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2화. 괴인(怪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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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 후, 아무런 수확을 건지지 못한 한립은 과감히 몸을 돌려 원래 들어왔던 입구로 향했다. 우연인지 아닌지 다시 입구로 들어갔을 때는 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통로를 지나던 한립은 소매를 털어 검은 손수건을 꺼냈다.
펑!
그러자 검은 안개가 그를 뒤덮었고 빛이 반짝이며 새까만 장포로 변해 그의 몸에 입혀졌다. 한립은 고개를 숙이고 몸을 확인하자 기운이 있는 듯 없는 듯 극히 옅어져 있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창백한 인상의 낯선 얼굴로 변해 있었다. 한립은 복장과 용모를 바꾸고 태연히 입구를 걸어 나오며 이족인들을 스쳐지나갔다.
입구를 지키는 남색 장포 병사들도 그를 보았을 뿐 신경 쓰지 않았다. 한립은 당당하게 또 다른 편전으로 향했다.
잠시 후, 똑같이 널따란 광장이 나타났는데 그곳은 물건을 팔던 곳과는 달리 수사들이 전부 광장에 몰려 있었다.
그곳에는 열댓 장 높이의 청석 벽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고 표면에 은색 문자가 반짝였다. 이족인들은 신중한 얼굴로 석벽을 올려다보며 고심하고 있었다.
석벽 뒤쪽으로는 열댓 개의 방들이 새빨간 누각을 둘러싸고 모여 있었다. 새하얀 방들의 문은 하얀빛으로 반짝였고 빛의 장막이 드리워 있었고, 새빨간 누각은 희미한 푸른 연기로 둘러싸여 기이한 향기를 풍겼다.
석벽을 보던 수사들은 수시로 새하얀 방들로 향했는데 나올 때는 표정이 가지각색이었다. 상심한 자들도 있었고 흥분해 걸어 나오는 자도 있었다.
한립은 수사들을 자세히 살펴보다 석벽 중 하나로 걸어갔다. 그런데 그때 호리호리한 인영이 몸을 돌려 같은 방향으로 걸어왔다. 한립은 무의식중에 그쪽을 바라보다 흠칫 놀라고 말았다.
“……!”
그의 얼굴은 숨길 수 없는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새까만 머리를 늘어뜨린 수려한 외모의 여인은 남색 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표정이 굉장히 냉랭했다.
그녀는 한립의 표정을 눈치 채지 못하고 그대로 석벽으로 다가가 미간을 좁히고 섰다.
‘그녀일리 없어. 말도 안 돼, 세상에 이렇게 닮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한립은 우두커니 서서 남색 장포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여인도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한립과 시선이 마주쳤다.
여인은 빤히 자신을 쳐다보는 한립의 모습에 기분 나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의식으로 그를 훑고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한립에게서 어떤 영기의 파동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안해진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고, 한립은 그녀의 행동에 겨우 표정을 수습하며 생각에 잠겼다.
남색 장포 여인은 그의 가슴 속에 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진교천!’
오래 전 그를 향해 미소 짓던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과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올라 마음을 흔들었다. 남색 장포 여인의 외모가 인계에서 목숨을 잃은 진교천과 너무 닮아 있었다.
냉랭한 표정을 제외하면 그녀가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들었을 때는 겉으로는 담담했지만 알 수 없는 허탈함과 묘한 감정을 느꼈었다.
애정은 아니었지만 사내로서 자신을 좋아해주던 여인을 쉽게 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진교천이 죽었다 살아났을 리도 영계로 환생했을 리도 없었다. 아무리 닮았다고 해도 그저 낯선 이족 여인에 불과했다.
한립은 빠르게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원래 계획대로 석벽 앞으로 걸어갔다. 남색 장포 여인은 뒤쪽에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는 인상을 찡그린 채 자리를 떠났다.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그녀가 서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섰다. 굳이 직접 보지 않고도 뒤에서 남색 장포 여인이 그를 사납게 흘기고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십중팔구 그를 여색이나 탐하는 파렴치한쯤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한립은 속으로 피식 웃고는 눈앞의 석벽에 집중했다. 은색 문자들은 예상대로 각종 재료와 보물들의 이름이었다.
이상한 점은 물건의 가격은 명시되어 있지 않고 뒤쪽에 1에서부터 13까지 숫자만 적혀 있다는 것이었다.
한립은 문뜩 먼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 멀리 새빨간 누각을 둘러싼 옥으로 된 방이 딱 13채였다. 그리고 각각의 지붕에 금빛 숫자가 반짝이며 떠올라 있었다.
그제야 한립은 석벽에 쓰인 내용을 이해했다. 그는 차분히 석벽을 훑고는 다음 석벽으로 걸어갔다. 순식간에 대부분의 석벽을 살필 수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기만 했다.
쿠르릉.
그런데 그때 새빨간 누각에서 굉음이 울리고 분노에 찬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뭐라고요! 송 노괴 당신, 지금 이게 가짜라고 했습니까? 그럴 리가 없어요. 얼마나 어렵게 구한 물건인데. 금시거인(金翅巨人)들 틈에서 죽을 뻔하며 얻은 거란 말입니다.”
“소란을 피운다고 가짜가 진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진짜라면 제가 구매를 거절할 리 있겠습니까? 감정을 마쳤으니 단 수사께서는 자리를 비워주시지요.”
“이 몸이 이 따위 물건을 위해 동부에서 7, 8년을 누워 지냈다니! 내게 거짓 정보를 넘긴 놈을 만나면 목을 비틀어 버릴 게야!”
그는 화를 참지 못해 영력까지 싣는 바람에 모든 사람들의 귀에 똑똑히 울려 퍼졌다.
그러나 대부분이 운성 현지인이 아니라 그저 서로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붉은 누각에서 붉은빛이 반짝이고 거대한 인영이 튀어나와 바닥에 착지했다.
쿵!
그의 착지에 주변이 크게 울렸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그를 보며 깜짝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붉은빛 속에서 나타난 사람은 머리 아래 부분이 절반은 살이고 절반은 금속이었다.
그의 코와 두 눈은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컸고 머리는 위로 갈수록 뾰족해져 녹색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자라있었다.
한립은 의식으로 괴인을 훑고는 표정이 급변했다. 그가 가늠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천기자와 마찬가지로 합체 최고봉에 이른 것 같았다. 물론 한립이 괴인의 정체를 모른다고 다른 이족인들이 전부 모를 리 없었다.
괴인이 나타난 순간 군중 속에서 열댓 명이 뛰어나와 공손히 예를 올렸다.
“단 장로님을 뵙습니다.”
“셋째 장로님을 뵈옵니다.”
그가 나타나자 수사들이 분분히 인사를 올렸다. 그들은 몸집이 크고 강철처럼 단단한 석충족 수사들이었다. 괴인은 석충족에서 이름 높은 장로였던 것이다.
“오, 너희도 경매에 참석하러 왔구나. 기대했던 물건을 얻어가길 바라마. 나는 모조품에 농락당해 참가할 기분이 사라졌다.”
괴인은 수사들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경외감 어린 시선으로 길을 터주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는 한립 쪽으로 다가왔다.
그것을 본 한립도 조용히 뒤로 물러나 괴인이 지나갈 수 있게 공간을 내주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가슴이 철렁한 일이 벌어졌다.
“흐음?”
괴인이 지나가다 말고 큰 코를 찡긋거리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정확히 한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괴이한 일에 주변 수사들이 어안이 벙벙해 한립에게서 떨어졌다.
“선배님, 제게 분부가 있으신지요?”
“자네 이름은 무엇이고 어느 일족이지?”
뜬금없는 그의 물음에 한립은 본명을 숨기고 려 수사라고 대충 신분을 꾸며댔다.
“좋았어! 나는 석충족 단천인일세. 앞으로 천운에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 이름을 대면 될 것이야.”
그는 한립의 대답을 듣다 말고 신형이 흐릿해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한립의 표정이 급변했다.
괴인이 흐릿해진 순간 분명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는 것을 느꼈는데 상대의 손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서도 너무 빨라 미처 피하지 못했다. 괴인의 손바닥에서 괴이한 영력이 흘러나와 그의 어깨를 맴돌다 흩어졌다.
“선배님, 왜 이러시는지요?”
한립의 안색이 조금 파랗게 질렸다.
조금 전 괴인이 한립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건드린 것을 본 이족인은 다 해봐야 열댓 명이 넘지 않았다. 대다수는 한립의 갑작스런 언사가 이상하게 들렸을 것이다.
괴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훑으며 웃음을 흘렸다.
“수사가 연체술을 익힌 것 같아 노부가 관심이 가서 말이네. 기회가 된다면 우리 려 수사와 관련 공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군!”
괴인의 눈빛이 얼굴을 스친 순간 한립은 희미하게 고통을 느꼈다. 환술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는데 상대가 수행차이가 너무 나 통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뜬금없이 무슨 공법을 교류하자니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어깨는 왜 건드린 거지?’
한립은 어두운 얼굴로 기억을 더듬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괴인과는 처음 보는 사이였다.
“녀석아, 이상한 생각 말고 이따가 건너편 순향각(醇香閣)으로 오거라. 몰래 달아날 궁리는 말고! 조금 전 몇 시진 동안은 위치를 추적할 수 있게 손을 써두었다.”
귓가에 괴인의 전음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는 아무 설명 없이 웃음을 터트리며 그대로 몸을 돌려 광장을 빠져나갔다.
괴인이 사라지자 한립은 마음이 불안해서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는 주위의 시선을 느끼고는 바로 몸을 돌려 입구로 걸어갔다.
그는 정체를 감추고 조용히 영약을 처분해 영석을 모으려 했다. 하지만 괴인 때문에 모두 자신을 주시하느라 은밀한 거래하기가 어려워졌다.
한립은 바로 계획을 취소하고, 태연한 얼굴로 편전을 나와 마차들이 모여 있는 공터 너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올 때는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던 ‘순향각’이 눈에 들어왔다.
3층으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경매소 맞은편에 위치했고 웅장한 필체를 담은 현판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 주변 건물들과 달리 누각의 입구는 적막했다.
단천인이라는 괴인이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꺼려지기는 했지만 경매가 시작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고, 게다가 석충족 괴인이 접근한 의도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경매에 집중할 수 없을 것이다.
한립은 갑자기 소매를 펄럭여 한쪽 손을 드러냈다. 먹처럼 새까만 피부는 원자신산이 융합된 손이었다.
단천인이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영목신통으로 상대의 시선이 이쪽 소매로 향하는 것이 감지되었다. 다만 상대가 관심을 가지는 것이 손바닥인지 아니면 팔 전체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전자라면 원자신산에 흥미를 느끼는 것일 테고, 후자라면…….’
한립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팔뚝을 생각하자 자기도 모르게 다른 손으로 소매에 감춰진 팔을 쓰다듬고 있었다. 별다른 느낌은 없었지만 현천의 보물이 변한 장검이 봉인되어 있는 부위였다.
‘설마 이걸 감지하고?’
생각할수록 마음이 불안했다.
그는 아직 인족과 비령족이 이 현천의 보물 때문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몰랐다. 당연히 몇몇 소수 종족이 그로 인해 혈제의 희생양이 된 것도 알지 못했고 말이다.
하지만 검의 위력을 직접 확인했기에 이것을 마음껏 부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면 영계를 종횡무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검을 사용한 이후, 현천의 보물은 신비한 병 다음 가는 비밀이 되었다. 서금충 성체보다 그의 마음속에서 더욱 우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석충족 장로가 현천의 보물을 알아차렸을 가능성은 낮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천기자가 진작 알아보았을 것이다. 현천의 보물은 발동하지 않는 한 감지할 수 없었다. 물론 상대가 역천의 공법을 익혔다면 현천이 보물을 감지했을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던 지금은 합체기 수사의 말을 거스를 형편이 되지 못했다. 몸속에 주입된 영력은 그렇다 치고 삼엄한 운성의 경계를 뚫고 달아나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부딪쳐 봐야했다.
한립은 가만히 서 있다가 결국 순향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순향각 대문 앞에 이르자 문 안쪽에서 준수한 용모의 정족 청년이 한립을 맞이했다.
“려 선배님이시지요. 단 장로님께서는 4호 귀빈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 가시지요.”
“안내하게.”
한립이 누각을 훑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족 청년은 한쪽에 있는 계단으로 그를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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