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3화. 상족 9계 압도
*
언 노인은 한립을 아래위로 살피고 말려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저 녀석을 대신해 나와 해보자는 것입니까?”
녹발 이족인이 열을 받아 한립을 노려보더니 갑자기 녹색 털이 자란 손바닥으로 한립을 향해 후려쳤다. 그러자 어떤 공법을 익힌 것인지 손바닥이 날아들며 커졌고, 노란빛을 번뜩이며 한립에게 들이닥쳤다.
“한 수사, 조심하십시오!”
언 노인이 놀라 경고했다. 평범한 연허 초기 수사였다면 꼼짝 못하고 타격을 입을 것이다. 하지만 한립의 육체가 이 정도 압박에 꼼짝 못할 리 없었다.
그는 노란 손바닥이 떨어져 내리며 몰려온 풍압을 느끼곤 피식 웃었다. 그리고 한립의 소매 속에서 새까만 손이 움직였다. 회색 거대 손이 응결해 반대로 노란 손바닥을 잡아채려 했다.
“감히 힘 대결을 해보시겠다. 꿇어라!”
녹발 이족인이 사납게 소리쳤다. 안 그대로 7성의 법력을 끌어 모은 노란 손바닥에 미친 듯이 법력을 불어넣는 중이었다. 일격으로 한립을 바닥에 짓눌러 버리겠다는 심산이었다.
노란 손바닥이 훨씬 커져 회색 거대 손과 충돌했다. 잠시 후,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굉음 대신 ‘펑’하는 소리가 들리고 노란 손바닥이 힘없이 허물어져 사라졌다. 그리고 회색 거대 손이 괴이하게 녹발 이족인 위에 나타나 소리 없이 떨어져 내렸다.
거대 손이 닿기도 전에 이미 원자신광의 회색빛이 몰려들었다.
“말도 안 돼!”
이족인은 자신의 신통이 완전히 허물어진데다 상대가 똑같은 방법으로 반격해오자 분노하며 두 주먹을 힘껏 쥐고 허공의 회색빛을 향해 휘둘렀다.
노란 주먹 환영이 튀어나갔다.
퍼펑!
작은 폭음이 들리고 노란 주먹 환영들이 회색빛에 녹아들었다. 이에 녹발 이족인이 기겁하며 당장 둔술을 펼쳐 달아나려 했지만 회색 기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녹발 이족인의 영력이 얼어붙어 둔술을 펼칠 수 없었다. 그때 회색 거대손이 떨어졌다.
“헉!”
눈앞이 컴컴해지고 녹발 이족인은 숨이 턱 막혔다. 감당할 수 없는 중량이 어깨를 내리 눌렀기 때문이다.
쿵!
녹발 이족인이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한쪽 무릎을 꺾고 말았다. 그러나 회색 거대 손은 그의 보호막을 누르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창백하게 질렸던 녹발 이족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운공을 과도하게 해서인지 아니면 치욕스러워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모습에 3층 전체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
현지인이나 외지인이나 뜻밖의 상황에 놀라고 있었다. 언 노인은 희색을 드러냈고, 멀리 규 씨 이족인은 눈매가 매서워졌다. 정족 여인 섬섬도 복잡한 얼굴을 했다.
한립의 실력이 뛰어난 것은 알았지만 2계나 높은 상대를 한 번에 제압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당황스러웠다. 월종도 꽤나 놀랐는지 한립을 멍하니 쳐다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립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절반쯤 무릎을 꿇고 있는 녹발 이족인을 내려다보았다.
‘흠…….’
상대는 회색 거대 손에 눌린 와중에도 분노에 찬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곧 녹발 이족인의 보호막이 번뜩이고 점점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한립이 입 꼬리를 꿈틀하며 조소했다. 그가 검은 손바닥을 뒤집자 검은 동산이 기이하게 나타나 녹발 이족인을 향해 추락했다.
콰앙!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새까만 산이 녹발 이족인의 보호막까지 깨고 무릎 꿇고 있는 상대를 내리 찍었다.
쿠르릉-
산이 점점 커지자 그 밑에 깔린 녹발 이족인의 모습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되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건물 바닥과 벽이 갑자기 하얀 빛을 뿜어내고 주술문자들이 휘몰아친 다음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다.
건물의 금제가 싸움의 여파를 흡수한 것이다.
“이제 제가 3번째 선택지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한립이 검은 산 밑에 깔린 녹발 이족인을 보고 차분히 물었다. 연허 최상급 수사와 정식으로 대결하면 몇 가지 필살기를 쓰지 않고는 단시간 내로 제압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족인이 자신의 단단한 육체를 믿고 좁은 공간에서 그와 힘겨루기를 한 덕분에 그를 가뿐히 제압할 수 있었다. 엄청난 괴력에 범성진마공까지 익힌 한립이 이기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규 씨 사내는 한립이 녹발 이족인을 가뿐히 제압하는 것을 보고 얼굴에 핏빛이 스쳤다. 그의 몸 주위로 피비린내가 농염해지며 천천히 한립을 향해 걸어왔다.
주변의 궁장 여인 등은 긴장한 나머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립의 실력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다가올 정도면 그만큼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이었다.
언 노인도 눈을 가늘게 뜨고 규 씨 사내를 주시했다. 한립만이 담담하게 규 씨 사내를 바라볼 뿐이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수사께서는 보물을 거두시지요. 뇌운각 내에서의 싸움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두 분이 실력을 겨루고 싶으시면 마을의 경기장으로 이동하세요. 권고를 따르지 않으면, 싸움에 관여한 수사들 모두 마금산맥 진입 자격을 박탈하겠습니다.”
4층 계단 입구에서 단호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렸고 규 씨 사내는 걸음을 멈추었다.
“새로 부임한 ‘민 집사’입니다. 한 수사, 보물을 거둬야겠습니다.”
언 노인이 서둘러 말했다. 이에 한립은 산 밑에 깔려 있는 녹발 이족인을 보고 코웃음을 치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검은 산이 회색 기운 속에서 거품처럼 사라졌다.
녹발 이족인이 벌떡 일어나 흥분한 얼굴로 입에서 노란빛을 뿜으려 했다.
“그만! 네가 상대할 자가 아니니 돌아 오거라.”
그때 뜻밖에도 규 씨 사내가 동급의 녹발 이족인에게 명령을 내렸다.
“방심해서 당한 것입니다. 이 치욕을…….”
새빨갛게 달아오른 녹발 이족인은 수긍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 말이 틀렸단 말이냐?”
규 씨 사내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냉랭했다. 녹발 이족인은 가슴이 철렁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아닙니다.”
녹발 이족인은 한립을 사납게 노려보고 침울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월 수사를 내주지 않겠다면 되었습니다. 듣자니 어차피 지선을 노리는 것도 아닌 것 같으니 서로 마금산맥 안에서 충돌할 일도 없겠지요. 괜한 싸움으로 시간과 법력을 낭비할 생각은 없습니다. 허나, 다시 한 번 내가 하는 일을 막는다면 가만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규 씨 사내가 경고를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한립은 그의 협박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언 노인과 월종은 상황이 해결 되어 한시름을 놓았다. 궁장 여인이 한립을 향해 빙긋 웃으며 무어라 말하려는데 계단 위에서 민 집사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상족 8계, 9계를 제외한 수사는 통행시험을 치러야 마금산맥으로 진입할 수 있으니 올라오십시오. 한 번에 두 명씩 받겠습니다.”
민 집사의 안내에 모여 있던 이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서로 눈치를 보며 짝을 지었고 곧 두 명이 계단을 올라가 자취를 감추었다.
가장 먼저 시험을 치르기 위해 올라간 수사들은 언 노인 쪽도, 규 씨 사내쪽 인물도 아니었다. 머뭇거리다 기회를 놓친 수사들은 후회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벽뢰산을 빨리 수령해 마금산맥에 먼저 진입해서 나쁠 것이 없었다. 남은 이들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귀를 기울였지만 금제 때문에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통행시험이 시작되고 반 시진이 흘러 드디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곧 의복이 찢기고 드문드문 핏자국이 묻은 수사 한 명이 걸어 내려왔다.
“축 수사, 통행시험은 통과하셨습니까? 벽뢰산은요?”
외지인 중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통과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시험 방식에 대해서 발설하면 벽뢰산을 회수한다더군요. 또한 벽뢰산을 수령한 자는 바로 뇌운각을 떠나야 하고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사내는 바삐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잠시 후 나머지 한 명이 고개를 숙이고 4층 계단을 내려왔다. 이전 수사와 달리 상처라고는 없었지만 표정이 어두웠다. 그 역시 아무 말 없이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두 명 더 올라 오십시오!”
다들 눈치를 살피는데 계단 위에서 민 집사가 재촉했다.
한립이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일어나지 않자 미소를 머금고 몸을 일으켰다. 계단으로 향하는데 뒤따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급할 것 없으니 수사는 더 기다렸다 올라가도 되네.”
한립은 돌아보지 않고도 누군지 알 것 같아 이렇게 말했다.
“시험에 대해 미리 준비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귓가에 섬섬의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렇다면 괜한 걱정을 했군.”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계단을 올랐고 섬섬도 편안한 얼굴로 따라갔다. 4층 계단 입구에는 희미한 붉은색 빛의 장막이 펼쳐져 있었다.
빛의 장막을 통과하자 눈앞이 밝아지고 남색으로 물든 공간이 나타났다. 벽이고 바닥이고 전부 남색 수정으로 만들기라도 한 듯 반짝였다. 공간 한쪽에 하얀 진법이 펼쳐져 있었고 그 중심에 누군가 서서 한립과 섬섬을 살폈다.
문사 복장을 한 깐깐해 보이는 사내가 노란 서책과 금색 진법 원반을 들고 서있었다. 연허 최정상의 수사였다.
“수사께서 올라오셨군요.”
“저를 아십니까?”
문사의 말에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되물었다.
“이전에는 몰랐지만, 아래층에서 그렇게 실력 행사를 하셨는데 모를 수 있나요. 벌써 9계 수사를 힘으로 압도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과찬이십니다. 통행시험을 볼 수 있겠지요?”
“허허, 수사의 실력에 통행시험을 보아 무엇 하겠습니까?”
문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에 한립과 섬섬 둘 다 놀랐다.
“왜 그러십니까. 제가 꽉 막힌 성격이라고 소문이 자자합니까? 제가 그렇게 융통성이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8, 9계 존재도 시험을 면하는데 수사가 통행시험을 치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벽뢰산을 받으십시오!”
문사가 들고 있던 노란 서책이 반짝이자 은색빛이 날아올랐다. 한립이 손에 잡은 것은 작지만 아주 섬세하게 만들어진 우산이었다. 표면에 빼곡하게 주술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벽뢰산은 제가 보는 앞에서 주인 인식을 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팔거나 빼앗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지요. 주인 인식을 하고 한 달밖에 사용할 수 없으니, 반드시 한 달 내로 산맥을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 이상 머물면 마기에 침식되어 마물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민 수사는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꼼꼼히 설명해주었다.
“충고 감사합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산을 허공에 던지고 입으로 정혈을 뿜었다. 그가 뿜어낸 정혈이 핏빛 안개로 변해 우산 속으로 스며들었다.
파앗-
은색 우산은 몸집을 키웠고 주술문자는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핏빛이 가시고 우산은 원래대로 돌아가 한립의 손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주인 인식이 끝난 것이다.
“……!”
민 집사가 놀란 눈빛을 보냈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섬섬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족인 선자가 수행이 나쁘지 않군. 마금산맥은 위험한 곳이라 목숨을 잃을 수도 있네. 그래도 들어가고 싶은가?”
“선배님의 호의는 감사하지만 꼭 마금산맥에 들어가야 할 사정이 있습니다. 통행시험을 치르고 싶습니다.”
섬섬은 민 집사를 향해 예를 취하고 굳게 답했다.
“의지가 확고하다면 말릴 필요가 없겠지. 통행시험은 두 가지 중 하나를 고르면 되네. 환영 진법을 반 시진 동안 견디는 것과 두 마리 꼭두각시들을 이기는 것.”
“첫 번째, 환영 진법을 선택하겠습니다.”
올라오기 전에 말한 대로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 섬섬은 고민 없이 답했다.
“거기서 세 발자국만 앞으로 오게.”
민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섬섬은 바닥의 진법을 향해 나아갔다. 한립이 진법을 살피려는데 민 집사가 축객령을 내렸다.
“수사께서는 내려가셔도 좋습니다. 시험에 관해서는 함구해 주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으로 걸어갔다. 그가 계단 입구에 들어서자 곧바로 금제가 발동되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바닥의 금제가 하얀 기운을 뿜어 정족 여인과 민 수사를 휘감고 있었다.
어떤 시험일지 궁금했지만 그는 곧바로 빛의 장막을 통과해 계단을 내려갔다. 3층의 대기자들이 전부 그를 훑었다. 그는 빙긋 웃고는 아무 말 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