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4화. 정족(晶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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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진에 관해서는 숙고해 보겠습니다. 수행은, 얼마 전에 운 좋게도 연허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연허! 사제가 그렇게 빨리 연허기에 이르다니. 그렇다면 더는 수명에 얽매이며 고생할 필요가 없겠군!”
향지례는 입꼬리를 꿈틀하며 부러워 죽겠다는 얼굴을 했다.
“수명이 무한하다지만, 실질적으로 3천 년에 한 번 있는 대천겁 때문에 오래 살기는 어렵습니다. 천겁이 나날이 흉흉해져 진선계로 비승하지 못하면 언제고 죽고 말테니까요.”
“그래도 수만 년은 걱정 없이 수련을 쌓을 수 있지 않은가. 사제의 자질에 연허기에서 끝은 아닐 것이야. 결국 선계로 비승할 날이 있을 것이네.”
“진선계요? 인족과 요족 모두 수많은 세월 동안 자질이 뛰어난 이들이 많았지만 진선계로 비승한 인물들이 얼마나 되었는지 모릅니다. 저도 그저 하는 데까지 해보자는 마음으로 수련할 따름이지요.”
향지례의 칭찬에 한립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허허, 어차피 사제가 우리 객잔에 머물 것이니 이 이야기는 천천히 나누세. 이제 객잔을 관리하러 가봐야 할 것 같아. 일이 끝나는 대로 방으로 찾아가겠네. 설마 이 늙은이의 방문을 거절하지는 않겠지?”
문밖을 힐끗 보다 향지례가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저도 운성은 처음이라 향 사형께 가르침을 구할 일이 많습니다. 이따 뵙겠습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자 향지례는 한립을 위해 좋은 방을 골라 직접 안내해주었다. 향지례가 다시 대청으로 돌아가자 한립은 차단용 금제를 펼치고 생각에 잠겼다.
‘놀랍게도 이곳에서 향지례를 만나다니!’
* * *
저녁이 되자 다시 향지례가 찾아왔고, 한립은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립은 그를 통해 운성과 천운13족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날이 밝아질 때쯤 향지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한립이 문밖으로 그를 배웅하려는데 향지례가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몸을 돌렸다.
“한 사제, 나는 인족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네. 하지만 자네는 돌아갈 날이 올지도 모르지! 만일 운성을 떠나 먼 곳으로 가게 된다면 이 사형에게 한 번 들려주겠나? 자네에게 남겨줄 물건들과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렇다네. 인족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주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고, 사제에게 도움이 될 일이니 걱정하지 말고.”
“어떤 일인지 지금 말씀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면 사형에게 작별 인사를 못하고 떠날 수도 있어서 그럽니다.”
“지금 밝히기는 조금 그렇다네. 물건들을 준비하는데 시간도 걸리고 말이야. 사제가 시간을 내서 꼭 한번은 들려줬으면 좋겠군. 나나 사제나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크게 후회하게 될 것 같으니.”
향지례가 고개를 저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이에 한립은 최선을 다해 보겠다고 약조했다. 향지례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한립은 그가 사라지고 방문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방 안의 벽에 하얀 기운이 어리며 금제가 발동했다.
그는 이튿날에도 밖으로 나서지 않았고, 셋째 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방을 나섰다. 그는 대청으로 가 향지례를 찾지 않고 바로 머물고 있는 방에서 뛰어내려왔다.
한립은 이미 가고 싶은 곳을 정했는지 길가의 영수 마차를 잡아탔다.
그의 시선이 처음 운성에서 보았던 거대 구체에 닿자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향지례에게 거대 구체의 정체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다.
총 13개의 거대 구체는 초대형 전투 괴뢰로 각각이 합체기 수사와 맞먹는 위력을 지녔다. 천운의 13족이 각각 하나씩 맡아 조종할 수 있었다. 전투괴뢰만 보아도 운성의 방어력이 얼마나 대단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쩐지 천운13족이 운성을 방어거점으로 삼은 이유가 있었어. 적어도 각치족의 기습에 당할 걱정은 없겠군.’
한립은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그가 가고자 한 곳은 그리 멀지 않았고 마차는 반 시진을 내달려 외진 골목으로 들어섰다.
한립은 마차에서 내려 영석 몇 개를 던져주고는 좌우를 살폈다. 골목 자체는 별 볼 일 없었지만 지나다니는 행인의 수는 대로보다 많았다. 그리고 대로 양쪽의 상점도 적은 수에 비해 드나드는 이가 꽤 많아 장사가 썩 잘 되었다.
한립은 눈앞의 점포를 보고 문 위에 걸린 편액을 확인한 후 걸음을 옮겼다.
점포 안에는 돌조각이며 옥그릇, 은색 영패 등 다양한 형태의 경전들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모든 물건들이 은은한 빛의 장막에 가려져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곳은 전문적으로 경전만을 거래하는 점포였다. 향지례가 말해준 바에 따르면 운성에는 이런 점포가 허다했다. 하지만 한립이 관심 있는 점포들은 대부분이 이 거리에 모여 있었다.
점포 안에는 몇몇 이족인들이 진열대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살피고 있었다. 전부 결단기 수사들이었다. 이족인은 물건을 고르는데 정신이 팔려 한립의 등장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점포 주인은 젊은 여인이었는데 눈처럼 고운 피부를 지니고 귀가 뾰족하고 미간 사이에 하얀 수정돌이 박혀 있는 이족이었다. 아름다운 눈이 밝게 빛나는 모습이 상당히 영특해 보이는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정족(晶族).’
한립은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현재 그는 천운의 각 종족들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는데 정족도 천운13족 중에 하나였다.
인구가 매우 적어 백만 명 밖에 되지 않았고, 다른 종족에 비해 약소한 편이었지만 인족보다 서너 배 수명이 길고 용모가 준수하며 지능이 높아 연단, 진법, 부적 등에서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정족은 어디를 가나 환영을 받았고 권력이나 지위에 별로 관심이 없음에도 천운13족에서는 꽤나 대접을 받고 있었다.
정족 여인은 한립을 보고 새까만 눈동자로 그를 훑었다. 곧 놀란 눈빛을 보내는 것이 그의 경지를 알아본 듯했다. 그녀는 바로 몸을 일으켜 예를 올렸다.
“상족 선배님께서 누추한 곳을 찾아 주시니 영광입니다. 어떤 것을 찾고 계시는지 알려주시면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여인의 말투와 동작에서 우아함이 느껴졌다. 한립은 내심 신기해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럴 것 없네. 내 알아서 돌아볼 것이니, 수사는 하던 일을 하게.”
“그럼 그러시지요!”
정족 여인이 차분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이 경전을 고르던 다른 이들을 놀라게 한 것은 틀림없었다. 다들 이상하다는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이족들은 한립이 고계 수사라는 것을 눈치 채고는 불안한 표정을 짓더니 조용히 그곳을 떠나거나 서둘러 경전을 골라 계산한 후 점포를 나섰다. 별안간 점포 안에는 한립과 정족 여인만이 남았다.
한립은 아무렇지 않게 진열대 중 하나로 가 경전을 살폈다. 겉으로는 어떤 경전인지 알기 어려웠기에 그는 빛의 장막으로 덮인 돌조각 중 하나를 의식으로 훑었다.
빛의 장막은 특이하게도 간단한 내용 정도만 읽을 수 있었고 정식으로 내용을 보려하면 금제가 발동했다. 진열대 위의 경전들은 대부분 각 종족의 풍습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아 한립은 다른 진열대로 자리를 옮겨 의식으로 훑었다.
이번에는 원하던 것을 찾았는지 겨우 두 권을 훑고는 희색을 드러냈다. 그 중 남색 옥 접시를 향해 손을 뻗자 경전이 날아들었다. 이렇게 그는 점포를 돌며 스무 권이 넘는 경전을 모았다.
한립은 정족 여인에게 다가가 경전을 탁자 위에 놓았다.
“모두 구입하겠네. 얼마면 되겠는가?”
정족 여인은 한 무더기의 물건을 보고 조금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가 미소를 지으며 뜻밖의 답을 했다.
“별로 값어치 있는 물건들이 아닙니다. 선배님께서 원하신다면 그저 가져다 쓰십시오.”
“내가 겨우 이 정도 영석도 없을까봐 그러는 것인가?”
“그런 의도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그저 선배님이 관심을 가지실만한 다른 물건이 있어서요. 그것을 원하신다면 이 경전들은 그냥 드리겠습니다.”
정족 여인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호오, 그럼 어떤 물건인지 한번 보여주게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비교적 귀한 물건이라 안쪽에 두었으니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의 대답해 정족 여인이 바로 내당으로 들어갔다. 한립은 개의치 않고 조용히 서서 기다렸다. 잠시 후 여인은 새까만 금속성 상자를 들고 나왔다. 푸른 부적을 두 개나 붙여 놓은 것이 귀하게 여기는 물건은 맞는 듯했다.
“안의 내용물을 살펴보시지요. 선배님께 필요한 물건이라고 생각지 않았다면 꺼내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정족 여인이 무언가를 안다는 듯 한립을 향해 미소 지었다.
한립은 정족 여인의 말에 곧바로 검은 상자를 끌어와 의식으로 훑었다. 금제 부적이 붙어 있기는 했지만 그의 강력한 의식을 전부 막지는 못했다.
“흠?”
한립이 놀라 정족 여인을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자네가 허튼 소리를 한 것은 아니구만.”
“괜찮으시면 열어서 내용물을 살피시고 결정해주시지요. 아, 이곳은 이야기 나누기 좋은 장소가 아니니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셔도 되겠습니까?”
여인은 눈을 반짝이며 싱그럽게 웃었다. 이후 그녀가 손바닥을 뒤집자 진법 원반이 나타났고 슬쩍 문가를 살피며 주술을 외웠다.
진법 원반에서 빛이 크게 일어 오색 기운이 사방팔방을 뒤덮더니 여인과 한립이 기운 속에 잠겼다. 한립은 오색 기운에서 꽤 강한 공간 파동을 감지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오색 기운이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아 뜻밖에도 오색의 진법으로 변했다. 주위 풍경이 모호해진다고 느낀 순간 그는 의미 회색 공간 속에 들어와 있었다.
열댓 장 크기의 작은 공간에는 탁자와 두 개의 의자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곁에선 정족 여인이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특별한 손님을 모시는 소형 공간균열입니다. 이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면 절대 다른 이가 염탐할 수 없지요. 물론 선배님의 신통에 전송을 위한 진법원반이 없어도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가는 것은 간단한 일입니다.”
정족 여인이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우아하게 말했다. 의식으로 훑어보니 공간장벽의 강도가 그녀가 말한 것처럼 강하지 않아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립은 한 손으로 상자를 스치자 검은빛이 반짝이고 부적들이 떨어져 내리며 뚜껑이 열렸다.
휘잉.
검은 기운이 빠져나오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한립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입을 벌려 금빛 기운을 분출했다. 검은 기운이 금빛에 휩싸여 검은 안개 기둥으로 변하더니 한립의 입 안으로 흡수되었다.
“정순한 마기(魔氣)!”
마치 보양이라도 한 것처럼 그의 얼굴에 금빛이 흘렀다. 검은 기운은 굉장히 농염했지만 범성진마공을 익힌 그로써는 소화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족 여인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그녀는 상자 안에서 발산하는 마기가 얼마나 강력한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상자를 열 때마다 여러 보호막을 준비하고서야 물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주의로 마기가 몸에 침투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수행이 크게 퇴보하거나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때 한립이 상자를 가리켰고 검은 물체가 쏘아져 나와 그의 손에 들렸다.
그것은 놀랍게도 반 척 크기의 보라색 전투용 갑옷이었다. 어깨와 무릎을 덮는 부분에 놀랍게도 가시가 튀어나와 있었고 표면에 검은 문양이 가득한데다 마기로 충만했다.
그저 가슴 부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고 주변이 크게 손상이 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랄까?
한립은 신중하게 갑옷을 살폈다. 범성진마공을 익힌 그는 이 마갑(魔甲)에 함유된 불가사의한 위력을 감응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수도계에 들어선 이래 본 가장 강력한 갑옷이었다.
“이 보라색 마갑은 제가 우연히 얻은 보물입니다. 처음에는 어떤 물건인지 몰랐으나 나중에 전설 속의 천외마갑(天外魔甲)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냈지요. 강력한 천외마두 중 하나가 만들어낸 갑옷이 아닌가 합니다. 갑옷의 손상 정도로 보아 본래 주인은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재 갑옷의 위력은 원상태의 10분의 1에 불과하지만 수리할 수만 있다면 2, 3성 정도는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족 여인이 미소를 머금고 설명했다.
“천외마갑이라면 거의 진령급에 이른 마물이 아닌가! 갑옷이 함유한 마기가 정순하다 했더니…….”
한립은 길게 심호흡을 하며 들고 있던 마갑을 허공에 띄우고 한 손으로 금색 법결을 방출했다. 금빛이 번득이며 보라색 갑옷 속으로 흡수되었다.
동시에 표면의 문양이 반짝이고 마갑이 몇 배로 커져 발산하는 마기도 더욱 짙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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