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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68화 (725/2,000)

968화. 살육

*

“맞습니다, 이곳은 오래 있을 곳이 못되지요. 다른 마수가 숨어 있을 수도 있으니 빠르게 이동해야 합니다.”

섬섬도 놀란 듯했지만 곧바로 대답했다. 이에 월종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다시 둔광을 일으켜 앞으로 나아갔다. 이번에는 반 시진 만에 옅은 안개 구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은 지체 없이 전방의 산맥으로 접어들었다.

한립 일행은 몰랐지만, 그들이 안개를 벗어나는 순간 하늘 끝에서 은빛이 날아와 안개 입구에서 멈추었다. 둔광이 가시고 나타난 여인은 귀가 뾰족하고 털이 복슬복슬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펑!

그녀의 몸속에서 은빛 기운이 폭발하고 주술문자가 신속하게 퍼졌다 사라졌다.

“역시 이쪽으로 간 게 맞았군! 여긴 변이 인면취(人面鷲)들의 새로운 서식지일 텐데. 금조의 피를 이어받은 데다 혈비의 수하들이라 조금 거북하지만 그 덕에 그자들도 쉽게 빠져나가지 못했겠지.”

여인은 중얼거리며 은색 빛줄기로 변해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한 시진 후, 마조들이 죽은 자리에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코를 킁킁거리며 의아한 얼굴로 이전과 똑같은 술법을 펼쳤다.

잠시 후 여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고민하던 그녀가 고개를 쳐들고 길게 울부짖었다. 한참 후 여인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립 일행이 향한 곳으로 날아갔다.

* * *

마금산맥 깊은 곳, 산과 산 사이의 평지에 마수들이 빼곡했다. 지면은 물론이고 허공까지 수천 마리의 각종 마수들이 몰려 있었다.

마수 떼 사이의 높다란 암석에는 거대한 두꺼비 거서가 엎드려 있었다. 이전보다 몸집이 줄어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잠시 후, 마수 떼 사이로 금색 무늬가 있는 거대 박쥐가 날아들었다.

“대인,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움직이도록 하지. 다시 말하지만 이번 목표는 산맥에 진입한 외부인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 그들에게서 진법 원반을 빼앗는 것이다. 그걸 이용해 ‘지선’을 찾아 철마 대인께 바칠 것이다. 누구든 지선을 찾는 자는 큰 상을 내리겠다.”

거서가 간단히 명령을 내렸다. 마수들은 그 말을 듣자 순식간에 흩어져 외곽으로 날아가거나 달려갔다. 거서 역시 몸을 일으켜 마수 대군에 합류했다.

그런데 고공의 회백색 구름 속에 검은 그림자가 숨어 있었다. 검은 그림자는 새빨간 눈을 빛내며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주시했다.

마수들이 전부 떠나자 구름 속에서 나온 것은 커다란 붉은 앵무새였다. 앵무새는 주변을 둘러보다 펑! 하고 터져 핏빛 안개로 흩어졌다.

* * *

같은 시각 마금산맥 모처의 지하.

석실 침상에 앉아 운기행공을 하던 핏빛 장포 거한이 눈을 번쩍 떴다. 창백한 얼굴에 큰 입과 납작한 코를 지닌 거한은 표정이 어두웠다.

“철시마(鐵翅魔)가 무슨 꿍꿍이지? 성조 대인께서 깨어나시기 직전인데 갑자기 외부인들을 살육하려 들다니. 대체 지선이 뭐기에 수하들을 시켜 고계 마수들을 불러 모았단 말인가.”

짝! 짝!

거한이 가볍게 손뼉을 치자 석문이 열리고 새빨간 궁장 차림의 여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핏빛 안개로 가려져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부친을 뵙습니다.”

“혈영, 철시마와 다안은 지궁에 도착했느냐?”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거한의 물음에 여인이 작게 답했다.

“아직도? 정말 무슨 일이 있기는 하구나.”

혈포(血袍) 거한이 눈을 반짝였다.

“무슨 소식이라도 들으셨습니까?”

“그래, 철시마 수하가 전부 소굴을 떠났다는 소식이다.”

“전부요? 그렇다면…….”

혈영은 깜짝 놀랐다.

“네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전부 외곽으로 몰려갔다. 이번에 산맥에 들어온 영계인들을 전부 죽이기 위해!”

“영계인들을 어째서 죽인단 말입니까?”

“그게 너를 불러들인 이유니라. 지선이라고 불리는 물건 때문에 벌어진 일 같구나. 나는 성조께서 언제 깨어나실지 몰라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네가 가서 상황을 좀 알아봐야겠다.”

“예, 알겠습니다.”

궁장 여인이 대답하고는 석실을 나섰다. 석실 문이 닫히자 혈포 거한은 한숨을 쉬고 다시 눈을 감았다.

* * *

마금산맥 외곽.

회색 나무들 위로 화신기 수사가 붉은 비도를 조종해 흑곰 마수 두 마리와 싸우고 있었다. 흑곰 마수는 체구도 크고 발톱에서 강력한 빛을 뿜어 붉은 비도를 밀어붙이는 중이었다.

그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까악! 까악! 까악!

그런데 갑자기 하늘 끝에서 괴상한 소리가 들리고 검은 구름이 몰려들었다. 자세히 보니 수백 마리의 뿔이 난 검은 까마귀들이었다. 그중 가장 몸집이 큰 마조가 청록색 눈을 사납게 번득였다.

화신기 이족인은 혼비백산해 달아나려 했지만 흑곰 마수들과 격전을 벌이는 중이라 그럴 틈이 없었다. 그는 급하게 비도에서 도기를 뿜어 날려 보냈다.

까악!

우두머리 마조가 소리치자 수백 마리의 까마귀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이족인이 날린 도기에 잘려다간 것은 몇 마리에 불과했다.

이에 까마귀들은 이족인에게 일제히 달려들어 사정없이 뜯어먹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와 싸우고 있던 흑곰 마수들도 화를 피하지 못하고 잡혀 먹히고 말았다.

그중 한 마리가 입에서 진법 원반 형태의 법기를 뱉어내자 우두머리 마조가 희색을 드러냈다. 법기를 챙긴 우두머리 마조는 까마귀 떼를 이끌고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 * *

표범처럼 생긴 다섯 마리의 마수가 입에서 회백색 마기를 뿜어댔다. 그러자 노란 보호막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보호막 속에는 이족인 두 명이 진법 깃발을 애타게 흔들며 겨우 버티고 있었다.

* * *

산 아래의 넓은 평지를 언 노인과 말쑥한 청년이 쾌속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로 괴상한 구름과 검은 돌풍이 바짝 뒤쫓고 있었다.

거리가 점점 좁혀지자 언 노인이 이를 악물고 낡은 금색 부적 하나를 꺼내들었다.

펑!

부적이 폭발하자 눈부신 금빛이 햇살처럼 드리웠다. 금빛이 지나는 곳마다 마기가 흩어지며 뒤따르던 청록색 구름과 검은 돌풍도 금빛을 경계하며 속도를 늦췄다.

그러나 금빛은 오래 가지 못했다. 언 노인과 말쑥한 청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금산맥 외곽에서 며칠간 비슷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산맥 안으로 들어온 영계인 중 대부분이 마수의 뱃속으로 들어갔고 살아남은 이는 몇 되지 않았다.

그런데 괴이한 일은 영계인도, 법기를 빼앗은 마수들도 지선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립 일행은 고된 여정 속에서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립은 작은 산꼭대기에 서서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가 선자가 말한 곳이 맞는가?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군.”

“그렇기 때문에 마수가 요양할 곳으로 택한 거 아니겠습니까! 월 형, 이제부터는 안내가 필요 없으니 주변에서 쉬고 계셔도 됩니다. 제가 한 선배님과 금방 다녀올 테니까요. 빠르면 반나절 넉넉잡아도 사나흘 내로는 돌아오겠습니다. 그래도 돌아오지 않으면 월 형 먼저 돌아가셔도 됩니다.”

“그럼 저는 여기서 게으름을 좀 피우고 있겠습니다.”

월종은 이미 예상했는지 인근 산으로 날아갔다.

“한 선배님, 가실까요?”

섬섬은 심호흡을 하며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한립은 그녀와 함께 앞쪽 산맥을 향해 날아갔다. 산맥 안으로 들어가자 여인의 어깨에 앉아 있던 마연조가 날개를 펼치고 주변을 뱅글뱅글 돌더니 어딘가로 쏘아져 나갔다.

한립과 섬섬이 그 뒤를 쫓았다.

작은 새는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갔다.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어떤 산봉우리 앞에서 날개를 접고 맑게 울어댔다.

섬섬의 눈이 밝게 빛냈다.

“찾았나 보네요!”

여인은 산봉우리 주변을 돌아보다 중턱에 내려서서 신중히 무언가를 살폈다. 한립도 푸른빛을 거두고 그녀 옆에 섰다.

눈앞의 회백색 절벽은 검은 기운이 감도는 것을 제외하면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지만 한립은 곧 무언가를 눈치챘다.

섬섬이 낮게 소리치자 주변을 맴돌던 마연조가 화살처럼 절벽으로 쇄도했다.

촤륵.

단단해 보이던 절벽은 마연조가 닿자 파문이 일며 새까만 기운으로 변했다. 절벽은 그 자체가 거대한 입구였던 것이다. 마연조는 검은 기운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안의 상황을 알아보겠습니다.”

섬섬은 신중한 얼굴로 바닥에 앉아 수결을 맺고 눈을 감았다. 의식 한 줄기를 마연조에 깃들여 놓았기에 작은 새를 통해 내부를 살피려는 것이다.

한립은 옆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한식경 후, 새의 지저귐이 들리고 마연조가 검은 기운을 뚫고 나와 섬섬의 어깨에 안착했다. 그녀가 조용히 눈을 떴다.

“다행히 성계 마수는 여전히 잠들어 있네요! 마연조가 한 선배님을 마수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줄 것입니다. 내부의 마기가 너무 짙으니 속전속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섬 선자는 마공을 익히지 않았으니 바깥에서 기다리게.”

검은 새는 다시 날아올라 검은 안개 속으로 들어갔고 한립은 여인을 응시하다 두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온몸에 금빛 찬란한 비늘이 뒤덮였고 한립은 곧바로 금빛 빛줄기로 변해 마기 속으로 들어갔다. 한립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미소를 거둔 섬섬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됐으니 우리도 이제 가자고.”

정족 여인의 몸에서 갑자기 푸른빛이 빠져나와 주먹 크기의 기린 허상으로 변했다.

“잠시만 더 기다려. 그가 성계 마수와 싸우기 시작하면 움직일 테니까.”

“왜 그렇게 경계하는 거야?”

“너도 몸속에서 그의 실력을 보았을 거 아니야. 상족 9계 마수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어나갔어. 우리가 그와 싸우면 승산이 얼마나 될 것 같아? 내 예상대로라면 성계 마수가 잠들기 전에 무언가 대비를 해놓았을 거야. 그 둘이 싸우는 동안에 몰래 진령의 혈로 진입하는 게 최선이라고.”

진령 허상을 향해 섬섬이 차분히 설명했다.

“일리 있는 말이네. 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 보지.”

기린 허상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결국 수긍했다. 같은 시각, 월종은 산봉우리에 대충 동굴을 파고는 가부좌를 틀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표정을 굳히고 손에서 괴충이 들어있는 상자를 꺼냈다.

삐익! 삑삑! 삐익!

애벌레가 미친 듯이 경고음을 보냈다. 이에 월종이 식겁하며 즉시 몸을 날려 동굴을 빠져나갔다.

‘이런!’

그러나 동굴 바깥으로 나온 순간 난색을 표했다. 코앞에 은색 갑옷을 입은 사내가 떠있었던 것이다.

“……규 선배님이셨군요. 마수가 나타난 것은 아닌지 긴장하던 차였습니다. 제게 볼 일이 있으신지요?”

월종은 내심 불안했지만 예의상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규 씨 사내는 냉랭히 그를 보고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수사들은 어디 갔지?”

“아, 다른 분들은 따로 볼 일이 있으셔서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 그럼 너 혼자 저승길로 가면 되겠구나.”

규 씨 사내의 얼굴에 핏빛이 반짝이고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에 월종의 안색이 급변하며 들고 있던 상자를 집어던지고 소매 속에서 수십 장의 부적들을 꺼내 입에서 하얀 옥패를 분출했다.

그러자 상자 안에서 애벌레가 튀어나와 몸을 부풀리더니 규 씨 사내를 덮치고, 수십 장의 부적은 각양각색의 빛을 내며 폭발했다. 옥패 역시 하얀 안개로 변해 규 씨 사내를 가로막았다.

월종은 하얀빛을 반짝이며 사라져 저 멀리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는 둔광을 일으켜 하얀 빛줄기로 변해 달아나려 했다.

그 순간 규 씨 사내는 자신의 뒤통수를 내리쳐 그와 똑같은 사내 셋을 불러냈다. 그중 한 명은 양손에서 핏빛 손을 불러내 날카로운 손톱으로 괴충을 파고들어 달려드는 애벌레를 갈라 단숨에 죽여 버렸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입에서 핏빛 기운을 분출해 부적을 만들어 공격들을 휘감았다. 핏빛은 빛덩이는 물론 하얀 안개까지 모조리 흡수해 뱃속으로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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