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964화 (721/2,000)
  • 964화. 마아(魔鴉)

    *

    뇌운각을 빠져나온 한립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누각의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5층은 뭐하는 곳일까?’

    그는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곧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월종까지 통행시험을 마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마을을 돌아볼 생각이었다.

    마을은 그리 넓지 않았고 지선을 가져오면 보상을 하겠다고 제시한 성족에 대해서도 궁금했다. 거리 양쪽으로 점포들이 있기는 했지만 규모가 크지 않았고 대부분 마수 재료를 취급하는 곳이었다.

    거리에는 저계 수사들이 오가며 점포들을 드나들었다.

    ‘여긴가?’

    길을 걷다 정원 딸린 저택을 지나며 한립이 눈을 가늘게 떴다. 괴상한 금제가 막고 있어 그의 의식이 침투하지 못했다. 짐작하건데 이곳이 바로 성족이 머문다는 곳 같았다.

    한립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갔다.

    반 시진 후, 그는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누각 앞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그곳에는 섬섬과 월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월 수사도 통행시험을 치르지 않고 벽뢰산을 받았나 보군.”

    한립은 짐작이 가는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예, 올라가니 민 선배님께서 제 소문을 들었다며 시험을 면제해 주시더군요. 안 그랬으면 이렇게 빨리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 선배님, 아까 저를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월종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처음보다 한립을 대하는 태도가 훨씬 공손했다.

    “아닐세. 이번 일에 수사의 도움이 꼭 필요하니까 나선 것이네. 섬 선자도 벽뢰산을 구했겠지?”

    “물론이지요. 강력한 환술이기는 했지만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비술을 몇 가지 익히고 있어 어렵지 않게 시험에 통과하였습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면 되겠군.”

    “예, 선배님!”

    한립의 말에 섬섬은 웃었고 월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바로 마을을 날아올라 산맥으로 향했다. 푸른 구름을 뚫고 한참을 더 가자 구름이 점점 연해지고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청령운해를 벗어나자 한립은 눈앞의 광경에 둔술을 멈추었다. 저 멀리 엄청난 양의 푸른 번개와 천둥이 내려치고 있었다. 온 세상이 뇌전으로 뒤덮인 듯했다.

    “가시죠.”

    월종이 먼저 은색 우산을 꺼내 발동했다. 은색빛으로 철저히 몸을 가린 것이다. 한립과 섬섬도 자신의 벽뢰산을 꺼내 월종의 뒤를 바짝 쫓았다.

    * * *

    한 시진 후, 은빛 세 덩이가 뇌전을 지나 시커먼 첩첩산중을 바라보았다.

    ‘이곳이 마금산맥!’

    독특한 풍경이었다. 지면에 가까운 곳은 진득한 검은 기운이 가득했고 그 위로는 회색 안개가 뒤덮여 있었다. 둘 사이의 경계가 분명해서 더욱 기이했다.

    한립은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산 전체가 안개로 뒤덮여 있어 가까운 곳의 나무와 돌도 흐릿했고 먼 거리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침음하던 그가 명청령안을 발동했다. 그러자 검은 안개 속이 훨씬 선명하게 보였지만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여전히 먼 곳은 흐릿해서 영목 신통을 발휘해도 제대로 살필 수 없었고 의식도 멀리 방출할 수 없었다.

    명청령안과 의식이 둘 다 제한되면 은신술에 능한 고계 마수를 피하기가 어려웠다.

    “섬 선자, 이제는 가려는 곳의 구체적인 위치를 알려주셔야 합니다.”

    월종이 정족 여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요. 위치를 알려주지 않고 안내를 해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지요.”

    섬섬은 미소를 짓고는 미리 준비한 돌조각을 꺼내 월종에게 날려 보냈다. 월종이 그것을 이마에 붙이고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한립은 주변에 마수가 없는지 확인하고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여기를 가신다고요? 이곳은 마금산맥 외곽 중 가장 먼 곳입니다.”

    월종의 표정이 어두웠다.

    “월 형께서는 마금산맥 심처를 수시로 드나드는 분이지 않습니까?”

    “마기 폭발 기간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깊이 들어가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입구에서도 너무 멀어 돌아올 일도 막막하고요.”

    “꼭 고계 마수를 마주친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도 없고 제가 바라는 것은 열흘 내로 목적지에 가는 것뿐입니다. 마금산맥 지리에 익숙하시니 월 형만 믿겠습니다.”

    “선자께서 담도 크십니다.”

    월종은 쓴웃음을 지으며 한립의 안색을 살폈다. 일행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그의 의견을 묻는 것이다.

    “월 수사,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게.”

    “한 선배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장 빠른 길은 산맥을 가로지르는 것으로 훨씬 위험하고, 외곽을 따라 돌아가는 길은 비교적 안전한 대신 원하는 날짜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렇다면 중간을 택하는 방법뿐이겠지요.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며 제 시간에 도착할 만한 길 말입니다.”

    고민 끝에 월종이 대책을 제시했다.

    “저는 좋습니다.”

    섬섬은 바로 동의했고 한립도 고개를 끄덕였다. 구체적인 내용까지 상의를 마치고 월종이 산맥 안에서 특별히 주의해야할 몇 가지를 설명한 후 출발했다.

    * * *

    그들이 떠나고 1시진 후, 뇌전 세계를 뚫고 네 명이 날아들었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핀 그들은 무어라 숙덕거리다 진법 원반을 꺼내고 어딘가로 날아갔다.

    이렇게 1, 2시진마다 새로운 무리들이 마금산맥으로 진입했다. 홀로 출발하는 이도 있었고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 중 인원이 가장 많은 것은 규 씨 사내를 우두머리로 한 외지인 무리였고, 그 다음이 언 씨 노인을 주축으로 한 뇌운진 현지 수사 무리였다.

    그러나 이 두 무리는 산맥에 진입하자 뿔뿔이 흩어져 따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 * *

    3일 후, 마금산맥 깊은 곳에서 수레바퀴 크기의 하얀 빛덩이들이 폭발하며 하얀 돌풍을 만들어냈다. 돌풍 속에서 바람의 칼날에 갈기갈기 찢긴 짐승의 잔해가 떨어져 내렸다.

    펑.

    돌풍이 거품처럼 흩어지고 허공에 세 명의 수사가 나타났다. 하얀 구슬을 들고 있는 사내는 월종이었고, 그 옆에는 한립과 섬섬이 조용히 떠 있었다.

    월종이 한숨을 내쉬며 하얀 구슬을 집어넣었다.

    “뭔가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하다는 말씀이시죠? 그저 저계 마수 몇 마리가 나타난 것인데요.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던 일이잖아요.”

    섬섬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다른 저계 마수는 몰라도 마아(魔鴉) 떼가 나타난 게 심상치 않습니다. 보통 산맥 깊은 곳에서 서식하고 고계 마수인 삼두환(三頭獾)과 공생 관계거든요. 이것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공생관계인 고계 마수도 주변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을 대비해 제가 마아 떼를 처리하는 동안 주변 경계를 부탁드린 것이고요.”

    “마아 떼들은 단독으로 서식하기도 하는데 월 형께서 그런 경우를 처음 보신 것은 아닐까요?”

    “절대 아닙니다. 마아는 산맥 심처에서 흔히 발견되는 마조(魔鳥)라 습성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금 상황을 설명할 수 있지?”

    한립이 눈을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공생하던 삼두환이 죽고 제 때에 새로운 삼두환을 찾지 못해 마아 떼가 이곳으로 달아났거나, 아니면 더욱 강력한 고계 마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본능을 저버리고 외곽으로 밀려 나왔을 것입니다.”

    “월 수사가 생각하기에 어느 쪽이 더 가능성이 높겠는가?”

    “첫 번째는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마아는 비행 속도가 조금 빠른 것을 제외하면 저계 마수들 중에서도 약한 조류입니다. 의지하던 삼두환(三頭獾)이 죽었으면 이곳까지 오기도 전에 다른 마수들에게 잡아 먹혔겠지요. 산맥에 서식하는 마수들은 그리 녹록하지가 않습니다.”

    “그 말은, 강력한 고계 마수가 일부러 마아들을 이곳으로 보냈다는 뜻이군. 우리를 노리고.”

    한립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안타깝지만 아마 그럴 것입니다. 아마 상당한 지능을 지닌 고계 마수겠지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섬섬이 미간을 좁혔다.

    “최대한 속도를 높여 마수를 떨쳐내야 합니다. 지능이 높은 고계 마수가 외곽에 나타났을 때는 다른 목적이 있을 테니까요. 정 안 되면 죽이는 수밖에 없겠지요. 다른 마수들을 계속 보내거나 저희 뒤를 쫓게 놔두면 큰 후환이 될 것입니다. 하하, 사실 한 선배님이 계셔서 드리는 말씀이지 저 혼자였다면 다른 방법을 썼을 겁니다. 아주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방법이라 시간이 부족한 지금은 쓸 수 없는 방법이지요.”

    월종의 제안에 한립이 섬섬을 향해 물었다.

    “섬 선자 생각은 어떤가?”

    “월 형이 저희보다 이곳 마수에 대해 잘 아니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 선배님이 계시니 성계 마수만 아니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자네들이 그렇다면 나도 반대하지 않겠네.”

    “그렇다면 바로 출발해야 합니다. 괜히 다른 마수의 주의를 끌까 전력을 다해 날아갈 수 없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월종의 말이 끝나자 그들은 둔술을 펼쳐 날아갔다. 한립의 푸른 둔광은 기척도 없이 굉장히 빨랐고, 하얀 기운에 뒤덮인 월종의 속도도 연허기 수사에 못지않았다.

    금색 깃발을 꺼내든 섬섬은 빛이 번뜩일 때마다 이동해 한립과 월종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이 시야 밖으로 사라지자, 십여 리 밖 어딘가에서 핏빛이 번뜩였다. 새까만 안개 사이로 열댓 개의 새빨간 눈동자가 번득이고 있었다.

    한립 일행이 단숨에 수백 장을 지나가자 근처에 서식하던 새까만 박쥐 떼들이 날아올라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포악하게 달려들었다.

    물론 이런 저계 마수는 큰 위협이 되지 않았기에 한립이 나서기도 전에 섬섬이 수많은 금빛을 날려 박쥐 떼들을 처리했다. 그런데 월종은 좋아하기는커녕 갑자기 둔술을 멈추고  한숨을 푹 쉬었다.

    “한 선배님, 섬 선자, 더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마수가 저희 뒤를 쫓고 있고 속도가 저희에 못지않아서요.”

    “확신하는가?”

    푸른빛이 가시고 한립이 담담하게 물었다.

    “확신합니다. 법력은 높지 않아도 감응술과 마수 추적에는 능통한 편입니다.”

    월종의 말에 섬섬의 안색이 나빠졌다. 한립은 잠시 말을 아꼈다.

    월종이 말하지 않아도 거리를 두고 마귀 한 마리가 따라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의식을 멀리까지 방출하지 못해도 명청령안으로 마기에 둘러싸인 희미한 형상을 확인한 것이다.

    검은 마기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지만 그 방대한 몸뚱이가 쉽게 가려질 리 없었다. 일부러 이 사실을 말하지 않고 기다린 것은 월종이 실력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보아하니 마금산맥에 대해 아는 것도 많고 실력도 출중해 섬섬이 그를 고용한 이유가 있었다.

    “한 선배님, 함정을 파놓고 기다렸다 마수를 처리할까요?”

    섬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 수고를 할 것까지야! 마수가 우리를 쫓고 있다니 직접 찾아가 죽이면 그만인 것을. 내가 다녀 올 테니 자네들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게.”

    한립의 등 뒤로 청백색 빛이 반짝이자 수정 날개가 펼쳐졌다.

    꽈광!

    날개를 펄럭이는 순간 그는 청백색 뇌전 속으로 사라졌다. 정족 여인과 월종은 우두커니 허공에 떠있었다.

    “홀로 가시게 두어도 될까요? 성계 마수는 아니지만, 고계 마수들 중 강력한 것들은 동급 수사도 적수가 되지 않습니다.”

    월종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근심을 드러냈다.

    “자신이 있으시니 가셨겠지요.”

    섬섬은 한립의 실력을 꽤나 믿는 듯했다. 그 말에 월종은 미간을 좁혔지만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쿠콰쾅!

    바로 그때 멀리서 굉음이 울리고 분노한 짐승의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포효소리는 처절한 비명으로 바뀌며 잦아들었다.

    월종과 섬섬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앞에 푸른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한 선배님이십니다.”

    월종은 한립의 귀환을 반기다가 갑자기 표정이 묘해졌다.

    “월 수사, 어떤 마수인지 봐주게. 조금 특이해 보이는데…….”

    푸른빛 속에서 나타난 한립은 거무튀튀한 무언가를 던졌다.

    월종은 움찔하며 얼른 손을 들어 검은 물체를 살폈다. 대충 보면 털이 수북한 것이 원숭이 머리처럼 보이기도 한 마수 머리가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이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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