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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43화 (700/2,000)

943화. 천운의 여러 종족들

*

지금 그들은 성문 안으로 걸어 들어와 넓은 대로를 앞두고 있었다. 대로 양쪽에는 크고 작은 상점들이 가득했고 많은 이들이 오가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적막하지도 않았다.

“좋습니다. 저도 볼 일이 있으니 여기서부터 따로 가시지요.”

한립은 돌조각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미소를 머금었다.

“운성에는 천운의 각 종족들이 모여 살고 있지만 다른 종족의 수사들도 많습니다. 어떤 이들은 수백 년 혹은 천 년 이상을 머물기도 하고요. 그래서 성 안에는 임시로 빌릴 수 있는 거처도 많습니다. 물론 비용은 저렴하지 않지만요.

또 한 가지 주의하셔야 할 점은 성 안에서 다른 수사와 싸우거나 영력을 발휘해서는 안 됩니다. 발각되면 운성에서 쫓겨나거나 심한 경우 법력이 폐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이것은 13족의 장로들도 쉽게 위반하지 않는 법도입니다. 드릴 말씀은 다 드린 것 같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갑천목은 몇 가지 당부를 하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한립은 갑천목이 영수 두 마리가 끄는 마차를 잡아타고 사라질 때까지 그를 지켜보았다.

그가 사라지자 한립은 시선을 대로 양쪽의 상점으로 돌렸다. 천원13족의 중요 거점이라는 이야기가 무색하지 않게 건물의 수도 많고 양식도 다양했다.

높은 것은 작은 산만 했고, 아주 작고 정교한 세공이 눈에 띄는 건물도 있었다. 잠시 둘러보았을 뿐인데 눈길을 끄는 특이한 건축 양식이 많았다.

천운13족은 명의상으로는 13개의 종족의 연합체였지만 유구한 세월 동안 같이 생활해 왔다.

혈통이 다르다는 것을 제외하면 하나의 거대한 종족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각각의 종족은 세력이 그다지 크지 않아 각치족에 훨씬 못 미치지만 13족 연합체는 대항해볼 여지가 있었다. 그렇기에 각치족과 같은 초대형 종족 옆에서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한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각치족과 천운 간의 전쟁은 주기적으로 발발했다고 한다. 각치족이 천운의 영토를 빼앗거나 천운13족이 연합해 빼앗긴 영토를 되찾아오면서 말이다.

물론 각치족이 우위를 점하는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천운의 각 종족들도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며 크게 밀리지는 않았다.

이번에 각치족이 돌연 공격을 개시한 것은 의외였지만 천운족도 빠르게 반응해 응전할 대비를 하고 있었다. 이것들은 전부 갑천목과 동행하며 얻어낸 정보였다.

갑천목이 말하기를 천운의 영역은 굉장히 넓어 인접한 거대 종족이 각치족 하나뿐만이 아니라고 했다.

천운과 엇비슷한 세력의 야족(夜族)과 폭명족(爆鳴族), 그밖에 작은 종족들도 많았다.

이런 작은 종족들은 일반적으로 인근의 큰 종족에 의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말살을 당하거나 멀리 쫓겨났을 것이다.

한립은 상점들을 살피며 머릿속으로는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고민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풍원대륙으로 돌아갈 초대형 전송진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규모의 전송진은 십중팔구 거대 세력의 수중에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거대 세력의 고위층과 교류를 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갑천목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은 주요 이유였다.

‘일단 운성에서 머물만한 곳을 찾은 후에 천천히 움직여야겠군.’

한립은 주변을 살피며 인족의 누각과 비슷한 건물로 들어갔다. 상점은 2층으로 되어 있었고, 안에는 진열대가 놓여 있어 평범한 잡화점처럼 보였다.

장궤는 어두운 녹색 피부를 지닌 자로 한립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선배님,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본 점은 운성의 여러 특산품을 전문으로 거래하는 곳입니다. 지도나 아니면…….”

이족인은 축기기 수사였지만 한립을 보고도 전혀 겁먹지 않았다. 운성의 많은 고계 수사들을 보다보니 익숙해진 것이다.

“운성의 지도를 내오게. 상세할수록 좋고! 그밖에 몇 가지 묻고 싶은 것도 있네.”

한립이 곧바로 중계 영석을 내주자 장궤는 얼굴이 환해지며 얼른 붉은 돌조각을 꺼내주었다.

“이게 바로 저희 상점에서 가장 좋은 지도입니다. 궁금하신 것이 있으시면 무엇이든 하문하시지요! 제가 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말씀드리겠습니다.”

* * *

일다경 후, 한립은 평온한 얼굴로 점포를 걸어 나왔다. 그리고 영수 마차를 하나 잡아타고 눈을 감았다.

얼마나 많은 골목을 지났을까. 마차는 두 시진이나 지나 기괴한 외형의 커다란 건물 앞에서 멈췄다.

모래 언덕처럼 생긴 건물은 대충 보아도 천여 장은 돼 보였고 다른 건물들보다 몇 배는 더 커보였다.

건물에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문이 달려 있었고 가끔 누군가 문을 열고 날아 나오거나 들어갔다. 마치 거대한 벌집 같았다.

한립은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반원형을 문을 바라보았다. 대문 양쪽에는 각각 이상한 문자가 하나씩 적혀 있었는데 어느 일족의 언어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대문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기이하게 생긴 넓은 대청이 나타났다. 대청은 청록색 옥으로 만들어졌고 화분과 화초가 꽤 많이 심어져 있었다.

그리고 목제 탁자에 백발이 성성한 자가 회색 장포를 입고 깊은 단잠에 빠져 있었다.

“내게 구석에 있는 방을 하나 내주게. 며칠 머물다 갈 것이니.”

한립은 조용히 걸어가 담담히 용건을 밝혔다.

한립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노인의 귓가에는 천둥이 치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

“아이고, 손님이 오셨군요! 제가 바로 아주 좋은 방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한립의 목소리에 노인이 놀라 몸을 일으키더니 품에서 하얀 법기를 꺼내 무언가를 찾으려 했다. 그것을 본 한립은 미간을 찌푸렸다.

눈앞의 노인도 수도자였는데 전혀 경계심이 없었다. 조금 전 잠에 빠진 것도 연기가 아니라 진짜인 것 같았다. 흥미가 생겨 노인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던 한립은 경악했다.

“햐, 향 사형! 살아 계셨습니까? 여기에서요!”

노인은 수척한 얼굴에 병색이 짙었지만 약삭빠른 인상은 아직 남아 있었다. 노인은 바로 인계에서 먼저 공간접점으로 들어갔던 향지례였다.

그가 공간접점으로 들어가자 인계에 남겨두었던 원신등이 꺼져 죽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살아있었다니 한립이라도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노인은 그 말을 듣고 움찔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 사제! 정말 자네인가?”

노인은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얼굴로 격정에 차 웅얼거렸다.

“접니다, 한립! 그런데 사형의 수행과 기운이 어찌…….”

한립이 무의식중에 향지례를 훑어보고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인계에서 화신기 수사였던 향지례가 지금은 결단기의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기운이 허약한 것이 원기를 크게 상한 모양이었다.

“한 사제도 공간접점을 통해 영계로 왔구만. 기운으로 보아 법력이 크게 는 것 같고! 이곳은 언제 손님들이 드나들지 모르니 나를 따라 자리를 옮기세.”

향지례가 멍하니 한립을 쳐다보다 돌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급히 몸을 돌려 한립을 대청의 편문으로 안내했다. 한립은 잠시 주저했으나 그를 따라 걸어갔다.

편문은 긴 통로로 이어졌고 양쪽에 기이한 화초들이 심어져 있었다. 얼마 걸어가지 않아 향지례는 돌문 하나를 열고 한립을 안으로 청했다.

“사제 앉으시게. 이 노인네가 살아생전 다시 한 사제를 볼 날이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이런 몰골로 다시 만나게 되어 부끄럽구만.”

자리를 잡자마자 향지례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인계에서 대수사(大修士) 노릇을 하던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당시 공간접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다른 두 분은 어찌 되셨고요?”

“풍 노괴와 호 노마는 목숨을 잃었네. 운이 너무 안 좋았던 게지. 공간 폭풍 여러 개를 연달아 마주치고 나중엔 두 개의 공간 폭풍이 중첩해서 들이닥쳐 어쩔 수 없었네. 겨우 나만 살아남았지. 살기 위해 번번이 목숨을 담보로 한 비술을 펼쳐 수행이 크게 떨어지고 원기가 상한 것이라네. 지금의 수행도 오랜 세월에 걸쳐 겨우 다시 쌓은 것이고.”

향지례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공간접점이 극도로 위험한 곳이기는 합니다. 향 사형께서 살아남으신 것만으로도 복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인계에 남겨둔 원신등은 어째서 꺼진 것일까요? 또 어째서 인족에 위치한 비령대가 아니라 뇌명대륙에 계신 것입니까?”

“원신등이 꺼진 것은 아마 내가 사용한 비술과 관련 있을 걸세. 수명을 담보로 한 대법을 펼쳐 거의 죽었다 살아났으니. 다만 어째서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인지는 나도 알지 못하네. 공간 폭풍 속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탈출한 곳이 바로 이곳 천운이었지. 당시 공간 폭풍이 너무 거세 원래의 노선을 벗어난 것 같구만.”

당시 공간접점에서 겪었던 일들이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향지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립도 입을 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향 사형께서는 이 객잔의 주인과는 어떤 사이십니까? 다시 인족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으신지요?”

“이 객잔의 주인은 석충족 인물인데, 내게는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다네. 심성도 곱고 석충족 내에서 어느 정도 지위도 있더군. 사실 달리 갈 곳도 없고 은혜도 갚을 겸 이곳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다네.

하아, 인족으로 돌아가는 일은 이미 포기한 지 오래네. 천운13족이 대륙 사이를 이동할 수 있는 전송진을 장악하고 있다지만 전송에 필요한 자원이 웬만한 성족이라도 해도 가산을 탕진할 정도라고 들었네. 내가 원래 수행을 유지하고 있더라도 전송진을 이용할 자격은 못됐을 테지.

또한 지금의 수행에 만황세계를 통과해 인족 구역으로 갈 수 있겠는가? 어차피 이미 연허기에 이를 희망을 잃었으니 괜한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 이곳에서 평온하게 일생을 마치기로 마음먹었네.”

고개를 흔드는 향지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의 말에 한립은 차마 위로조차 할 수 없었다.

“아, 그렇지! 아직 사제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군. 인족으로 갈 수는 없지만 영계에서 같은 일족이 어찌 살아가고 있는지 알고 싶구만.”

향지례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당시 화신의 경지에 이른 후 사형께서 남겨주신 자료를 보고 공간접점을 찾아냈습니다. 그 후 동급의 빙봉과 힘을 합쳐 공간접점에 들어갔고요. 아마 제가 운이 좋았나 봅니다. 공간 폭풍을 만나기는 했지만 빙봉의 공간신통으로 공간을 찢고 탈출할 수 있었거든요.

다만 영계에서 인족의 상황은 제가 알기로는 겨우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정도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한립은 그가 겪은 일에 대해서는 간략히 말하고 원래 수행을 모조리 잃었던 이야기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족의 상황은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전부 들려주었다.

“삼경칠지(三境七地)라! 성황과 요왕! 영계에서 우리 인족도 적잖은 합체기 수사들을 보유하고 있었구만. 그 이야기를 들으니 이 늙은이가 크게 안심이 되네.”

향지례가 열심히 귀 기울여 듣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침묵하던 한립은 화제를 돌렸다.

“천운13족이 초대형 전송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향 사형께서는 어찌 알게 되신 것입니까?”

“허허, 자네도 전송진에 관심이 있는가? 초대형 전송진에 대한 이야기는 비밀도 아니라네. 천운뿐만 아니라 각치족과 야족도 하나씩 지니고 있으니까. 인근의 거대 종족 중 폭명족만이 전송 진법을 건설하지 않았지.

충고하자면 전송진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게. 합체기가 되지 못하면 사용할 자격도 없을뿐더러 사제는 천운 사람도 아니니 더욱 힘들 것이야. 천운은 외부인을 배척하지 않으니 그냥 이곳에 머물며 수련하는 것은 어떻겠는가? 가끔 이 노인네의 말동무나 되어 주다 수행이 크게 늘면 다시 인족으로 돌아가도 늦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 사제가 지금 어떤 경지에 이르러 있는지 모르겠군. 인계에 있을 때보다 기운이 강력해진 것은 알겠지만 수행이 얼마나 올랐는지는 알아볼 수가 없군.”

향지례가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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