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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48화 (705/2,000)

948화. 천기자

*

한립이 한 손으로 수결을 맺자 오색 거대 손이 금은색 빛구슬을 든 상태로 오색 빛덩이로 변해 구석으로 날아갔다. 그는 원자신광의 회색 빛기둥으로 빛의 진법을 가두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빛의 진법이 터져나가 회색 빛기둥 속에서 소리 없이 퍼져나갔다. 빛기둥이 극심하게 떨리고 표면에 파문이 일어 하얀 기운에 의해 갈라질 것 같았다.

한립은 콧방귀를 뀌고 입에서 은색 불구슬을 분출했다. 불구슬이 데구루루 굴러 은색 불새로 변한 다음 회색 빛기둥을 통과해 하얀 기운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하얀 기운이 갑자기 힘이 빠져 눈에 보이는 속도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하얀 기운 자체가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몇 배로 커진 오동통한 은색 불새가 마지막까지 하얀 기운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한립은 그것을 보고 겨우 안심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은색 불새가 날개를 펼치고 돌아와 종적을 감추었다. 그리고 하얀 해골 머리들은 펑! 하는 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오색 화염으로 만든 거대 손이 번득하고 나타나 한립의 머리 위로 금은색 빛을 풀어놓았다. 한립은 푸른빛으로 그것을 끌어들여 정체를 확인했다.

그것은 반 척 크기의 고풍스러운 영패였다.

한쪽 면은 금빛으로 반짝이고 다른 쪽은 은색으로 반짝이는 영패는 현란한 문양으로 가득했고 양쪽에 알 수 없는 고대 문자 두 개가 새겨져 있었다. 한립도 그것이 어떤 종족의 문자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만고족 대두인이 그렇게 중시하며 맡긴 물건이 겨우 이거였다니 의외였다.

찬란하게 빛나긴 했지만 표면이 마모된 정도로 보아 아주 오래된 물건이었다. 또한 사용한 재료가 무척 특이해 얼음과 불의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손끝이 고대 문자 중 하나를 스치자 갑자기 이변이 일어났다. 고대문자에서 하얀빛이 번득이더니 한립의 손끝이 서늘해졌다가 날카로운 고통을 느꼈다.

“……!”

한립이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손목을 흔들자 영패가 허공에 떠올라 움직이지 않았다. 서둘러 손끝을 살피니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피는 바로 멎었지만 백맥련보결을 수련한 그가 겨우 하얀실에 손이 베었다고 이렇게 많은 피를 흘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한립은 화들짝 놀라 공법을 운용했고 상처는 하얀빛을 반짝이며 완전히 아물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허공의 기이한 영패를 올려다보았다. 금은색 영패에서 빛이 크게 일고 바깥의 핏자국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핏물이 영패 안으로 흡수되었다.

잠시 후 영패가 울음소리를 내더니 금은색 빛기둥을 내뿜었다.

쿠앙!

원자신광과 몇 층으로 이루어진 금제들을 전부 뚫고 지붕마저 꿰뚫은 채 금은색 빛기둥이 하늘 높이 뻗어나갔다.

“이런!”

한립은 난색을 표하며 급히 푸른빛으로 영패를 거두려 했다. 그런데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푸른 기운이 감싸는데도 영패는 꿈쩍하지 않았고 금은색 빛기둥을 지속적으로 쏘아올렸다.

한립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렇게 난리를 쳤으니 숨길 수 없겠지! 곧 누군가 찾아오겠구나.’

그는 어두워진 얼굴로 신형을 움직여 허공의 검은 산과 도처의 진법 금제들을 전부 회수했다. 그리고 방구석으로 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한립이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반짝이고 검은 갑옷을 입은 운성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방안에서 엄청난 짓을 벌이고 있는 영패를 보고 얼굴이 굳었다가 냉랭한 시선으로 한립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한립의 수행을 확인하고는 병사들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운성에서는 막강한 위력의 보물을 발동하거나 과도한 영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우두머리로 보이는 병사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경지가 훨씬 높은 수사에게 사정도 듣지 않고 무례를 범할 수는 없었다.

“법기를 제련하다 문제가 생긴 것뿐일세. 바로 해결하겠네.”

한립은 아주 태연한 얼굴로 허공의 영패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허공에 거대 손이 나타나 영패를 쥐었다. 그런데 거대 손이 아무리 힘껏 당겨도 영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의심스럽다는 듯 한립을 쳐다보았고 한립의 입도 순간 일그러졌다.

그가 길게 심호흡을 하며 강력한 술법을 펼치려는데 돌연 방 밖에서 낯선 사내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히 애쓸 것 없네. 광한령(廣寒令)이 깨어났으니 이미 그 공간에 고정되었네. 자네가 주변 백 장의 공간을 전부 허물지 않는 한 움직일 수 없을 것이야.”

허공에 파문이 일고 인영이 괴이하게 나타났다. 병사들은 인영의 모습을 확인하고 표정이 달라져 즉시 허리를 숙였다.

“서성(西城) 73집법 부대가 백 장로님을 뵙습니다.”

우두머리 병사가 극진히 인사를 올렸다.

“역시 광한령이 확실해. 호오, 각치족에 전부 잃은 줄 알았더니, 한 개가 돌아올 줄이야!”

백발 청년은 짙은 눈썹에 각진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다른 이들은 거들떠보지 않고 영패를 보며 기뻐했다.

한립은 방 안에 나타난 청년을 훑고는 안색이 달라졌다. 백 씨 청년은 심후한 수행을 지닌 합체기 수사였다.

“이 광한령은 자네가 발동한 것인가?”

“부인하고 싶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한립은 한숨을 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부인을 해? 어째서 말인가? 이런 기연을 앞에 두고!”

백 씨 청년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훑으며 묘한 얼굴을 했다.

“기연이요? 선배님의 말씀은…….”

무언가 이상해 자세히 물어보려는데 백 씨 청년이 미간을 좁히고 한쪽 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창 형, 오셨으면 나오시지 않고요. 설마 이대로 광한령을 우리 수매족(水魅族)에게 넘겨주시렵니까?”

“이번에 광한령 수량이 많지 않아 하나하나가 얼마나 진귀한데, 수매족이 독식하려 하십니까! 만고족에서 개방 진법을 펼쳐 주기 전에 가져갈 수나 있습니까?”

어디선가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쪽 벽에서 빛이 반짝이고 회색빛에 둘러싸인 그림자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마치 실체가 없는 것 같았다.

“하하, 그거야 저도 알지요! 허나 이쪽 수사가 우리 수매족으로 들어오길 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수매인 몇을 더 데리고 광한계(廣寒界)로 들어간다고 해서 무슨 문제라도 있겠습니까.”

백 씨 청년은 화를 내지 않고 담담히 답했다.

“그렇다면 문제없지요. 그렇지만 저 수사는 아직 수매족으로 들어간다고 대답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우리 음요족(陰妖族)에서 객경을 맡고 싶을지 누가 압니까?”

회색 그림자가 고조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창영 수사, 그거야 모를 일이지요! 제 기억대로라면 우리 13족에는 불문율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 종족에서 어떤 외부인을 동시에 객경으로 맞기를 원하면 먼저 요청한 종족이 거절당해야 다음 종족에게 기회가 돌아간다는 것 말입니다.”

백발 청년이 더는 창영을 상대하지 않고 한립에게 몸을 돌렸다.

“수사, 나는 수매족의 장로 ‘백월’이라 하네! 정식으로 수사를 본 족의 객경으로 삼고 싶은데 어찌 생각하는가? 수사가 수매족의 일원이 되겠다면 내 책임지고 백 년 내로 수행을 높여 주겠네. 그밖에도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고 말이야.”

그런데 말을 하는 백월의 눈에서 유리와 비슷한 느낌의 빛이 번득였다. 마치 무형의 힘으로 상대를 끌어당기는 듯했다. 상대의 기이한 눈빛에 한립은 의식이 흐릿해지며 입술을 달싹였다.

당장이라도 청년의 말에 동의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대연결이 일고 눈동자 깊은 곳에서 남색빛이 반짝였다.

‘이게 뭐 하는……!’

한립은 찰나의 순간 흡인력에서 벗어났지만 내심 깜짝 놀랐다. 온화한 표정으로 대화를 건네던 백발 청년이 미혼술을 쓴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백월은 멍하니 서서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하하, 백 형의 유리환목(琉璃幻目)이 성족 이하의 수사에게 실패할 줄은 몰랐습니다. 백 수사,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어차피 불문율은 말 그대로 불문율일 뿐입니다. 광한령을 앞에 두고 다른 종족들이 순서를 따져가며 달려들 것 같습니까.”

창영은 곧 웃음을 터트리며 은근히 백월을 비웃었다. 백 씨 청년이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는 의미심장하게 한립을 내려다보며 창영에게 답했다.

“수사가 우리 수매족에 들어올 마음이 없다니, 나도 강요하지는 않겠네. 창 형, 음요족에서도 제의를 할 것입니까?”

“그건 우리끼리 얘기할 문제도, 저 자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쓸데없는 일에 힘 빼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창영은 코웃음을 쳤다. 그 말에 백월이 차분히 미소를 머금고 대꾸하지 않았다. 한립도 명청령안을 거두고 침묵했다. 운성 병사들도 서로 눈치만 살필 뿐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순간 방 안이 조용해졌다.

텅텅!

누군가 한립의 방문을 두드리자 정적이 깨지며 노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부 만고족 천기자일세. 이 방의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만.”

노쇠한 목소리가 들리자 백월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졌고, 창영의 회색빛도 미세하게 일렁였다. 눈을 빛낸 한립이 바로 답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선배님 같은 분을 이런 누추한 곳에 모시다니, 영광입니다.”

호의적인 한립의 목소리에 문밖의 노인도 더는 예의 차리지 않았다. 영기의 빛이 반짝이고 누군가 그대로 문을 통과해 걸어들어 왔다. 노란 장포를 걸친 포동포동한 노인은 인자한 표정에 선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백 수사와 창영 수사께서도 함께 계셨습니다. 이 늙은이가 미처 인사를 하지 못했어요!”

노인은 그제야 백월과 창영의 존재를 알았다는 듯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천기자 수사께서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희도 온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예, 저도 마침 주변에서 일을 보다 우연히 광한령이 발동된 것을 보고 이제 왔습니다.”

조금 전까지 첨예하게 대립하던 백월과 창영이 후덕한 노인의 등장에 기가 팍 죽었다. 한립은 그것을 보고 의식으로 노인을 훑었다.

한립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노인은 법력이 마치 끝없는 바다와 같아서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 그의 수행으로는 경지를 파악할 수 없었다.

‘십중팔구 합체기의 정점에 이른 인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백월과 창영이 어려워할 만했다. 그들의 수행 차이면 둘의 법력을 합쳐도 노인보다 못할 것이다.

“저 광한령은 수사의 것인가?”

천기자가 허공의 금은색 영패를 확인하고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맞습니다. 제 것입니다.”

한립이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그렇다면 한 수사겠구만.”

그를 훑던 천기자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저를 아시는지요?”

“갑 수사에게 이야기를 들었네. 게다가 자네의 초상도 지니고 있지! 안 그래도 이틀 내로 사람을 보내 한 수사를 청하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만남이 앞당겨졌군.”

“천기자 수사께서 저 수사를 아십니까?”

듣고 있던 백월이 참다못해 끼어들었다.

“허허, 우리 만고족 4대 최상급 괴뢰사 중 한 명인 갑 대사가 며칠 전 각치족 구역에게 큰 화를 당할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 수사 덕에 대사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지요. 그러니 어찌 모르겠습니까.”

“갑 대사가 각치족에게요?”

그 말에 창영이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중요한 사정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다녀올 일이 있었답니다. 원래 호위를 데리고 갔었는데 갑작스런 각치족 침공으로 모두 죽고 말았지요. 그런데 두 분은 우리 만고족 사정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려.”

후덕한 노인이 탄식하더니 웃음기 가득한 눈으로 반문했다.

“아, 아닙니다. 갑 대사는 뛰어난 괴뢰술로 우리 13족 모두에게 중요한 인물이니 염려가 되어 여쭌 것입니다.”

백월이 노인의 말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요. 갑 대사가 무사하다는 말에 저도 안심했습니다.”

회색빛 속 그림자도 불안정한 모습으로 몸을 꼬았다.

“두 분의 호의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한 수사가 광한령을 발동했으니 제가 잠시 본 족으로 청해 대화를 나누려는데 이의가 있으십니까? 이곳은 바로 금제로 봉쇄하고 충분한 만고족 수사들을 파견해 개방 진법을 펼치겠습니다.”

공손한 태도였지만 단호함이 느껴지는 어투였다. 이에 백월과 창월은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천기자의 기에 눌려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눈치 있게 나오는 두 수사를 보고 만족스럽게 웃고는 한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 수사, 이 늙은이를 따라 잠시 가주겠는가?”

그 말에 한립은 쓴웃음을 지었다. 합체 최고봉의 존재가 청하는데 감히 어찌 거절하겠는가.

“번거롭지 않으시다면 잠시 폐를 끼치겠습니다.”

“허허, 번거롭다니 그런 걱정은 말게. 갑 대사의 생명의 은인이라면 바로 우리 만고족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이야.”

천기자가 한립의 꺼리는 마음을 읽고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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