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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53화 (710/2,000)
  • 953화. 원자체(元磁體)

    *

    잠시 후 한립은 누각 3층의 금빛 보호막으로 둘러싸인 방 앞에 도착했다.

    정족 청년은 걸음을 멈추고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방문을 가리켰다. 그는 은색빛을 뿜고서 공손히 옆으로 물러났다.

    안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으면 어서 들어오시게.”

    한립의 얼굴에 의혹이 스쳤다. 목소리는 여인의 것이었다. 그때 금빛이 반짝이고 방문이 천천히 열렸다. 한립은 짧게 숨을 내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히고 금제가 발동되었다.

    “선배님들을 뵙습니다.”

    한립은 침착한 태도로 포권을 했다.

    열댓 장 너비의 방에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명의 수사가 앉아 있었다. 한 명은 단천인이고 다른 한 명은 젊은 합체 초기의 정족 미부인이었다.

    “려 수사, 그리 예의 차릴 것 없으니 자리에 앉게.”

    미부인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단천인은 탁자에 놓은 술을 마시느라 한립을 힐끔 보기만 했다.

    술병 안의 영주(靈酒)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립처럼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도 그 진한 향기에 마음이 동할 정도였다.

    한립은 미부인의 말에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때 미부인은 맑은 눈으로 그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녀도 한립의 한쪽 소맷자락에 눈길이 머물렀다.

    단천인이 무언가 이야기해준 것이 틀림없었다. 한립은 속으로 상당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여겼다. 안 그래도 정족은 명석하기로 유명한데 합체기의 정족 고계 수사라니!

    그녀를 속여 넘기기는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이제 올 사람도 왔고, 해야 할 이야기도 해드렸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전부 채 선자에게 맡기지요. 나중에 제 몫만 크게 챙겨주시면 됩니다.”

    단천인이 드디어 술병을 깨끗이 비우더니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급할 것 없지 않습니까. 수사의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사실인지는 확인을 해보아야겠지요.”

    “마음대로 하십시오. 노부가 직접 확인한 바로는 물건은 확실하니까요. 아, 선자의 구향영주(九香靈酒)가 나날이 향이 깊어집니다. 한 병만 더 내어주시죠.”

    “단 형, 순향각을 무엇으로 보시는 것입니까. 구향영주는 백 년에 많아야 열 동이를 빚을 수 있는데 벌써 오늘만 세 병을 비우셨습니다. 다음번에 오시면 어쩔 수 없이 평범한 영주로 대접해야겠어요.”

    채 씨 미부인은 단천인을 흘겨보았지만 결국에는 영기의 빛을 반짝이며 비취색 술동이를 불러내 직접 단천인의 술병을 채워주었다.

    “허허, 이게 다 운성에서 이 술을 빚을 수 있는 사람이 선자 한 명이라 그런 것 아닙니까. 제가 얼마나 여러 번 비결을 알려달라고 청했습니까. 선자께서는 술도 즐기지 않으면서 운성 제일의 영주로 불리는 구향영주 비법을 독점하시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단천인이 술병이 채워지자 다시 벌컥벌컥 마시며 희희낙락했다.

    “운성 제일의 영주라는 것은 몇몇 수사 분들의 과찬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제가 속이 좁아 비법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가 익힌 공법과 관련이 있어 알려드려도 수사께서는 구향영주를 빚을 수 없다니까요.”

    미부인이 고운 손으로 입을 가리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단천인은 꿀꺽꿀꺽 술을 삼키느라 더는 답하지 않았다.

    그때 미부인이 다른 손을 뒤집어 금색 술잔을 꺼냈고 술동이를 기울여 영주를 가득 부어 한립에게 밀어주었다. 술잔이 초록빛에 둘러싸여 천천히 다가왔다.

    “려 수사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순향각과 인연이 있다는 것이겠지. 괜찮으면 구향영주 맛을 좀 보게.”

    “감사합니다, 선배님!”

    한립은 바로 술잔을 털어 넣지 않고 금색 잔을 응시했다.

    구향영주는 투명하고 점성이 있는 액체로 분홍빛을 띠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술에서 풍기는 향기가 순간순간 변해 굉장히 신기했다.

    “이 영주는 향기만 좋은 것이 아니라 마시고 나면 눈이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지지. 한 모금마다 한 달 가량의 수행을 절약할 수 있다네.”

    “이런 신묘한 영주를 맛보다니 제가 복이 많습니다.”

    한립은 술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거침없이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넘겼다.

    구향영주는 얼음물을 마신 것처럼 청량하다가 곧 얼음이 녹아내리듯 온화한 기운이 감돌았다. 목 넘김이 부드럽고 짙은 향기가 정말 대단했다. 일부러 삼킬 필요 없이 술이 저절로 목을 타고 넘어갔다.

    한립은 단전에 열이 오르고 뜨거운 기운이 경맥을 따라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주 상쾌하고 편안했다.

    “과연 신묘합니다. 이렇게 좋은 영주는 생전 처음 마셔 봅니다.”

    눈을 감고 술을 음미하던 그가 진심을 담아 찬사했다.

    “허허, 구향영주가 그리 신묘하지 않았다면 내가 눈이 빠지게 이곳에서 술을 마실 날만을 고대하겠는가!”

    단천인이 입이 찢어질 듯 웃었다.

    “내 영주를 칭찬해주시니 기분이 좋군. 하지만 려 수사를 청한 것은 단지 술 때문이 아니라네.”

    “저도 두 선배님들께서 저를 이곳으로 부르신 이유가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어떤 용무가 있으신 것입니까?”

    “려 수사도 궁금하다니 돌려 말하지 않겠네. 수사의 소매를 걷어 내가 손바닥을 살펴보게 해주겠는가?”

    미부인이 그를 바라보며 묘한 눈빛을 보냈다.

    “손바닥을요?”

    한립은 겉으로는 놀란 얼굴을 했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크게 안심했다. 상대가 현천의 보물을 알아챈 것이 아니라면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네. 이쪽 손만 확인하면 되네.”

    정족 미부인이 손가락을 들어 한쪽 팔을 가리켰다.

    “……알겠습니다. 그러시지요.”

    한립은 한참 뜸을 들이다 예의상 미소를 띠우고 답했다. 그리고 소매를 털어 손바닥을 드러냈다. 겉보기에는 살결이 희고 깨끗한 것을 제외하면 이상한 점은 없었다.

    갑자기 미부인의 양미간 사이에서 정족 특유의 수정돌이 번득였다. 은색빛이 엄청난 속도로 밖으로 쏘아져 나와 한립의 팔로 향했다. 온화하게 생긴 것과 달리 손속이 매서워서 내색도 없이 바로 손을 쓴 것이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한립은 어쩔 수 없이 손을 펼쳐 은색빛을 잡아채려 했다.

    채챙!

    은빛이 손바닥에서 금속성의 충돌음을 냈다. 한립은 주먹을 펴고 은색 바늘을 확인했다. 영기의 빛이 반짝이는 것이 영성이 충만해 보였다.

    그때 한립의 손이 새까맣게 윤이 났고 손등에 은빛의 작은 산 문양이 나타났다. 바로 원자신산이었다. 백맥련보결로 완전히 손에 융합해 정족 미부인의 은색 바늘로도 손상을 입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립은 득의양양해 하기 보다는 난색을 표했고, 정족 미부인은 검은 손바닥을 주시하며 흥분을 드러냈다. 단천인도 희색을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말 후천적 원자체(元磁體)입니다. 이렇게 되면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겠어요.”

    미부인이 반갑게 중얼거리고 손짓했다. 즉시 한립 수중의 있던 은색 바늘은 다시 그녀 미간의 수정돌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원자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원자체는 원자신광을 펼칠 수 있는 몸을 뜻하네! 수사가 원자의 보물을 스스로의 몸에 융합했으니 후천적 원자체라는 것이지. 보물을 몸에 융합시키는 공법이라니 단 수사의 흡금화옥공(吸金化玉功)와 비슷하군. 단 형의 경우 몸에 보물이 아니라 진귀한 연기 재료를 융합하는 것이지만.”

    미부인은 기분이 좋아져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한립은 입을 열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에게 할 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그의 예상대로 미부인은 붉은 입술을 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십중팔구 원자체가 맞다고 생각하나, 려 수사가 직접 원자신광을 방출해 보여주었으면 좋겠네. 거절하지는 않겠지?”

    그녀의 말에 한립은 곧바로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회색 기운이 떠올라 그를 보호했다. 그것을 본 미부인은 눈을 반짝이고 두 손을 교차해 한립을 향해 펼쳤다.

    슈슉!

    불덩이들이 쇄도했다. 처음에는 주먹 크기였던 불덩이들은 도중에 머리통 만하게 커져 위세가 대단했다. 그러나 한립은 피하지 않고 불덩이와 회색 보호막이 충돌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회색빛이 흐르고 둔탁한 소리가 울리더니 불덩이들은 원자신광 속에서 빙글빙글 돌다 사라졌다. 제대로 된 위력을 방출하지 못한 것이다.

    “원자신광이 오행의 힘을 억제하는 것은 언제 봐도 신기합니다. 수사가 수월하게 다루는 것을 보니, 원자신광을 이미 극성으로 익혔군요. 선천적 원자체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겠어요. 단 형께서는 어찌 보시는지요?”

    “단 수사, 혹시 다시 확인해 보려 하십니까?”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단천인이 한 손으로 허공을 쥐었다. 그의 손끝에서 커다란 주술 문자들이 번득이고 회색빛이 한립을 향해 밀려나왔다.

    ‘원자신광!’

    한립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회색빛을 보고 한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눈앞의 회색 기운이 크게 빛을 발하며 앞으로 나섰다.

    츠츠츳.

    두 종류의 회색 기운이 충돌해 기묘한 소리를 냈다. 분명 단천인의 원자신광이 조금 더 진하고 두꺼웠지만 뭔가 불안정해 보였다. 자유자재로 다루는 느낌은 아니었다.

    한립은 잠시 고민하다 새까만 손으로 회색빛을 가리키자 커다란 빛구슬로 변해 회전했다. 그런데 단천인이 방출한 회색 기운이 거대한 소용돌이에 빨려가듯 빛구슬 속으로 끌려가 사라지고 있었다.

    “더 이상 시험할 것도 없군요! 려 수사는 후천적 원자체지만 원자석(元磁石) 을 몸에 융합한 단 형보다 원자신광을 부리는 솜씨가 훨씬 더 훌륭합니다. 선천적 원자체와도 구별할 수 없겠어요.”

    정족 미부인이 미소 지었다.

    “흥, 제 원자신광은 법력을 이용해 강제로 원자석의 힘을 끌어 쓴 것에 불과합니다. 원자신광이라는 신통을 부렸다고 할 수 없지요. 어찌되었든 려 수사의 보물을 융합하는 비술이 신묘하기는 합니다.”

    단천인이 볼멘소리를 하다가 마지막에는 신기하다는 듯 한립을 보았다.

    “그래도 수사께서 대량의 원자석을 몸에 융합하고 계신 것은 행운이지요. 그렇지 않았으면 려 수사의 원자를 감응할 수 있었겠습니까.”

    정족 미부인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한립으로서는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대화였다.

    그때 단천인이 한 손을 거두고 방출한 원자신광과 연계를 끊은 후 태연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것을 본 한립은 수결을 맺어 회색 기운을 회수하고 입을 열었다.

    “선배님들께서 원자신광을 중요시 하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물론 그렇다네. 사실대로 말하면 나와 단 형은 원자신광 신통을 지닌 인물을 수천 년 동안 찾아 왔네! 충분한 인원이 모이지 않아 어느 정도 포기 하고 있었는데 자네가 나타난 것이야.”

    미부인이 맑은 눈을 반짝였다.

    “충분한 인원이요? 설마 선배님들께서는 원자체를 지닌 다른 수사들도 찾아내셨다는 말씀입니까?”

    한립의 표정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그렇다네. 어쨌든 조만간 수사도 알 일이니 분명히 이야기하지. 우리는 원자신광을 익힌 수사들에게 한 가지 일을 부탁하려고 하네. 원자신광을 익힌 자만이 성공할 수 있는 일이지만 홀로는 할 수 없는 일이지. 자네는 우리가 수천 년 만에 만난 세 번째 원자체를 지닌 수사라네.

    원자신광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공법 비술은 아니지만, 극히 드문 신통임에는 틀림없다네. 그래서 제때 인원을 다 모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지. 헌데 지금 보니 우리의 운이 다하지 않았구만 그래.”

    미부인이 빙긋 웃으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선배님들의 뜻은 알아들었습니다. 제가 어떤 일을 도와드리면 되겠는지요.”

    “중대한 사안이라 단 형과 상의한 후 세부사항을 말해주겠네. 분명한 것은 짧으면 몇 년 내로 수사가 필요할 수도 있고 길면 백 년 정도 기다려야하지.”

    “예?”

    그 말을 들은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두 분께서 말씀하시는 일이 혹시 광한계와 관련이 있는지요?”

    침묵하던 한립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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