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946화 (703/2,000)
  • 946화. 통령괴뢰(通靈傀儡)

    *

    “아, 제게 마수의 모습을 그려 놓은 초상이 있으니 직접 보십시오.”

    정족 여인이 손짓하며 준비해둔 돌조각을 던져주었다. 한립은 사양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 의식을 불어넣었다.

    “과연 약간 닮기는 했군!”

    잠시 후 손을 내린 한립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

    “설명을 마쳤으니 이제 선배님께서 결정을 내려주실 차례입니다.”

    “수사를 앞으로 어찌 부르면 되겠나?”

    “섬섬이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선배님!”

    여인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섬섬이라.”

    한립은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금산맥 중심부까지 들어갈 필요도 없고, 성계 마수의 신통도 크게 약화가 되었다니 시도해볼 만 하겠군! 미리 말해두지만 수사가 말한 것과 달리 너무 위험하다면 언제라도 포기할 것일세.

    또한 마금산맥을 개방하는 날, 수사가 나와 같이 들어가 길안내를 해줘야겠어. 마지막으로 정말 그 성계 마수가 산악거원의 혈통이라면 진령의 피는 내가 가져가겠네. 이 조건 중 하나라도 동의하지 않는다면 거래는 없던 것으로 하지.”

    한립은 말을 마치고 고요한 눈빛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전부 선배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섬섬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호쾌하게 대답했다. 이에 한립은 저물탁에서 열댓 개의 작은 병과 목함 그리고 옥갑 같은 물건들을 허공에 늘어놓았다. 그밖에도 수십 개의 극품영석도 꺼냈다.

    “이 단약들은 수사가 지금부터 상족 중계에 이를 때까지 복용할 수 있을 걸세. 심지어 고비를 넘어 경지를 올릴 때도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고. 다른 재료들도 내 꽤 많은 시간을 들여 모은 것인데 만족하는가?”

    그가 내놓은 단약 대부분은 한립이 이전에 복용했던 것들로 심지어 진섬액도 두 병이나 들어있었다. 상대가 불만을 드러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다른 재료들도 화호군도에 있을 당시 연허급 요수 두 마리를 잡고 얻은 재료로 굉장히 귀한 것이었다. 가장 아까운 것은 구하기 어려운 극품영석이었다. 오랜만에 이렇게 많은 극품영석을 쓰려니 속이 조금 쓰렸다.

    여인은 일일이 단약과 재료를 확인하고는 얼굴에 희색이 넘쳤다.

    “물건들이 전부 범상치 않은데다 극품영석까지 더하니 마갑을 내어드리기에 충분합니다.”

    섬섬이 물건과 영석을 챙기고 웃음을 머금었다.

    “수사가 만족했다니 되었네. 그럼 만리부를 한 장 남겨 줄 테니 마금산맥이 개방되는 대로 연락을 주게.”

    한립이 의식을 움직여 저물탁에서 옥패 하나를 방출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섬섬이 옥패를 받아들고 대답했다.

    한립이 두 손으로 수결을 맺으며 주술을 외우자 금색 법상이 보라색 갑옷과 함께 허물어져 사라졌다. 같은 시각, 한립의 단전에서 원영이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하얀 살결이 통통하게 오른 원영의 맨 몸에 자홍색 갑옷이 입혀져 있었던 것이다.

    거래가 끝나자 여인은 진법 원반을 이용해 한립과 함께 원래 있던 점포 안으로 돌아왔고, 한립은 망설임 없이 그곳을 떠났다. 남은 시간 동안 그는 여러 상점을 돌며 필요한 물건을 구매했다.

    약간의 수확은 있었지만 천외마갑보다 인상적인 것은 없었다. 하루 종일 거리를 돌아다니던 한립은 하늘이 어두워질 때쯤 길가에서 영수 마차를 타고 거처로 돌아왔다.

    그 후로 한립은 열흘 넘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운성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수백 개의 점포들을 살폈다. 이렇게 그는 운성에 대해 조금씩 알아갔고 저녁이 되면 가끔 향지례가 찾아와 그와 담소를 나누다 돌아갔다.

    성 바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성 안은 평온하기만 했다. 천운족이 각치족 침공에 이골이 난 것인지 아니면 적이 운성 인근까지 몰려오지 못할 거라고 믿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한립은 객잔을 나와 바로 영수 마차를 잡아타고 운하산(雲霞山)이라고 외쳤다. 그러자 영수 마차는 거리를 질주해 운성을 횡으로 가로질러 높은 산 아랫자락에서 멈추었다.

    “…….”

    한립은 마차에서 내려 눈앞의 높은 산을 올려다보았다. 산은 높이가 삼천 장이나 되었고 녹음과 정순한 영기로 가득했다. 꽤 좋은 영맥이 흐르는 산이었다.

    ‘이곳이 그 유명한 팔운산(八雲山)이로군!’

    성 안의 강력한 신통을 지닌 이들이 막대한 힘을 들여 지상의 여덟 개의 산을 운성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들었다. 거기다 극품 영맥을 구해 각각의 산에 들여 놓아 인공적으로 만든 영산이었다.

    여덟 개의 산봉우리들은 운성에서 유일하게 장기 거주할 수 있는 곳으로 크고 작은 동부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런 동부는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할 수 없었고 빌릴 수만 있었다. 백년을 단위로 거액에 거래되는 거처인 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팔운산의 동부는 항상 인기가 높았고 어떤 때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기도 했다. 갑천목이 임시로 머무는 동부가 바로 눈앞의 ‘운하산’ 봉우리에 있었다.

    그가 남겨준 기록에 따라 한립은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올랐다. 팔운산은 운성에서 유일하게 법력을 이용해 둔술을 펼칠 수 있는 곳이었다.

    오늘 한립이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갑천목이 약속한 통령괴뢰 때문이었다. 그동안 한립은 만고족에 대해 충분히 알아보았다.

    만고족은 천운의 13족 중 중급세력에 속했지만 괴뢰술이 불가사의한 경지에 이른 종족이었다. 뇌명대륙에서도 괴뢰술에 능한 종족으로 세 손가락에 꼽히는 곳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전에는 잘 몰랐던 통령괴뢰에 관해서도 여러 경전과 향지례를 통해 알게 되었다. 통령괴뢰는 최소 화신 이상의 위력을 지닌 데다 약간의 영성을 지녀 의식을 깃들이지 않아도 간단한 명령을 수행할 수 있었다.

    거기다 이런 꼭두각시들의 영성은 배양이 가능해 나중에는 높은 지적 능력을 갖추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전부 소문일 뿐이고 만고족이 정식으로 공개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통령괴뢰가 신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통령괴뢰는 만고족도 제련하는데 공을 많이 들여야 해서 외부로 판매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끔 한 두 개가 세상에 나오면 다른 종족들이 전부 가져갔고 경매에서도 천정부지의 가격으로 팔려나갔다. 통령괴뢰에 대해 알면 알수록 한립의 흥미도 커져갔다.

    ‘목적이 통령괴뢰 하나만은 아니지만…….’

    한립이 변한 푸른 빛줄기가 산허리의 구석으로 떨어졌다. 머지않은 곳에 암벽이 있었고 반원형 돌문이 보였다. 한립은 문을 두드리지 않고 소매를 펄럭여 불덩이를 날려 보냈다. 불덩이가 소리 없이 돌문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빛이 반짝이고 돌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안에서 갑천목이 미소를 지으며 걸어 나왔다.

    “허허, 한 수사께서 오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제야 오십니까?”

    “처리할 일이 있어 며칠 지체되었습니다.”

    갑천목의 안색이 훨씬 좋아져 있었다.

    “그러셨군요. 자, 들어가서 천천히 이야기 나누시지요.”

    “그러시지요.”

    한립은 사양하지 않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갑천목의 동부는 그리 크지 않아 작은 통로를 따라 들어가니 서른 장 크기의 대청이 나왔다.

    내부는 정갈했고 대청 중앙에 기다란 탁자와 두 개의 협탁 그리고 수백 개의 의자들이 전부였다. 대청의 네 벽도 평범한 청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수사, 이리로 앉으세요.”

    짝짝!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옆에 자리를 잡자 갑천목이 말없이 손뼉을 쳤다. 그러자 노란 궁장 차림의 여인이 나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여인은 한립 앞에 나무 쟁반을 내려놓고 공손히 물러났다.

    한립은 눈앞의 나무 쟁반을 빠르게 훑고는 고개를 들어 여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수사께서 제 하녀가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내어 드릴까요?”

    한립을 유심히 살피던 갑천목이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닙니다, 통령괴뢰가 과연 명불허전이군요! 저도 괴뢰술에 관심이 있는데 의식과 관련된 비술을 익히지 않았으면 진짜 사람이라고 믿을 뻔 했습니다.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이나 영기의 압력이 보통 수도자와 다를 바가 없어요.”

    한립이 입 꼬리를 올리며 찬사를 건넸다.

    “하하, 알아보셨습니까! 성족 수사들을 제외하면 한 수사께서 처음입니다. 제가 손수 제련해낸 뒤로 이 꼭두각시로 수많은 수사들을 속여 넘겼습니다.”

    갑천목은 한립이 하녀가 꼭두각시인 것을 알아보자 신이나 웃음을 터트렸다. 한 눈에 인간형 꼭두각시를 알아보자 더욱 호감을 느낀 것 같았다.

    “운이 좋았습니다. 이 통령괴뢰가 수행이 그리 높지 않고 인간화에 치중한 덕이지요.”

    한립은 사람과 흡사한 괴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좋은 안목을 지니셨습니다. 제가 처음 만든 통령급 괴뢰라 겨우 상족 3계의 실력을 지녔지요. 지금껏 영성을 키우는 데만 집중했는데 아쉽게도 크게 발전하지는 못했습니다.”

    갑천목이 아쉽다는 듯 하녀를 바라보았다. 하녀 꼭두각시는 진짜 사람처럼 갑천목과 눈을 마주치고 빙긋 웃었지만 곧 미소를 거두고 무표정하게 돌아갔다.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그렇지! 한 형, 일단 목함 안의 통령괴뢰가 마음에 드시는지 확인해 보시지요!”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한립이 푸른빛을 날리자 기다란 목함이 열리고 내부가 드러났다.

    “이건…….”

    한립은 안을 확인하고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목함에는 한 척 길이의 하얀 뱀이 수정처럼 투명한 몸으로 하얀빛을 머금고 있었다.

    “제가 얼마 전에 제련한 신형 통령괴뢰랍니다. 수행은 대략 수사와 비슷한 상족 7계 정도고요. 수행은 높지는 않아도 두 가지 형태로 변할 수 있습니다. 한 형께서 제 목숨을 구해주시지 않았다면 아까워서 내드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두 가지 형태요?”

    “그렇습니다. 피로 주인을 인식시키지는 않았으니 제가 간단히 시범을 보여드리지요.”

    갑천목이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한립 앞의 목함을 가리켰다. 바로 하얀빛이 손끝에서 튀어나와 목함 속의 하얀 뱀에게 흡수되었다.

    영기의 빛이 반짝이고 꼼짝 않던 하얀 뱀이 꿈틀거리다 하얀빛으로 변해 날아올랐다. 몇 장 크기의 하얀 구렁이가 대청 위를 날아다녔다. 멀리서 보면 새빨간 눈을 지닌 하얀 구렁이는 진짜 거대 구렁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갑천목이 낮게 기합을 넣고 또 법결을 던졌다.

    파앗.

    하얀 구렁이의 몸이 바르르 떨리고 한 덩어리로 수축하더니 이번에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멍한 눈빛으로 허공에 떠서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이 통령괴뢰는 적을 공격하든, 거처에 두고 수발을 들게 하든 어떤 용도로도 부리기 좋습니다. 유일한 결점은 소모되는 영석이 다른 통령괴뢰에 비해 몇 배라는 것인데, 꼭두각시가 대부분 한광정철(寒光晶鐵)로 이루어 져서 얼음 속성 영석으로만 부릴 수 있지요. 수사께서 가져가시면 영석 소모는 클 것입니다.”

    “얼음 속성 영석이 귀하기는 하지만 알아서 구하겠습니다. 쓸모만 있다면 제가 거두지요.”

    “허허, 한 형께서 만족하신다니 저도 기쁩니다. 돌아가 피를 이용해 주인으로 인식시키면 다른 사람은 조종할 수 없습니다.”

    갑천목이 허공의 꼭두각시를 가리키자 백의 여인이 하얀빛으로 변해 한립 쪽으로 날아들었다. 빛은 허공을 선회하고는 하얀 뱀으로 변해 목함 속으로 돌아갔다.

    한립은 즉시 푸른 기운을 날려 목함을 닫았다.

    “이런 통령괴뢰들은 전부 직접 제련한 것입니까? 갑 수사의 괴뢰술이 얼마나 높은지 알만 합니다. 제가 우연히 다른 이가 제련한 새로운 형태의 꼭두각시를 얻었는데 살펴보시겠습니까?”

    “오, 새로운 형태의 꼭두각시요? 어서 보여주시지요. 저도 견문을 넓혀야겠습니다.”

    갑천목이 반색하며 답했다.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손바닥을 뒤집자 금제 부적이 붙은 옥갑이 나타났다. 부적을 뜯어내자 옥갑이 저절로 열렸다.

    뚜껑이 높이 치솟고 안에서 수십 개의 인형들이 날아올랐다. 바로 지연 요왕들 중 지혈에게서 받아온 영시(靈侍) 꼭두각시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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