암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마기의 근원이 바로 이 괴이한 검은 암석들이었다.

    한립은 검은 암석에 호기심을 느꼈다. 혹시 모를 강력한 금제를 우려하지 않았다면 진작 검은 암석을 살펴보았을 것이다.

    산속 통로는 복잡하게 얽혀 미궁 같았다.

    마연조가 탐색을 다녀오는 데는 한식경 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한립은 끝없이 걷고 있었다. 작은 새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마연조도 그의 눈빛을 느꼈는지 몇 번 더 모퉁이를 돌아 한자리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이에 한립은 표정을 풀고 마연조를 향해 손짓했다. 마연조는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왔다.

    섬섬의 의식 일부가 깃든 작은 새는 무척 영특했다. 마연조가 한립의 머리 위로 다가와 선회하자 갑자기 그의 소매에서 회색 기운이 날아갔다.

    화들짝 놀란 새가 입을 벌려 무어라 지저귀려 했지만 원자신광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한립은 꼼짝 못하고 있는 마연조에게 부적 하나를 날려 보냈다.

    그러자 작은 새의 몸에 푸른 기운이 흐르며 회색 기운 속으로 사라졌다. 한립은 입 꼬리를 끌어올리고 전방으로 시선을 돌려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입을 벌려 은색 화염을 분출하자 은색 불새로 변해 그의 주위를 날아다니다 한쪽 벽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한립의 소매 속에서 72자루의 비검들이 날아올랐다.

    또 그가 주술을 외자 비검들이 빙글빙글 돌며 푸른 연꽃으로 변해 주변을 꽉 채우고는 어느 순간 거품처럼 흩어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한립은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은색 부적 두 장을 꺼내 던졌다.

    금빛 그림자로 변해 바닥으로 스며든 것은 갑원부였다. 합체급 마수를 상대하는데 아무리 부상을 당했다고 해도 대비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특별히 이번 원정을 위해 제련해온 은과문 부적이었다.

    제련에 필요한 재료가 모두 귀하긴 했지만 운성처럼 거대한 성에서는 그럭저럭 모을 만했다. 마지막으로 한립은 보라색 부적을 꺼내 몸에 붙였다.

    파앗.

    보라색 안개가 퍼지고 은색 주술문자 속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만일을 위해 태일화청부를 쓴 것이다. 그는 허상화 된 몸을 이끌고 통로 전방을 향해 날아갔다.

    * * *

    절벽 입구 밖.

    한립이 마연조를 구속한 순간, 섬섬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일이야?”

    푸른 기린 허상이 서둘러 물었다.

    “마연조가 붙들렸어.”

    “뭐? 뭔가 눈치 챈 걸까?”

    “그건 아닌 것 같고. 경계심이 많은 사람이니까 성계 마수와 싸우는 모습을 감시당하는 게 꺼려져서 그런 게 아닐까.”

    “성가시게 됐는데. 마수와의 전투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면 시간을 맞추기가 어렵다고.”

    기린 허상이 꼬리를 흔들며 안색을 굳혔다.

    “어쩔 수 없지! 어쨌든 곧 마수와 싸우기 시작할 테니 서둘러 움직이자. 아무리 대단해도 성계 마수를 죽이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테니까. 진령의 혈을 열기에는 충분할 거야.”

    “알겠어, 가자!”

    섬섬은 한쪽에는 검은 기린 문양이 새겨지고, 반대편에는 은색 주술문자가 빼곡한 삼각형 영패를 꺼내들었다.

    “기린령(麒麟令)을 써야 한다는 게 너무 아깝다. 이걸 만드느라 들인 시간과 노력이 얼만데. 제련에 실패한 적도 많고.”

    섬섬은 영패 표면을 손끝으로 훑었다.

    “아무리 귀해도 진령의 혈에 있는 것보다 귀할까! 이걸 써야 동굴 안의 마기를 이겨내고 깊숙이 들어갈 수 있단 말이야. 한 가 녀석이 너를 대신해 성계 마수를 막고 있는 동안 아무도 모르게 진령의 혈을 개방해야해.”

    “알지만 겨우 기운을 감추고 이동하는데 쓰기에는 아까운 물건이라 그렇지. 게다가 한 번 밖에 쓰지도 못하고 말이야.”

    섬섬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기린 허상은 이번에는 대꾸하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섬섬은 진지한 얼굴로 영패를 허공에 던졌다.

    휘잉!

    검은 영패가 빙글빙글 돌며 새까만 돌풍을 만들어냈다. 돌풍 속에서 들려오는 포효소리가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섬섬은 재빨리 수결을 맺어 입에서 푸른 검을 뿜었고 검은 그녀의 손목을 베었다. 손목에서 대량의 피가 뿜어져 나오더니 피구슬로 응결돼 검은 돌풍으로 날아갔다.

    신기하게도 피구슬이 들어가자 검은 돌풍 속 포효소리가 뚝 끊겼다. 거친 바람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에는 검은 돌풍마저 사라지고 새까만 묵기린(墨麒麟)이 나타났다.

    묵기린은 모호한 형상을 지닌 환영에 불과했다. 환영을 앞에 둔 섬섬은 엄숙한 얼굴로 수결을 맺었고 검은 주술 문자들이 나타나 묵기린 속으로 흡수되었다.

    그러자 묵기린의 흉악한 기세가 수그러들고 검은빛으로 변해 날아들었다.

    파앗.

    여인과 푸른 기린이 검은 보호막에 완벽하게 둘러싸였다.

    “묵기린이 매장된 곳을 기억하고 있어 다행이야. 묵기린의 잔해와 시기(尸氣)를 이용해 이 보물을 제련할 수 있었으니까! 너와 내가 공생 관계라 기린의 기운을 지니고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네 수행에 오히려 반서를 당할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아깝다는 거잖아! 위기의 순간에 목숨을 구해줄 보물인데.”

    푸른 기린이 낮게 키득거리자 정족 여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곧 조용히 마기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마기 속으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중턱의 회백색 돌멩이가 떨어져 나왔다.

    돌덩이는 빙글빙글 돌며 돌가루를 떨구더니 금빛의 딱정벌레로 바뀌었다. 빛이 번뜩이고 딱정벌레가 절벽 입구 속으로 날아들었다.

    그때 한립은 조용히 통로를 지나 대청에 진입해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곳은 규모가 굉장히 컸는데 가운데에 금색 진법이 펼쳐져 있었고 사방에는 요마들이 새겨진 기둥이 12개나 있었다.

    기둥의 그림 속에서 검은 기운이 빠져나와 진법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진법 중간에는 커다란 검은색 원숭이가 나무 침상 위에 누워있었다.

    검은 원숭이는 머리에 세 개의 뿔이 솟아 있었고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채 노란빛을 반짝였다. 그리고 가슴에는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는지 뼈와 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핏빛 안개가 용솟음쳐 쉼 없이 거대 원숭이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입구에서 대청을 살펴보던 한립은 조급히 움직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수사들은 그를 지척에서도 감지하지 못할 테지만 합체 중기의 존재는 태일화청부라 해도 완벽히 속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묵묵히 관찰해보고 있는 중이었다.

    동굴 밖에서 금빛 딱정벌레가 산속으로 날아들자,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곳에 오기 전 만일을 대비해 서금충 한 마리를 바깥에 숨겨두었었다.

    기괴한 주춧돌을 갉아먹은 서금충은 몸이 단단해지고 중량이 무거워진 것이 다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다른 능력을 찾아냈다. 그건 바로 돌로 변해 기운을 숨기고 잠복하는 능력이었다.

    변이 서금충들은 흙이나 돌 속에 들어가면 기이한 흙 속성 영력이 나타나 주변과 일체화되었다. 누군가 서금충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수색하거나 영목 신통을 가진 경우가 아니라면 찾기 어려울 것이다.

    마기가 가로막고 있어 서금충을 통해 바로 정보를 얻지는 못했지만 의식 감응을 통해 정족 여인이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녀가 성계 마수의 재료를 대가로 천외마갑을 수리해주겠다고 했을 때 이미 다른 속셈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섬섬은 평범한 정족인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마수 재료가 아무리 진귀해도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일만한 가치는 없었다. 심지어 그에게 천외마갑까지 넘기면서 말이다.

    마금산맥에 들어와 여러 번 위험한 상황에 처했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원정을 고집했다. 한립은 그녀가 십중팔구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약속대로 마핵으로 천외마갑만 수리해준다면 사소한 꿍꿍이는 눈감아 줄 수 있었다. 여인의 수행이 높지 않으니 충분히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립은 대청에서 일다경을 기다린 끝에 진법과 12개의 기둥을 제외한 다른 금제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거대 원숭이가 중상을 입고 깊은 잠에 빠져 있다는 말도 맞았다.

    그렇다면 여인이 무슨 짓을 하든 일단 성계 마수의 마핵을 손에 넣는 것이 먼저였다. 그는 결론을 내리고 심호흡을 하며 열댓 개의 푸른 구슬과 두꺼운 부적 뭉치를 꺼냈다.

    그리고 주먹 크기의 금색 딱정벌레도 두 마리나 불러냈다. 준비를 끝낸 한립은 수결을 맺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줄곧 검은 원숭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원숭이는 여전이 움직임이 없었고, 부적들은 대청 곳곳으로 날아가 반짝이며 사라졌다. 푸른 구슬들은 진법으로 날아가다 우뚝 멈춰 서서 12개의 기둥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서금충들은 진법 주위를 맴돌았다.

    ‘흠…….’

    한립은 다시 검은 원숭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주저하다 대청 구석을 가리켰고 은색 불새가 괴이하게 나타나 진법 위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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