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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62화 (719/2,000)
  • 962화. 시비

    *

    월종이 침음하다 신중히 입을 열었다.

    “인형의 영약이 아무리 희귀해도 이렇게 마기가 폭발하는 시점에 목숨을 걸고 산맥에 들어가려는 것이 이상하군요. 이때는 외곽에도 강력한 마수가 나타날 가능성이 훨씬 높아져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데요.”

    “그건 지선이 나타난 날, 성족 선배님이 오셔서 만묘단 세 알과 만년 벽련화(碧蓮花) 세 송이 그리고 엄청난 금액의 영석을 내걸었기 때문입니다. 인형 지선의 생사에 관계없이요. 선배님은 마금산맥이 개방되는 날부터 한 달 간 마을에 머물다 떠날 것이라 선언하셨습니다. 아, 지선혈을 사가신 분도 그 선배님이십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고운 용모의 궁장 여인이 청년을 대신해 설명했다.

    “성족?”

    이번에는 한립이 반응을 보였다.

    “예, 곡 씨 성을 쓰시는 분인데 천운 분이 아닌 듯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곳에 모인 분들은 곡 선배님이 제시한 거액의 보수를 노리고 온 것이군요.”

    섬섬이 빙긋 웃으며 이야기를 정리했다.

    “마금산맥에 오는 이들은 수행의 고하를 막론하고 다들 영석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거액의 영석을 챙기면 더는 위험을 무릅쓰고 마수를 사냥할 필요가 없겠지요.”

    궁장 여인이 언짢아하자 섬섬이 그저 미소를 머금고 입을 다물었다.

    “난아, 무례하게 굴지 말거라. 월 현질의 친우분들 아니더냐.”

    언 노인이 궁장여인을 나무라자, 그녀가 달갑지 않은 얼굴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게 며칠 전 일이면 어찌 다들 이곳에 모여 있는 것입니까? 혹시 이곳을 관리하는 분이 ‘료 선배님’이 아니십니까?”

    월종은 주위를 둘러보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월 형의 말씀대로 료 선배님은 벌써 10년 전에 이곳을 떠나셨습니다. 새로 온 집사께서 아주 엄격해서 통행시험까지 부활시켰지 뭡니까.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이들은 벽뢰산을 받을 수 없고, 료 선배님처럼 사정을 봐주며 미리 벽뢰산을 나누어 주지도 않고 있습니다. 월 형께서는 마침 시험 첫날에 도착하셨기 때문에 수사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말쑥한 청년이 불만을 토로했다.

    “함부로 말하지 말게. 새로 온 ‘민 집사’가 통행시험을 부활시킨 것은 실력이 부족한 이들이 산맥에 진입했다 마수에게 당하는 일을 줄이기 위해서니까.”

    언 노인이 담담한 목소리로 민 집사를 거들었다.

    “멋모르고 마금산맥으로 들어가 목숨을 잃는 수사들이 많을 때는 필요했겠지만 지금은 산맥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수사가 거의 없는 걸요. 괜한 시간 낭비가 아닌가 싶습니다.”

    “자네가 어찌 생각하든 벽뢰산이 없으면 아무도 산맥으로 진입할 수 없고, 지금 심사를 맡은 분은 민 집사이네.”

    언 노인이 의미심장하게 말을 마쳤다. 그곳에서 가장 수행이 높은 노인이 말하자 다른 수사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 월 형께서는 산맥에 왜 들어가시려는 것입니까?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시지는 않겠지요. 저희와 함께 움직이시죠. 월 형처럼 마수 사냥으로 유명한 분이 함께해 주시면 지선을 잡을 가능성이 크게 늘어날 것입니다. 지선을 잡아 보수를 받으면 단단히 챙겨드리겠습니다.”

    궁장 여인이 월종을 향해 미소 지었다.

    “월 형, 시간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이미 손에 넣은 보수와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보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현명한 건지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정족 여인은 월종이 관심을 보이자 조용히 그를 일깨웠다.

    “고민할 것 없네. 사실 우리도 마금산맥에 지선만 노리고 들어가는 것은 아니니까. 외곽을 위주로 수색한다지만 짙은 마기 속에서 지선을 찾기가 어디 쉽겠는가? 원래 간절히 구하지 않아도 뜻밖의 행운이 찾아오기도 하는 법이니 이렇게 하세. 난아, 지선의 모습이 담긴 옥간과 추적법기를 월 현질에게도 내어 주거라.”

    언 노인이 대수롭지 않게 분부했다. 궁장 여인은 싫은 기색 없이 저물탁에서 하얀 돌조각과 남색 진법 원반을 꺼냈다.

    “감사드립니다, 언 선배님.”

    주저하던 월종이 결국 거절하지 않고 물건을 받아들었다.

    “허허, 겨우 이 정도로 감사는! 어찌 되었든 자네의 부친과 내가 옛정이 있지 않은가.”

    언 노인은 인자하게 웃었다. 곁에서 뒷짐을 쥐고 바라보고 있던 한립의 입 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거의 동시에 정족 여인의 귓가에 그의 전음이 울렸다.

    “출발 전 해야 할 말이 있지 않은가? ‘마기 폭발’은 뭐고, 외곽에 강대한 마수들이 나타난다는 이야기는 또 무엇이지?”

    섬섬은 움찔하고 바로 입술을 달싹여 전음으로 답했다.

    “선배님께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마기 폭발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마금산맥 깊숙이 들어가지 않으면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안 그래도 산맥에 들어가면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그 대신, 성족급 마수를 잡으면 약속드린 진혈과 마핵 외에 제가 재료 일부를 더 내어드리면 어떨까요?”

    여인은 한립의 말에 곧바로 자세를 낮추고 협상을 제시했다. 그러나 정족 여인의 귓가에 한립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음모와 술수를 꾸미는 것들을 혐오한다. 이번에는 봐주겠지만, 또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거래는 없던 일이 될 것이야. 아무리 천외마갑을 수리하고 싶어도 다른 자의 손에 놀아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음산한 경고였지만 정족 여인은 오히려 안심했다. 이번 일은 이대로 넘어간 것이다. 월종과 언 노인은 옛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었다.

    바로 그때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월종에게 관심 없던 다른 연허 최고봉 수사 두 명이 다른 수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월종에게 다가온 것이다.

    “네가 이곳에서 제일 유명한 마수 사냥꾼이라고? 그럼 마금산맥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겠구나.”

    그중 네모난 머리에 녹색 머리털이 난 중년인이 거만한 말투로 물었다.

    “그건 예전 일입니다. 백 년간 마금산맥에 오르지 않아 이제는 그리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선배님?”

    월종은 긴장하면서도 차분히 대답했다.

    “어쨌든 내일 나와 묘 수사와 같이 마금산맥에 지선을 찾으러 가도록 하자. 네가 길안내를 좀 해줘야겠다.”

    녹발(綠髮) 이족인은 제안이 아니라 명령을 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월종과 궁장 여인의 표정이 급변했고, 섬섬과 한립도 멍해졌다.

    듣고 있던 언 씨 노인이 침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 녀석을 좀 빌려가겠다는 말입니다. 안 됩니까?”

    녹발(綠髮) 이족인은 무엇을 믿고 그러는지 동급 수사에게도 거침이 없었다.

    언 노인은 그런 상대에게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어딘가를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또 다른 연허 최정상의 이족인이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노인의 동공이 수축했다.

    그는 녹색 줄무늬가 들어간 두꺼운 피부를 제외하면 인족과 굉장히 닮아 있었다. 그러나 입고 있는 은색 갑옷에는 핏빛 가시들이 잔뜩 박혀 있었고 피비린내를 풍겼다.

    이족인의 눈빛을 마주한 노인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동급 수사인 자신이 위기감을 느낄 정도라면 상대는 특수한 공법을 익혔을 가능성이 높았다.

    ‘느낌이 좋지 않다.’

    언 노인은 조용히 주변 이족인들을 훑었다. 외부인들 중 전부는 아니라도 열댓 명이 녹색 이족인 주변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언 노인 주변에는 일고여덟 명의 수사들과 한립 일행뿐이었다. 월종과 섬섬 등을 다 포함해야 겨우 인원이 맞았는데 상대편은 상족 9계 존재가 두 명이나 돼서 훨씬 불리했다.

    저쪽에는 상족 7, 8계 수사도 네 명이나 되었다. 언 노인은 남몰래 탄식하며 녹발 이족인이 안하무인으로 나온 이유를 알았다.

    “……월 현질은 노부와 인연이 있는 수사라 당신들이 데려가게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이곳 뇌운진(雷雲鎭)은 아무나 함부로 횡포를 부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소란을 피우더라도 이곳의 규칙은 지키시지요.”

    언 노인의 목소리도 냉랭해졌다.

    “규칙? 무슨 규칙.”

    녹발 이족인은 처음 듣는 소리인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곳에서 싸움이 발생하면 무조건 경기장으로 자리를 옮겨 승부를 가려야 하고, 그곳에서 승리하는 자의 말에 따르는 것입니다.”

    “하하, 나보고 저 녀석과 싸우란 말입니까?”

    듣고 있던 녹발 이족인이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월 현질과 싸우는 것은 안 될 말이지요. 규칙에 따르면 비슷한 수행을 지닌 수사들 간에만 정식으로 싸울 수 있으니까요. 당신들이 그래도 월 현질을 고집하겠다면 노부가 대신 출전하겠습니다.”

    “그런 규칙은 처음 들어 보는데 내가 왜 지켜야 합니까?”

    녹발 이족인의 표정이 흉흉해졌다.

    “규칙을 어기고 뇌운진을 어지럽히면 장로회에서 파견한 집사가 마금산맥으로 들어갈 자격을 취소하고 쫓아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수사는 장로회도 두렵지 않은가 보오?”

    “장로회?”

    움찔한 녹발 이족인은 뒤쪽의 갑옷 이족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갑옷 이족인이 눈살을 찌푸리고 주변의 누군가에게 물었다.

    “저게 정말이더냐?”

    “규 선배님께 아룁니다. 확실히 그런 규칙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마을이 건립된 이래 거의 언급되지 않는 규칙입니다.”

    검은 피풍의로 온몸을 가린 자는 뇌운진에 대해 잘 아는 듯했다. 궁장 여인 등은 그것을 보고 의문을 느꼈다. 괴상한 복장을 하고 있어 외지인인 줄 알았는데 뇌운진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규칙을 어기고 이곳에서 싸움을 벌이면 그 장로회 집사라는 자가 관여를 하는지 묻는 것이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에 새로 부임한 인물이 워낙 고지식하다고 하니 나설 가능성도 있습니다.”

    검의 피풍의 사내가 조그맣게 답했다. 규 씨 이족인이 상황을 파악하고 노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원하는 대로 규칙에 맞게 해봅시다. 벽뢰산을 수령하고 경기장에서 보지요. 내가 직접 수사와 신통을 겨룰 테니 지면 딴 말하기 없습니다.”

    언 노인이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는 월종을 향해 말했다.

    “월 현질, 노부가 나설 것이니 걱정 말게.”

    “어찌 제 일에 언 선배님이 피해를 보게 나눌 수 있겠습니까? 제가 직접 싸울 것이니 상대편이 내보낼 자를 새로 골라야 할 것입니다.”

    월종은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너를 대신할 수사를 내보내든 네가 직접 나를 상대하든 선택지는 둘 뿐이다.”

    녹발 이족인이 거칠게 소리쳤다. 그 말에 월종은 난색을 표했다.

    “한 선배님, 저들이 월 수사를 데려가게 두면 안 됩니다. 마기 폭발 기간에 성계 마수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반드시 전문가의 안내를 받아야 합니다.”

    무덤덤하게 관망하던 한립의 귓가에 섬섬의 조급한 전음이 들려왔다. 슬쩍 여인을 보니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상족 7계에 불과한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저까지 속이실 것 없습니다. 제가 수행이 낮아서 그렇지 소식에는 밝으니까요! 만고족 갑 선배님을 도와주시며 동급 수사 여럿을 그 자리에서 처리하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본 실력은 상족 9계 보다 높으시겠지요.”

    정족 여인이 입술을 깨물며 뜻밖의 말을 했다.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침묵하다 담담히 대꾸했다.

    “뒷조사를 철저히 했구나. 좋다, 천외마갑을 수리해야하니 한 번 도와주겠다.”

    “감사합니다.”

    그의 말을 들은 섬섬은 크게 기뻐했다.

    “정말 선택지가 그 둘 뿐입니까? 저는 왠지 세 번째 선택지가 있을 것 같은데요. 월 수사는 우리와 선약이 있어 당신들과 함께 동행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한립은 차분히 입을 열며 월종 앞을 막아섰다. 그가 나서자 궁장 여인과 말쑥한 청년이 눈을 크게 떴다. 월종도 놀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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