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7화. 원기(元氣)의 검
*
노인은 차분한 얼굴로 체내의 법력을 끌어올려 눈부신 붉은빛을 방출했다. 그러자 주변의 온도가 삽시간에 치솟았다. 상대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한립은 갑자기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비웃었다.
“설마 원기의 검에 당한 상처가 그리 간단히 아물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뭐라? 그게 무슨 말이지?”
한립의 말에 태연하던 도 노인이 흠칫 놀라 상처 부위를 살피고는 얼굴이 굳었다. 잘 붙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팔뚝에서 언제부턴가 피가 콸콸 새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허허, 법력을 끌어올리시면 상처는 아물지 않을 것입니다. 이게 바로 원기의 검의 진정한 무서움이지요! 법력을 대부분 억누른 상태에서 저와 싸우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정혈이 흘러나가게 두시겠습니까?”
한립은 웃음을 흘리며 소매를 털었다.
웨웽!
그의 소매 속에서 수십 개의 금빛 꽃잎이 떠올랐다. 꽃잎들은 즉시 반 척 길이로 커져 놀랍게도 수십 마리의 흉악하게 생긴 딱정벌레로 변했다.
한립의 위협을 듣고도 무표정하던 노인이 딱정벌레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더 이상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서금충! 서금충 성체를 지니고 있단 말인가?”
도 노인의 안색이 시시각각 변하며 두려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한립은 말없이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서금충들을 벌떼처럼 쏘아 보냈다.
그리고 그의 몸이 금빛 찬란한 비늘로 뒤덮였고 미간에 새까만 요목(妖目)이 나타났다. 동시에 머리 위로 금빛 빛무리가 떠오르고 그 속에서 삼두육비의 범성진마법상이 등장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한립의 몸에서 무수히 많은 금빛 뇌전들이 빽빽하게 튀어 올랐다. 그는 두 손을 펼쳐 한 손에는 원자신산을, 다른 손에는 주위에 퍼져 있는 청죽봉운검을 불러 모았다.
모든 비검들이 쏜살같이 날아들어 한 장 크기의 푸른 거검으로 뭉쳐져 그의 손에 들렸다. 그제야 한립은 서늘한 시선으로 노인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놀랍게도 그는 한 발자국 만에 열댓 장을 뛰어넘어 노인에게 쇄도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노인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의 시선이 팔뚝을 향했다가 웽웽 울며 날아들고 있는 수십 마리의 서금충으로 향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입에서 보라색 부적을 분출했다.
펑!
부적이 폭발해 보라색 안개가 생기며 그를 완전히 감쌌다. 익숙한 광경에 한립은 신형을 멈추고 허공에서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수십 마리의 서금충들은 개의치 않고 날아가 보라색 안개 속으로 돌진했다.
“…….”
그리고 한립은 하얀 돌풍을 날려 보라색 안개를 쓸어버렸다. 예상했던 대로 안개 속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곧장 명청령안을 발동해 지면을 훑고는 입에서 맑은 소리를 냈다.
잠시 후 지면에 금빛이 반짝였다.
수십 마리의 서금충들이 땅 속에서 날아올라 그를 선회하다 소매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아주 잠깐 동안 서금충 성체를 부렸을 뿐인데 한립은 의식을 절반 가까이 소모해야 했다.
그나마 연허기에 이르러 의식이 크게 늘어 다행이지 안 그랬다면 이렇게 많은 서금충들을 쉽게 방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명청령안으로 살펴보니 각치족 노인은 보라색 그림자로 변해 땅 속에서 십여 리를 달아나고 있었다.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는 것이 전력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다.
한립은 멀어지는 보라색 그림자를 보고도 쫓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검진의 위력으로 합체기 수사를 쫓아 보내기는 했지만 결코 그의 신통이 상대를 훨씬 능가한다고는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를 쫓아도 단시간 내로 따라잡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립도 분명히 알았다. 상대가 달아난 것은 원기의 검에 당한 상처 때문이기도 했지만 서금충과 자신이 마지막에 드러낸 여러 신통들 때문이었다.
솔직히 노인이 무리를 해서라도 싸웠다면 원기의 검에 난 상처가 먼저 사단이 날지, 아니면 한립이 서금충을 부리다 의식을 먼저 소모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누가 패할 지는 하늘에 달린 일이었다. 그러나 한립은 양패구상(兩敗俱傷)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녹광성에서 꽤 멀리 떨어졌다지만 각치족 병사들이 언제든 쫓아 올 수 있는 거리기도 했다.
그가 마지막에 검진의 법력을 전부 원기의 검에 불어 넣어 짧은 시간에 상대에게 중상을 입힌 이유도 각치족 추격병을 경계해서였다. 명청령안의 주시 속에 노인의 보라색 그림자는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한립은 서둘러 공법과 보물들을 거둬들이고 푸른 실로 변해 하늘을 갈랐다. 잠시 후 그는 하늘 끝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전투로 엉망이 되어버린 숲도 곧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일각 후, 하늘 끝에서 영기의 빛이 번뜩이고 두 줄기의 둔광이 기세등등하게 녹광성에서 날아왔다.
밀림에 이른 그들은 빛을 거두었다. 한 명은 아까 이곳을 떠났던 도 노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또 다른 합체급 수사인 은색 장포의 중년인이었다.
“과연 이미 떠났군요. 그 자의 속도면 벌써 십여 만 리를 달아났을 수도 있습니다.”
노인이 주위를 훑고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그렇겠지요. 미치지 않고서야 이곳에 남아있겠습니까. 그렇게 멀리 달아났다면 천현라반을 써도 소용이 없겠군요. 게다가 천현라반은 오늘 사용했으니 다시 사용하려면 3일이나 기다려야 합니다. 궁금한 것은 어떻게 겨우 연허급 존재가 도 형에게 부상을 입혔는가 하는 것입니다.”
중년인이 거대한 구덩이를 보고 생각에 잠겼다. 그 말에 노인이 멋쩍어 하다가 순간 잘려나간 어깨를 보고 표정이 사나워졌다.
“너무 방심한 탓이지요. 어쩌다 보니 상대의 검진에 휘말렸는데 그 검진의 위력이 대단하더군요. 게다가 강력한 신통과 보물도 여럿 지닌 자였습니다. 그렇지, 서금충 성충도 수십 마리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금충을요?”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어찌 적을 두고 자리를 떴겠습니까.”
노인은 분통이 터지는지 이를 갈았다.
“수십 마리라면 진정한 성족 존재가 마주쳤어도 상대하기 꺼렸을 것입니다. 다만 백 마리만 넘지 않으면 목석류의 최상급 보물로 잠시 가둘 수는 있다던데요.”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던 중년인이 곧 평정을 되찾았다.
“허허, 서금충 성체가 백 마리가 넘었으면 제가 여기에 돌아왔겠습니까. 벌써 저 멀리 달아났겠지요.”
노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성체 서금충이 몇 천 마리에 이르면 성족이라 해도 죽은 목숨이지요. 듣자니 아주 오래 전에 뇌명대륙에 성체 서금충 무리가 나타났었다고 하던데 그 수가 수만 마리에 달했답니다. 인근의 작은 종족 서너 개가 영충 무리에게 몰살당했고요.
최후에 당시 초대형 종족 하나가 현천의 보물인 파천추(破天錘)를 이용해 강제로 공간균열을 만들어냈고, 영충들을 모조리 영계 밖으로 보내버렸다더군요. 그러지 않았다면 더 많은 종족들이 화를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중년인은 기억을 떠올리며 천천히 말했다.
“말이 나와 말이지만, 서금충을 키우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랍니까? 시간과 노력은 물론이고 운이 따라야 성공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자가 한 번에 서금충 수십 마리를 부리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모종의 세력에 속한 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설마 천운13족에 속한 자는 아니겠지요?”
중년인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렇게 물었다.
“그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지니고 다니는 법기가 반응을 보이지 않았거든요. 생김새도 아주 평범했고 어느 일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일이 어렵겠어요. 그 자가 옥갑을 지니고 있다면 회수할 길이 막연하지 않습니까.”
중년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영 수사께서는 옥갑을 몇 개나 얻으셨습니까?”
“두 개 찾아냈습니다. 그 만고인이 상당히 교활하더군요. 쫓아오면 옥갑을 없애버리겠다고 협박하며 달아나지 뭡니까? 물론 제 화혈리혼대법이 암습에 강해 단숨에 그 자를 제압하고 옥갑을 찾아내기는 했지만요.”
중년인이 손바닥을 뒤집어 똑같이 생긴 옥갑 두 개를 꺼냈다. 모두 금제 부적이 붙어 있었다. 대두인은 한립과 다른 수사들에게 옥갑을 하나씩 나누어 주고도 두 개나 더 옥갑을 남겨두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노인이 소매 속에서 옥갑 하나를 꺼내들었다. 녹색 피부 이족인이 갖고 있던 옥갑이었다.
“그렇다면 총 세 개를 확보했군요. 홍멸이 전해온 소식에는 만고인의 수중에 옥갑이 몇 개나 있다고 하던가요?”
노인은 신중한 얼굴로 중년인을 보았다.
“대여섯 개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고 했었지요.”
“대여섯 개라……. 정말 일이 성가시게 되었습니다. 달아난 자가 최소한 한 개 이상은 지니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노인이 탄식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 자의 신통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아 홍멸도 그 자의 손에 죽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살려둘 수 없는 자입니다.”
중년인의 눈빛이 음산해졌다.
“이미 놓친 자를 어찌 쫓는단 말입니까?”
“저희 힘만으로는 무리지요. 허나 도 형, 인근의 성들이 본 족의 손아귀에 떨어졌습니다. 즉시 만리부로 소식을 알려 그를 잡는데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대량의 인원을 풀어 수색하는 것이지요. 어차피 위치만 확인하면 되니 수행이 높은 자를 파견할 필요도 없습니다. 찾았다는 소식이 오면 전송진으로 넘어가면 그만이지요.”
“그 방법 밖에는 없겠군요.”
도 노인은 성공 확률이 낮다고 여겼지만 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 노인은 소매 속에서 녹색 돌 조각을 꺼내 무어라 쓰자 표면에 금색 문자들이 떠올랐다. 잠시 후 노인은 글을 다 쓰고 다른 손으로 돌 조각을 때렸다.
팟!
영기의 빛이 반짝이고 문자들이 사라졌다.
“일단 전함으로 돌아가시지요. 그 만고인이 성 아래 숨겨 놓은 자폭진법은 이미 탐색 법기로 찾아 제거했습니다. 그밖에도 처리할 일이 많으니 한동안 바쁘겠어요.”
“그렇게 합시다.”
이렇게 둘은 둔광을 일으키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 *
한립은 쉬지 않고 백만 리를 날아갔다. 각치족들이 도저히 추격할 수 없는 거리에 이렀다고 여겨질 때쯤 겨우 둔광의 속도를 늦추었다.
오랜 시간 전력으로 날아 확실히 힘이 부쳤다. 둔광 속의 한립은 저물탁에서 두 개의 비취색 수정돌을 꺼냈다. 최상급 나무 속성 영석이었다. 진귀한 영석이었지만 한립은 아끼지 않고 영력을 흡수했다.
그리고 작은 산에 내려서 커다란 나무 아래 몸을 숨기고 가부좌를 틀었다. 춘려검진의 위력이 강한 만큼 소모되는 법력도 막대했다. 특히 원기의 검으로 날린 마지막 일격은 하마터면 그의 원기를 상하게 할 뻔 했다.
그가 가부좌를 틀고 휴식을 취하는 동안 다행히 그의 머리 위로는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았다. 반나절이 흐르자 한립은 대부분의 법력을 회복했다.
그는 기쁜 얼굴로 눈을 뜨고는 다시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올랐다. 푸른 빛줄기는 백여 장을 날아가다 모호해지며 보이지 않았다.
둔광 속에서 한립은 옥간 하나를 꺼냈다. 바로 화호군도에서 청소에게 얻은 인근 지도였다. 화호군도와 뇌명대륙의 관계가 단절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마 지도상의 위치는 크게 변동이 없을 것이다.
그는 의식을 불어넣어 적당한 경로를 찾기 시작했다.
각치족들이 장악한 것을 아는 이상 인근 성들로는 갈 수 없었다. 그 대신 인근 성들을 피해 천운13족의 구역에서 가장 크다는 금갑성(金甲城)으로 갈 예정이었다.
금갑성은 아주 중요한 길목에 위치해 가장 큰 성이자 요새였다. 그래서 항시 대량의 정예병들이 주둔하고 고계 수사들도 상당수 머물고 있다고 했다.
지도에 표시된 바가 틀리지 않다면 각치족들은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지 않고는 바로 금갑성을 치지는 못할 것이다.
한립은 하늘에 뜬 여러 개의 태양을 보고 방향을 정한 다음 속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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