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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51화 (708/2,000)
  • 951화. 사족경매회(四族競賣會)

    *

    한립은 마음을 정하고 하얀 옥갑을 다시 저물탁에 집어넣었다. 그는 침상위에서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부문불출하며 3일이 흘렀다.

    그리고 3일 후 수련에 매진하던 한립은 두 눈을 번쩍 떴다. 한 손을 뒤집자 만리부가 나타났고 하얀 부적 위에는 작은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한립은 내용을 확인하고는 방을 나섰다.

    반나절 후, 그는 팔운산 중 하나인 운몽산(雲夢山)에 위치한 동굴 안에서 흡족한 얼굴로 내부를 살피고 있었다.

    영기는 운하산에 뒤지지 않게 농염했고 연단실, 연기실, 약재밭 등 모든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심지어 약재밭에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영약들이 미리 심어져 있기도 했다.

    한립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럼에도 바로 수련을 시작하지 않고 의식을 이용해 동부 곳곳을 샅샅이 조사하고 열댓 개의 각종 금제를 설치했다. 이렇게 해두면 합체기 수사라도 갑자기 이곳에 들이닥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필요한 영초까지 심어놓고 한동안 단약을 제련할 계획이었다. 등룡단을 어느 정도 만들어 대부분은 수련하며 복용하고 나머지는 시장에서 극품영석으로 교환하기 위해서였다.

    통령괴뢰를 부리는 일이나 초대형 전송진을 가동하는 일이나 필요한 극품영석의 수가 상상을 초월했다. 그냥 영초를 거래하면 아무리 만년 영약들이라도 충분한 수량을 모으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만년영약을 너무 많이 거래하면 이목이 집중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등룡단이었다. 강력한 약성을 지닌 만큼 운성 상족 수사들이 너도 나도 탐을 내 높은 가격에 팔릴 것이 분명했다. 물론 두세 번 정도 등룡단을 풀어 의심을 사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래도 충분한 극품영석을 모으지 못하면 금뢰죽을 내놓을 의향도 있었다. 영계에서 금뢰죽이 희귀한 것을 감안하면 단 한 개만 팔아도 충분할 것이다.

    천기자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한립은 처음부터 극품영석을 마련할 방안을 갖고 있었다. 이곳으로 안내해주며 천기자는 다른 종족과의 이야기를 마쳤음을 알려주었다.

    그들은 전송진을 이용하는 대가로 제시한 조건은 그리 가혹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부가 비용을 요구했고 석충족은 광한계에서만 찾을 수 있는 연기 재료를 조건으로 걸었다.

    그들은 재료가 나는 산지를 표시한 지도를 주며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고심하던 한립은 결국 모든 조건을 받아들였다. 딱 한 종류의 재료를 찾는 것이라면 그리 큰 위험 부담은 되지 않을 것이다.

    한립은 천운족과 완만하게 합의를 본 셈이었다. 광한계 일만 마치면 언제든 그가 비용을 부담한다는 가정 하에 초대형 전송진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동안 한립은 동부에 들어가 1년 넘게 나오지 않았다.

    영초를 배합해 단약을 제련하는 한편 등룡단을 복용하면서 범성진마공을 수련했다. 등룡단의 약효 덕분인지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법상진마법상은 훨씬 뚜렷해졌다.

    조금 이상한 일이라면 섬섬이라는 정족 여인이 한 번도 만리부를 이용해 연락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를 까맣게 잊은 것처럼. 한립은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먼저 여인에게 연락을 취하지는 않았다.

    1년 후 어느 날, 그는 드디어 동부를 나서 빛줄기로 변해 산을 내려갔다. 우연인지 산 정상에서부터 날아오던 하얀 빛줄기가 그와 연달아 곁의 산자락에 내려섰다.

    둔광이 가시고 한립과 대머리 거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나운 용모에 회백색 피부를 지닌 거한이었다. 두 사람은 뜻밖이라는 얼굴로 눈이 마주쳤다.

    “저 석충족 철견이라고 합니다. 못 보던 분인데, 이 산에 들어오신지 얼마 되지 않으셨나 봅니다.”

    흉흉한 인상과 달리 말투는 퍽 공손했다.

    “새로 이곳에 거처를 얻은 한 모라 합니다.”

    한립은 철견이 연허기 최고봉이라는 것을 알고는 겉으로나마 미소를 머금었다.

    “한 수사셨군요. 저 혹시, 작년에 광한령을 발동했다는 외부인 수사 아니십니까?”

    거한은 소문에 밝은지 성만 듣고도 한립의 정체를 유추해냈다. 한립은 조금 놀랐지만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제가 광한령을 발동한 사람이 맞습니다. 이렇게 유명해졌을지는 몰랐습니다. 수사께서도 저를 알아봐 주시고요.”

    “하하, 한 형께서 처음으로 광한령을 발동한 객경이시라 한동안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거처를 나서시는 것을 보니 사족경매회(四族競賣會)를 가시는 길이십니까?”

    “사족경매회요?”

    “아,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하긴 운성에 오신지 얼마 되지 않으셨으니. 사족경매회란 10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경매로 천운13족 중 네 개의 종족이 주관하고 있습니다. 보통 구하기 어려운 보물들이 많이 출품되어 인기도 많고 고계 수사들이라면 놓치지 않고 참석하곤 하죠.

    게다가 이번에는 각치족과의 전투에서 번번이 밀리다 보니 사기를 올린다는 명목으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귀한 물품을 내놓는다고 합니다. 그 중에 만묘단도 있고요! 연허기 수도자의 고비를 돌파하게 해준다니 최상의 보조 단약 아닙니까! 정족 종사급 연단사만이 제련할 수 있는 단약으로 이전 경매에서는 한 번도 나온 적이 없거든요.”

    “만묘단은 저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한립도 단약의 이름을 듣고 마음이 동했다. 녹광성에서 이족들이 통령괴뢰 보다 귀하게 여기던 단약이었다. 만묘단을 얻을 수 있다면 앞으로 고비를 돌파할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성대한 경매라면 저도 구경해보고 싶군요.”

    “그럼 저랑 같이 가보시겠습니까? 솔직히 이번 광한계 원정에 저도 참가할지 몰라서요. 한 수사가 계신 무리로 배정받을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그때 한 형이 저 좀 잘 보살펴 주십시오.”

    “무슨 그런 말씀을요! 상족 9계이신 철 수사께서 저보다 수행이 훨씬 앞서시는데요. 제가 운성이 아직 익숙하지 않으니 오히려 철 형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철견의 시원시원한 성격에 한립도 마주 보고 웃었다. 철견은 바로 영수 마차를 부른 다음 한립을 향해 자리를 권했다. 한립은 거절하지 않고 먼저 마차에 올랐다.

    “운의(雲意) 경매소로 가세!”

    민머리 거한이 마부에게 목적지를 말하자 마차가 질주하기 시작했다. 마차 안에서 한립은 사족경매회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물었다.

    사족경매회는 며칠 전부터 열렸지만 최상품들은 아직 나오지 않아 진정한 경매는 오늘부터 시작이었다. 거한은 만묘단을 낙찰 받아 보려고 친한 벗에게 대량의 영석까지 빌렸다고 했다.

    이번 경매에서 만고족이 통령괴뢰를 두 마리나 내놓았다는 소식도 있었다. 마차는 한 시진 넘게 달려 굉장히 넓은 대로로 들어섰다.

    대로를 지나는 영수 마차들이 많았고 양쪽으로 상당한 수행을 지닌 수사들이 장포자락을 휘날리며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립이 탄 마차가 대로 끝에서 멈추었을 때 다른 마차들도 같은 곳에서 멈췄다.

    철견과 한립은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방에는 네모난 거대 건축물이 보였는데 백여 장 높이에 길이만 해도 천 장이 되었다. 건물 지붕에 원기둥 형태의 제단이 솟아 있었고, 그 위로 직경 열댓 장의 노란 구슬이 둥실 떠 있었다.

    금속도 아니고 목제도 아닌 구슬은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음산한 한기(寒氣)를 발산해 건물을 뒤덮고 있었다. 건물 주위에 갑옷을 입고 선 병사들은 자세히 보면 수행이 꽤 높은 꼭두각시들이었다.

    대전에는 총 세 개의 입구가 있었는데 중간의 출입구가 가장 크고, 나머지는 살짝 작았다. 입구를 지키는 남색 장포 병사들은 놀랍게도 전부 연허기 이상이었다.

    “저는 편전으로 가 지니고 있는 물건을 좀 팔아야합니다. 영석을 충분히 확보해야 하니까요. 한 형도 가보시겠습니까?”

    한립이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철견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편전에 거래할 만한 곳이 있다고요? 이곳은 경매소 아니었습니까?”

    한립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경매를 하려면 다들 대량의 영석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많은 수사들이 경매 전 지니고 있던 진귀한 재료 등과 영석을 바꾸려 합니다. 그래서 사족경매회 전에 수사들끼리 거래해 영석을 모으거나 다른 물품으로 교환을 하곤 합니다.

    좋은 점은 네 종족이 뒤에서 버티고 있어 아무리 진귀한 물건을 거래해도 충분한 영석이 준비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대전 양쪽의 편전이 각각 물건을 파는데 전문화되어 있습니다.”

    “물건을 팔수도 있단 말이지요……?”

    “한 형께서도 팔고 싶은 물건이 있으십니까? 그럼 일단 다른 이들이 파는 물건을 먼저 살펴보시라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만일 필요한 물건과 교환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은 일일 테니까요.”

    “일리가 있으십니다. 그럼 일단 물건을 파는 곳으로 가보겠습니다.”

    철견의 말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같이 들어가시죠! 운이 좋으면 좋은 물건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철견은 활짝 웃으며 한립을 데리고 우측 입구로 걸어갔다. 남색 장포 병사들이 철견과 한립을 훑고는 별다른 검문 없이 그들을 통과시켰다.

    “사족경매회 자체가 운성의 인기와 명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 상족 이상의 신분이라면 아무나 경매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신분과 수행을 지닌 이들이 참가하지요. 이 때문에 천운의 다른 경매보다 훨씬 많은 수사들이 찾아옵니다.”

    “상족 이상은 아무나 참가할 수 있다면 이곳에 그렇게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습니까?”

    “하하, 그건 조금 있다가 바로 알게 되실 겁니다. 제가 굳이 입을 놀릴 필요가 없을 거예요.”

    철견의 장난스러운 대답에 한립의 시선이 전방으로 향했다. 입구를 들어온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아직도 편전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뭔가 이상한데.’

    하얗게 빛나는 출구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가도 가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공간 관련 술법이군요!”

    “하하, 이제 아셨습니까? 이곳 경매소 자체가 거대한 보물과 다름없습니다. 스스로 크기를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고 약간의 공간 신통도 보유하고 있거든요.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내부 공간이 열 배는 넓어 수십만 명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습니다.”

    “어쩐지 지붕 위의 구슬이 괴이하다 했습니다.”

    “이 입구도 공간 신통의 영향을 받아 이런 것입니다. 조금만 더 가면 도착할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성큼성큼 빛나는 출구를 향해 걸어가는 철견은 아주 익숙해 보였다. 한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견의 말대로 곧 눈앞이 밝아지고 전방의 출구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들은 그곳을 지나 몹시 드넓은 광장으로 진입했는데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중이었다.

    광장 주위로 빼곡한 반원형 장막들이 보였고 수사들이 그 안을 드나들었다. 광장 중심에는 백옥으로 만든 단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위로 평범한 나무 탁자가 보였다. 청순한 용모의 아이 두 명이 그곳에서 여러 이족들에게 무언가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한립이 이곳저곳을 살피는데 철견이 포권을 했다.

    “한 수사, 이곳에서 헤어지시지요. 적당한 물건을 골라 수중의 물건을 빨리 털어버리고 싶어서요.”

    “어서 가보십시오. 저도 혼자 구경하려던 참입니다.”

    “한 형, 몸조심하시고 나중에 뵙겠습니다.”

    철견이 말을 마치고 경쾌하게 어딘가로 걸어갔다. 거한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한립은 광장 중앙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족인들은 두 사내아이에게 고계 영석 한 주머니를 주고 다양한 색깔의 작은 깃발을 받아가고 있었다. 이족인들이 광장 가장자리로 가 작은 깃발을 흔들면 반원형의 빛의 장막이 나타나 그들을 가려주었다.

    한립은 의식으로 장막을 훑어보았다. 의식이 빛의 장막에 닿자마자 금제로 인해 배척당해 전혀 내부를 염탐할 수 없었다. 빛의 장막은 광장 안에서 수사들이 마음 놓고 거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곳곳에서 빛의 장막이 반짝였고 광장 깊은 곳도 수사들로 바글바글했다.

    한립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곳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었다. 만묘단을 노리려면 대량의 영석을 구해야 했다.

    그는 차분히 광장 가장자리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대부분 바깥에서 슬쩍 보고 지나쳤고 가끔 빛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도 금방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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