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960화 (717/2,000)
  • 960화. 기린(麒麟)

    *

    세 달 후, 밀실 안.

    한립은 등 뒤로 범성진마법상을 띄우고 두 손으로 수결을 맺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표정이 달라지며 금빛을 거두고 공법을 갈무리했다.

    소매 속으로 옥패처럼 생긴 물체가 반짝이며 날아들었다. 바로 만리부였다. 만리부를 확인한 한립은 눈을 반짝였다.

    “한번 다녀와야겠군.”

    그는 바로 일어나 밀실을 나섰다.

    몇 시진 후, 그는 영수 마차에서 내려 처음 가보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평범해 보이는 점포였다. 이상한 것은 점포가 문을 굳게 닫고 영업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쉭!

    한립은 개의치 않고 문 앞에서 법결을 날렸다. 법결이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자 곧 점포 문이 열렸다. 문 뒤에는 미간에 하얀 수정돌이 박힌 정족 여인 섬섬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님을 뵈옵니다. 이렇게 빨리 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섬섬이 웃음을 머금고 예를 올렸다.

    “하하, 너무 예를 차릴 것 없네. 수사의 소식을 받고 바로 오는 길일세.”

    “안으로 들어가셔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선배님께 소개시켜드릴 수사가 있습니다.”

    섬섬의 말에 한립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다시 점포 문을 닫고 진법 원반을 꺼냈다. 수결을 맺으며 주술을 외자 진법 원반에서 오색찬란한 기운이 퍼져 나왔다.

    오색찬란한 기운이 여인과 한립을 중심에 두고 휘몰아치다 오색 빛의 진법으로 바뀌었다. 다음 순간, 사방의 풍경이 모호해지고 한립은 개인 공간균열에 들어와 있었다.

    한립은 그곳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멀리서 그가 포권을 하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그는 화신 중기의 수사로 탄탄한 체격에 얼굴에 희미한 보라색 흉터가 여럿 있었다. 눈빛이 형형한 것이 용맹한 인상을 주었다.

    “내가 어찌 부르면 되겠나?”

    한립은 전송진에서 걸어 나오며 평온하게 물었다.

    “월종이라 합니다.”

    “월 형께서는 마금산맥에서 이름난 마수 사냥꾼입니다. 저희가 순조롭게 마금산맥 안으로 들어가려면 월 수사의 힘이 필요해 이렇게 모셨습니다.”

    섬섬은 한립을 향해 설명했다.

    “마수 사냥꾼? 마금산맥을 자주 드나들겠군.”

    “마금산맥에는 총 37번 다녀왔고, 그중에 7번은 산맥 깊은 곳까지 가 보았습니다.”

    월종이 얼굴의 흉터를 꿈틀거리며 공손히 답했다.

    ‘37번!’

    그 말을 들은 한립의 표정이 달라졌다. 한립은 섬섬과 마금산맥에 가기로 하고 그와 관련된 경전을 읽고 자료 조사를 했다.

    마금산맥은 섬섬이 말한 것 이상으로 위험한 곳이었다. 그곳에 들어가는 이들은 대부분 수행이 높고 담이 큰 자들이었지만 그들도 깊은 곳까지는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눈앞의 화신 중기 수사는 마금산맥을 수시로 드나들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섬섬이 나서서 다음 설명을 이어갔다.

    “이번에 선배님과 저는 산맥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입구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편입니다. 안전을 위해 비싼 값을 치르고 월 형을 안내자로 모셨지요!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월 형은 마기의 간섭을 받지 않고 강대한 마수(魔獸)의 위치를 미리 파악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답니다.”

    “과찬이십니다, 섬 선자! 저도 마금산맥에 들어가 본 지 오래라 내부가 어떻게 변했을지 알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산맥에 들어간 것이 백 년 전이니까요.”

    월종이 겸손히 고개를 저었다.

    “겨우 백 년 동안 큰 변화가 있으려고요! 월 형처럼 유명한 분이 안내를 해주시는 데다 저희는 외곽에만 머무를 것이니 그리 위험하지는 않겠지요?”

    “그건 섬 선자께서 모르셔서 하는 말씀입니다. 마금산맥이 위험한 것은 마수뿐만 아니라 거의 매일 변하는 지형과 세월이 흐를수록 쌓여 가는 마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날까지 텅 비어 있던 곳도 다음 날에는 마기의 영향으로 거산과 마수 소굴로 변해버리기도 하니까요.

    선자께서 산맥 외곽까지만 가면 된다고 하시고, 마침 저도 만년 취지(翠芝)의 영액이 필요하던 참이라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안 그랬으면 선자께서 아무리 높은 보수를 제시하셨어도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섬섬의 말에 월종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안심하세요, 절대 산맥 깊은 곳으로 들어갈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월 형보다 훨씬 담이 약하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미리 말씀드린 대로 저는 가는 도중 나타나는 마수를 제외하고는 어떤 일에도 끼어들지 않겠습니다. 그저 길 안내만 하는 것이지요.”

    월종이 표정을 풀며 거래 조건을 다시 확인했다.

    “그럼요. 만일 월 형께 다른 부탁이 있다면 그때는 따로 보수를 제시하겠습니다. 절대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고요.”

    정족 여인은 흔쾌히 답했지만 여지는 남겨두었다. 그녀의 말에 월종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립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월종을 살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마금산맥과 마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네. 경전의 기록을 보았을 뿐이지. 그래서 섬 선자가 수사를 청한 것이 반갑군! 그간 마금산맥에 대해 궁금하던 것을 물어도 되겠는가?”

    “무엇이든 하문하시면 아는 대로 답해드리겠습니다.”

    “고계 마수들은 당연히 지능이 높을 것이고 중, 저계 마수들의 경우 어떠한가? 보통의 영수들과 비교하면…….”

    한립은 바로 질문을 쏟아냈고, 월종은 질문을 듣자마자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옆에서 정족 여인이 귀를 기울이다 간혹 끼어들어 질문을 하거나 답하기도 했다.

    그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한립은 반 시진 만에 그가 원하던 모든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마지막 질문의 답까지 들은 한립이 흡족하게 웃었다.

    “섬 수사, 그래서 이번 일은 언제 출발할 예정인가?”

    “마금산맥이 운성에서 멀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달은 걸립니다. 선배님께서 괜찮으시면 3일 후에 출발하는 것이 어떨지요?”

    “그렇게 하지. 3일 후 동문(東門) 밖에서 만나세.”

    한립은 털을 쓰다듬으며 동의했고, 월종도 반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더 나눌 이야기가 없다면 나는 먼저 돌아가 준비를 하겠네.”

    “예, 제가 모시겠습니다.”

    섬섬이 공손히 답하고 다시 진법 원반을 꺼내들었다. 한립은 그렇게 정족 여인과 월종의 배웅을 받으며 빛의 진법 속으로 사라졌다.

    “섬 수사, 한 선배님은 정말 믿을만한 분입니까? 분명 고계 마수(魔修)라 들었는데 마공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그럽니다. 마금산맥에서의 경험으로, 제가 마기 감응에는 자신이 있는데요.”

    한립이 공간균열을 나가자마자 월종이 한숨을 돌리고 물었다.

    “그건 걱정마세요. 한 선배님이 고계 마수가 아니었다면 이번 일을 함께하자고 설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공을 익힌 고계 수사가 필요하지 않았다면 운성에 수많은 고계 상족들이 있는데 왜 지금까지 기다렸겠습니까.”

    섬섬은 자신 있게 장담했다.

    “그렇다면 한 선배님께서 마기를 숨기는 특수한 공법을 익히고 계신가봅니다. 그런데 이번 원행의 목적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반드시 고계 마수가 동행해야하는 일이라니요. 또한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마금산맥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한 선택입니다.

    3백 년에 한 번 산맥의 마기가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기간이라 이 기간 동안은 강대한 마수들도 외곽에 출몰할 수 있으니까요. 한 4, 5년만 더 기다렸다 들어가도 되지 않습니까?”

    월종이 침음하다 마음에 담아두던 이야기를 꺼냈다.

    “죄송하지만 저도 나름의 고충이 있어 자세한 이야기는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2년 내로 마금산맥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몇 백 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제가 만년 취지의 영액을 드리면서까지 월 형을 고용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안내자들은 마기가 폭발하는 기간에는 도울 수 없다고 하더군요. 믿을 수 있는 건 수사뿐입니다.”

    섬섬이 쓴웃음을 지으며 사정을 설명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한번 가보기는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선자가 원하는 곳까지 안전하게 안내할 자신은 7, 8할 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히 알아두셔야 합니다. 운이 나빠 강한 마수를 만나거나 예기치 못할 일이 발생하면 저는 즉시 마금산맥을 빠져나갈 것입니다. 만약 안내에 실패해도 약속하신 나머지 만년 취지 영액은 반드시 주셔야 합니다.”

    “당연하지요. 약속한 대로 전부 이행하겠습니다.”

    “그런데 마기 폭발에 대해서는 한 선배님께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월종이 눈을 가늘게 뜨고 여인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산맥에 들어가면 자연히 알게 될 일인데 미리 아시나 나중에 아시나 큰 차이는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정족 여인이 예쁘장한 눈을 깜빡이며 조금 뻔뻔스럽게 답했다.

    “하긴 미리 안다고 해도 딱히 대비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합니다. 마기가 폭발하는 시기라는 것을 알면 한 선배님께서 마금산맥에 들어가시지 않을 수도 있고요.”

    섬섬의 말에 월종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고, 섬섬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이후 월종도 정족 여인과 구체적인 사항을 논의한 후에 전송진을 통해 공간을 빠져나갔다.

    이제 공간 안에는 섬섬만 남았다.

    “…….”

    월종이 사라지자 정족 여인의 얼굴에는 웃음기기가 사라지며 서늘함이 감돌았다. 그녀의 소매 속에서 푸른빛이 반짝이고 주먹 크기의 작은 짐승이 나타났다.

    비늘로 뒤덮인 작은 짐승은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달리고 입안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가득했다.

    놀랍게도 짐승은 기린 진령과 똑같은 생김새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아주 흐릿해서 바람이라도 불면 사라질 것 같았다.

    “지금부터 2년간 개방되는 것이 확실하지? 괜히 날짜를 잘못 계산했다가는 위험만 무릅쓰고 빈손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고.”

    섬섬은 기린 환영을 응시했다.

    “아직도 나를 못 믿는 거야? 한번이라도 내 말이 틀린 적이 있었어? 내가 이전에도 유적을 알려줘서 네가 지금의 수행에 이를 수 있었던 거잖아. 정족인의 자질에 네가 수백 년 만에 지금의 수행에 이를 수 있었던 건 다 내 덕분이라고.”

    기린 환영이 나른하게 고개를 꺾으며 말했다.

    “당연히 믿을 수 있지! 태어날 때부터 공생관계인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네 혼백도 끝이라는 걸 알아. 하지만 넌 기린 진령의 한줄기 분혼(分魂)에 불과하니까 기억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잖아.”

    “그래, 난 기린 진령이 스스로 폭발해 남긴 십만 개의 분혼 중 하나지. 당시 강력한 적을 만나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는 살아날 길이 없었으니까! 역천의 비술을 펼쳐 원신을 10만 개로 나눈 이유가 뭐겠어? 다시 수행을 쌓을 기회를 얻기 위해서지. 그래서 중요한 정보는 각각의 분혼에 정확히 복제해놓았고, 진령의 혈(穴)에 대한 것도 그중 하나야. 걱정하지 마. 정보는 확실하니까.”

    “그래, 내가 지금의 경지에 이른 건 확실히 네가 복중에 있던 내게 깃들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원래는 내 원신을 없애고 이 몸을 차지하려던 걸 모를 줄 알아?”

    섬섬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직도 그 얘기야! 나도 운이 없지, 하필 네 몸에 깃들어서는. 다른 몸을 찾았다면 벌써 자유롭게 살고 있었을 거라고.”

    기린 환영은 기분이 확 상했는지 영기의 빛을 깜빡였다.

    “내가 태어날 때 마을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는 나밖에 없었어. 몸을 빼앗기 쉬울 거라고 생각해서 나를 선택한 거면서.”

    “간신히 달아나느라 힘을 거의 다 써버려서 어쩔 수 없었어. 진령급 의식이라도 겨우 10만분의 1인데 성인인 정족인의 몸을 빼앗을 수 있겠어?”

    섬섬이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기린 환영이 콧방귀를 뀌었다.

    “알겠어, 그때 일은 이제 됐고. 진령의 혈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니까. 절대 차질이 있어서는 안 돼. 그러지 말고 내가 수행의 고비를 넘길 때까지 몇 백 년만 기다려 보면 안 될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보다 수행이 높은 존재들을 데리고 마금산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안전하잖아.”

    “너희 정족인의 자질에 아무리 내가 지도를 해주고 단약을 제공해도 그렇게 빨리 경지를 높이는 건 무리야. 괜히 시간만 끌어봐야 네게도 좋지 않다고. 진령의 혈에 하필 부상을 당한 성족급 마수가 들어앉지만 않았으면 너 혼자서도 가볼 만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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