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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54화 (711/2,000)
  • 954화. 감정

    *

    “명석하구만! 우리가 광한계의 물건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을 단숨에 유추하다니. 려 수사는 걱정할 것 없네. 우리의 지위면 자네가 천운13족의 일원이 아니라도 광한계로 들여 보내줄 수 있으니까. 이렇게 엄청난 기연을 선사했으니 작은 부탁은 해도 되겠지?”

    의외라는 눈빛이 스쳤지만 정족 미부인은 부인하지 않았다. 한립은 어색한 얼굴로 곰곰이 생각을 하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아직 수련의 고비에 이르지 못해 광한계로 들어가도 막대한 혜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게다가 저는 이미 광한계로 들어가기로 되어 있으니 선배님들의 도움이 필요 없고요.”

    “광한계로 들어가기로 되어 있다고? 그럴 리가! 환술로 진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우리 13족 인물은 분명 아닐 터. 외부인이 어찌 천운에서 광한계로 들어갈 자격을 얻었단 말인가.”

    단천인이 의혹을 드러냈다.

    “단 형,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마십시오. 최근에 외부인 중 한 명이 광한계로 들어갈 자격을 얻은 것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자네를 ‘려 수사’가 아니라 ‘한 수사’라 불러야 맞겠군.”

    정족 미부인도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들의 말에 한립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술로 용모를 바꾸었는데도 눈앞의 두 명을 속일 수는 없었다. 다행이라면 단천인의 어투로 보아 진짜 얼굴을 확인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한 가라고요? 그렇다면 저도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외부인이 1년 전 광한령을 발동해 광한계로 들어가는 대가로 초대형 진법을 이용하기로 했다지요.”

    “맞습니다. 보아하니 그 소문의 주인공이 눈앞의 려 수사 같군요.”

    정족 미부인이 침묵하는 한립을 보며 미소 지었다.

    “허허, 어차피 광한계로 들어갈 예정이었다면 잘 됐습니다. 우리가 따로 손을 쓸 필요도 없으니까요.”

    단천인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했다.

    “선배님들께서 무엇을 도모하시는지는 모르나, 제가 귀 종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어 광한계로 들어가면 시간이 날지 모르겠습니다.”

    “아, 재료 수집 말인가? 그건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으니 마음 놓게. 정 안되면 일단 우리 일을 우선으로 처리해 주면 되고! 약속한 재료를 모아오지 못하더라도 내가 본 족에 잘 말해줄 테니까. 그럼 누가 자네를 탓할 수 있겠는가?”

    “어차피 광한계로 들어갈 예정이라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이야기해 줄 수 있겠네요. 단 형, 한 수사에게 설명해 주시죠.”

    정족 미부인이 끼어들었다.

    “선자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면 말해 줘도 됩니다. 저는 이의 없습니다.”

    “사실 아주 간단한 일이라네! 우리는 한 수사가 원자체를 지닌 다른 두 명과 힘을 합쳐 광한계의 금제 중 한 곳을 열고 몇 가지 물건을 가져다주었으면 하네. 그 물건에 나와 단 형이 대천겁에서 살아남느냐 마느냐가 걸려 있거든. 이번 일만 성공한다면 우리는 목숨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

    단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미부인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대천겁!’

    그 순간 한립은 명하의 땅에 숨어서 나오지 않던 청원자를 떠올렸다. 수행이 하늘을 찌를 듯해도 대천겁의 위협에는 어쩔 수 없었다. 진선계로 이르지 못하면 끝나지 않을 일이었다.

    한립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금제는 내가 광한계에서 성족의 경지에 오르면서 발견한 것이네. 당시 금제를 열지는 못했지만 우연히 금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지. 그 안의 물건들은 상족인 수사에게는 계륵이지만 성족 수사들에게는 천겁을 이겨내게 해주는 목숨이 달린 물건들일세.”

    “광한계 속의 금제라면 선인이 남긴 것이 아닙니까? 이전에 광한계로 들어갔던 수사들 중 적잖은 수가 금제 때문에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선배님께서는 이 일이 성공할 것이라 확신하십니까?”

    한립이 신중히 물었다.

    “내 수행은 다른 성족에 비해 떨어지지만 금제와 진법에서는 천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자부하네. 금제는 오랜 세월이 흘러 위력이 거의 소실되어 있더군. 그렇지 않았다면 오랜 시간을 들여 이런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을 것이네. 수사는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인가?”

    미부인이 의미심장하게 한립을 응시했다.

    “아니요,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믿지 못한다 해도 탓할 생각은 없네. 나는 비록 여인이지만 속이 좁은 사람은 아니니까 말이야. 우리는 천 년 동안 공을 들여 원자체를 지닌 이들이 금제를 풀 수 있도록 방법을 생각해 두었네. 최소한 7, 8할의 확신은 있다고 해두지.

    원자체를 지닌 다른 이들은 줄곧 운성에 머물고 있지. 한 명은 선천적으로 원자체를 타고난 산수로 지금은 우리 정족에서 객경을 맡고 있지.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단 형께서 후천적으로 바꿔놓았네. 이제 한 수사까지 더해졌으니 금제는 반드시 깰 수 있을 것이네.”

    정족 미부인이 자신감을 드러냈다.

    “단 선배님께서 후천적 원자체를 만들어내실 수 있는데 어째서 지금까지 기다리신 것입니까?”

    “그건 수사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원자석 자체가 아주 희귀한 데다 아무나 쉽게 몸에 흡수할 수 없지. 당시 단 형이 겨우 재료를 모아 동시에 6, 7명에게 시도해보았지만 성공한 자는 단 한 명뿐이었네. 다시 시도를 하려 했지만 재료를 모을 길이 막막했고 말이야. 우리는 그저 수사가 광한계로 들어가 다른 두 명을 도와주길 바라고 있네. 큰 위험을 무릅쓰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야.”

    미부인은 진지하게 그 이유를 말했다.

    “제게 선택권은 없는 듯합니다.”

    침음하던 한립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건 그렇지!”

    단천인이 술병을 비우고 한립을 힐끗 쳐다보며 차갑게 웃었다.

    “말씀하신대로 간단한 일이라면 도와드릴 수 있지만 광한계 자체가 위험하고 선인이 남겨 놓았을지 모를 금제가 허다하지요. 선배님께서는 제가 살아 돌아올 수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세상천지에 10할의 가능성이라는 것은 원래 없네. 내가 확신한다고 하면 수사가 믿겠는가?”

    미부인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답했다.

    “기왕 선배님께서도 불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하셨으니 제가 위험을 무릅쓰는 대신 두 가지 조건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한립은 차분히 준비한 말을 꺼냈다.

    “조건이라? 말해보게! 이번 일만 성공하면 안 그래도 후한 보상을 하려 했으니.”

    그의 말에 미부인이 한결 편한 얼굴로 미소를 머금었다. 무엇이든 문제없다는 태도였다.

    “제 조건은 간단합니다. 첫 번째는 광한계에서 나와 제가 전송진을 빌려 쓰려 한다는 것은 이미 아시지요? 그런데 전송에 드는 영석의 수량이 엄청나 저 혼자서는 감당이 되지 않습니다.”

    한립은 또박또박 조건을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초대형 전송진을 발동하는데 드는 극품영석의 수는 확실히 엄청나지. 그럼 이렇게 하세. 내가 그중 절반을 내주겠네. 만족하는가?”

    미부인은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승낙했다. 그 정도 영석은 별것 아니라는 말투였다. 여인이 흔쾌히 허락하자 한립은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두 번째 조건은 광한계에서 금제를 파한 후 두 분이 말씀하신 물건 이외의 것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것도 그렇게 하게! 우리가 필요한 것은 부탁한 물건들이지 무슨 보물이나 영약이 아니니까 말이야.”

    미부인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단천인과 상의도 없이 곧바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슬쩍 단천인을 보았지만 그 역시 반대의사를 표하지 않았다.

    “저도 탐욕을 부리는 편은 아니라 이 두 가지면 충분합니다. 광한계로 들어가면 두 선배님을 위해 힘을 보태겠습니다.”

    한립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부인과 단천인을 향해 포권을 했다.

    “잘 생각했네! 한 수사가 도와준다니 이번 일이 꼭 성공할 거란 예감이 드는군. 구체적인 것은 광한계가 열리기 전에 자세히 설명해 주겠네. 그리고 이번 일은 바깥에 새어나가지 않게 조심하게.”

    미부인은 밝게 미소를 머금고 마지막으로 당부를 잊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선배님. 다른 용건이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만 물러가 보게. 그동안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언제든 나나 단 형의 이름을 말하게. 그럼 웬만한 성가신 일들은 전부 해결될 것이야. 아, 아직 한 수사는 내 이름을 모르겠지. 나는 채류앵이라 한다네. 비설 부인이라 칭해도 되고.”

    미부인이 온화하게 웃음 지었다.

    * * *

    한립이 순향각을 걸어 나왔을 때는 이미 많은 이들이 건너편 경매소로 들어가고 있었다. 경매 시작이 임박한 듯했다. 이에 한립도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정문의 양쪽 쪽문은 훨씬 넓었고 지키고 선 경비들의 수도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경비들은 오직 질서를 유지시킬 뿐 검문을 하지는 않았다.

    한립은 다른 이들과 섞여 안으로 들어갔고, 대문을 지나자 눈앞이 환해지며 몇 개의 통로가 나타났다.

    통로 위쪽에는 감정, 전당(典當), 대전 등의 간단한 고대문자가 적혀 있었는데 각각의 통로 옆에는 하인으로 보이는 소년들이 보였다.

    통로를 살피던 한립은 조금 의아했으나 오래 고민하지 않고 그중 하나로 다가갔다.

    “감정? 이게 무슨 뜻이지?”

    “이곳은 경매소에서 물건을 감정하는 곳입니다. 선배님께서 진귀한 물품을 지니고 계신다면 이곳에서 감정을 받으신 후 경매에 출품하실 수 있으십니다.”

    잘생긴 소년이 공손히 답했다.

    “오, 그렇구만.”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채류앵이 전송에 필요한 영석의 절반을 준비해 주기로 약조했지만 남은 절반도 만만치 않은 수량이었다. 그래서 원래 계획대로 지니고 있던 물건들을 경매소에 풀기로 결정한 것이다.

    통로는 그리 길지 않아 모퉁이를 꺾자 새빨간 문 앞에 도착했다.

    문은 활짝 열려 있는 대신 푸른 보호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보호막 앞에는 7, 8명의 이족 수도자들이 한 줄로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밀려있다고?’

    의외였지만 그는 조용히 줄의 맨 뒤로 가서 섰다. 곧 보호막이 반짝이고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이족인이 웃으며 걸어 나왔다. 안에서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족인이 나가자 다음 이족인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일다경이 흐르자 한립 앞에 서 있던 이들이 전부 빠지고 그의 차례가 돌아왔다.

    보호막을 지나자 널따란 공간이 드러났다. 벽에는 주술문자가 가득 차 있어 남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고, 탁자와 세 개의 나무 의자, 구석에 간단한 전송진법이 전부였다.

    의자에는 누군가 앉아 있었는데 영기의 빛으로 가려놓아 얼굴은 물론이고 체형까지 보이지 않았다. 한립은 의식으로 그들을 살펴보았다.

    의자에 앉은 이들은 무슨 보물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의식으로도 전혀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히 수행이 얼마나 깊은지도 알 도리가 없었다.

    “경매에 출품하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저희가 살펴볼 수 있게 내놓으시면 됩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4족 경매회는 최상의 재료와 보물만 취급하기에 급이 떨어지는 물건은 따로 편전으로 가 매매를 하셔야 합니다. 만일 저희의 감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의를 제기하셔도 됩니다. 그럼 지금부터 감정을 진행하겠습니다.”

    중간에 앉은 인물이 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젊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알겠습니다. 설명 고맙습니다.”

    한립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소매 속에서 비취색 옥병과 새하얀 옥함을 날려 보냈다. 그러자 말이 없던 두 인물이 손을 뻗어 각각 옥병과 옥갑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비취색 옥병을 열자 짙은 약초 향이 물씬 풍겼고 희미하게 용울음 소리가 울리며 초록빛이 튀어나왔다.

    “흠!”

    옥병을 든 자가 서둘러 병을 봉하고 한쪽 소매에서 하얀빛을 내뿜어 초록빛을 회수했다. 그러자 초록빛 속에 푸른색 단약이 보였다.

    단약은 매끄러운 표면에 정교하게 은색 용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반 척 길이의 비취색 대나무가 들어있었다.

    꽈광!

    그가 가만히 대나무를 살피다 손끝을 대자 천둥소리가 들리고 손가락 굵기의 금색 뇌전이 튀었다.

    “이건 금뢰죽!”

    “금뢰죽이요? 확실한지 자세히 살펴보셔야 합니다.”

    감정하던 이가 놀라 소리치자 옆에 있던 여인도 놀라 당부했다.

    “안심하십시오. 세밀하게 감정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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