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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36화 (693/2,000)
  • 936화. 혼천대(混天袋)와 호리병

    *

    눈앞의 도 노인은 한립이 경지가 훨씬 떨어지는 것을 알고 무수히 많은 천지원기를 불러들여 검진을 공격했다. 상대의 노련한 한 수에 한립은 울적해졌다.

    하지만 청원자가 연허기 수행으로 합체급 수사를 상대했을 때는 대응할 만한 대책이 있었을 것이다. 한립은 길게 숨을 내쉬며 열손가락을 빠르게 튕겨 법력을 아낌없이 검진 속으로 불어넣었다.

    안쪽으로는 불기둥이 날뛰고 바깥에서는 천지원기가 달라붙는 통에 푸른빛의 장막이 반짝거리다 검빛들이 동시에 사라졌다.

    곧이어 천지원기에 억눌렸던 빛의 장막이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며 꽃잎을 오므리고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우웅!

    푸른빛의 소용돌이가 빛의 장막을 뒤덮자 천지원기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검진을 억누르던 천지원기가 검진 속으로 흡수된 것이다.

    불안하게 반짝거리던 빛의 장막이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막 불기둥의 힘을 빌려 빛의 장막을 뚫고 나가려던 도 노인은 바깥의 변화를 감지하고는 깜짝 놀랐다.

    ‘이럴 수가!’

    노인은 검진에 이런 현묘한 신통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렇게 되면 그가 결집시킨 천지원기로 검진을 강화시키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노인이 분노해 고함을 쳤다. 검진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만한 소리였다. 그러자 검진 바깥에 결집해 있던 천지원기들이 갑작스런 돌풍에 휩쓸려 흩어졌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천지원기를 흡수한 푸른빛의 장막은 비취색으로 탐스럽게 빛나며 이전보다 배는 두꺼워져 있었다.

    자신이 힘들게 불러들인 천지원기로 상대의 검진을 강화시키다니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한 것이 알려지면 두고두고 족 내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도 노인은 분노한 나머지 헛웃음이 나왔다.

    그는 자신의 뒤통수를 내리쳐 붉은색과 노란색의 영기의 빛을 불러내 허공에 떠있는 거대 환영 속으로 들어갔다. 한립이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허상은 그대로 노인의 본체로 뛰어 들어갔다.

    도 노인은 고개를 쳐들고 울부짖으며 흉악하게 변해갔다. 예닐곱 장으로 불어난 몸에는 새빨간 비늘이 뒤덮여 있었고 미간에는 뿔이 반 척 가까이 자라났다.

    노인은 순식간에 요마와 비슷한 몰골이 되었다. 그가 사악하게 미소 지으며 두 손을 뒤집었다. 그러자 붉은 안개가 어른거리는 자그마한 금색 깃발과 남색빛의 포대 자루가 나타났다.

    노인은 두 가지 보물을 주저 없이 허공에 던졌고 기괴한 주술을 끊임없이 외웠다.

    작은 깃발은 펄럭이며 금색 화염을 분출했고, 울룩불룩하게 꿈틀거리던 포대 자루 안에서는 남색 모래 바람이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노인이 입을 벌려 붉은 구름을 내뿜었다.

    그것들은 바람과 불의 기운과 하나로 합쳐졌고 삼색 풍화(風火)의 불기둥을 만들어냈다. 불기둥은 엄청난 기세로 검진을 공격했다.

    한립은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춘려검진의 다양한 신통을 연달아 발휘했다. 위력적인 환술들을 아낌없이 펼친 것이다.

    하지만 환술로 만들어낸 풍경과 공격들은 삼색 불기둥에 말려들어 분분히 사라졌다. 춘려검진의 위력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푸른빛의 장막도 풍화의 힘이 계속해서 충돌해 오자 깜빡깜빡 거리며 불안하게 요동쳤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립이 기겁했다. 그가 놀란 이유는 절반이 삼색 풍화의 힘 때문이기도 하지만 도 노인 뒤에 나타난 남색 포대 자루 때문이었다.

    어쩐지 눈에 익다 싶었는데 혼돈만령방에 올라있는 전설적인 통천령보 혼천대(混天袋)와 모습이 매우 유사했다.

    그것은 혼돈만령방에서 중간 정도에 위치했지만 희귀한 신통을 몇 가지 지니고 있어 꽤 이름이 높았고, 아주 오래전 혼천대를 지니고 있던 인족의 실력자가 목숨을 잃고 행방이 묘연해진 보물이기도 했다.

    당시 이 보물을 위해 수많은 고계 수사들이 인족과 요족 양쪽 지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혼천대가 어찌 뇌명대륙의 각치족 수중에 있단 말인가!’

    한립은 당황했지만 생각을 정리하곤 표정이 차분해졌다. 소문에 따르면 혼천대는 검진 안에서 보여주고 있는 위력 이상을 가진 보물이었다. 그렇다면 모조품이거나 아예 다른 보물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래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청원자가 검진을 이용해 합체기 수사를 상대했다는 것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마 청원검결의 나머지 후반부 공법을 익힌 후에야 검진의 위력을 훨씬 드높였을 것이다.

    똑같이 청죽봉운검을 지니고 정순한 나무 속성을 지니도록 제련했지만 상승 공법의 보조 없이 더 큰 위력을 내기는 어려웠다. 다행인지 이번에는 상당이 많은 양의 천지원기를 흡수한 덕에 그나마 적잖은 신통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고민하다 무언가를 떠올렸다.

    ‘강력한 신통이지만 효과가 있든 없든 술법을 펼치고 나면 검진은 붕괴된다.’

    하지만 어차피 검진이 파훼될 거라면 시도해볼 수밖에 없었다. 이마저도 효과가 없다면 경칩12결의 여러 변신술을 이용해 전면전을 벌일 예정이었다. 그 또한 안 통하면 여러 부적들과 서금충도 남아 있었다.

    합체기 수사와 싸우며 지금까지 태연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신통들을 믿어서였다. 한립은 곧바로 주술을 읊기 시작했고 동시에 불가사의한 장면이 검진 속에서 펼쳐졌다.

    고공의 푸른빛의 장막이 모호해지고 갑자기 덩굴 식물들이 자라나 퍼져나갔다. 작았던 덩굴은 빠르게 커져 순식간에 몇 장에 이르는 거대한 식물로 변했다.

    구불구불 자라난 덩굴에는 비취색의 작은 호리병박이 열렸다. 손바닥 크기의 호리병박은 겉보기에는 무척 평범해 보였다.

    우웅!

    그런데 빛의 장막 속 푸른 연꽃들이 부르르 몸을 떨며 호리병박 속으로 무수히 많은 작은 비검 그림자를 날려 보냈다. 이에 호리병박 표면에 푸른 검의 흔적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보일 듯 말 듯 흐릿했지만 대량의 오색 광채가 덩굴을 타고 호리병박 안으로 들어가자 검의 흔적은 더욱 선명하게 오색 빛을 뿜어냈다.

    도 노인은 무슨 신통인지 모르지만 호리병박의 출현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고민하지 않고 호리병박에 삼색 풍화의 힘을 날려 보냈다.

    호리병박이 평범한 보물이었다면 삼색 풍화의 힘을 담은 거대 손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허공에서 갑자기 한립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어라.”

    호리병박이 데구루루 굴러 뒤집어 지더니 그 안에서 한 척 길이의 빛의 검이 빠져나왔다. 오색 광채로 빛나는 검은 표면에 크고 작은 주술 문자들이 어른거렸다.

    호리병박과 덩굴은 빛의 검을 방출하는 순간 영기의 빛으로 변해 흩어졌다.

    파앗.

    빛의 검이 번뜩이며 한 장 길이의 거검으로 변했다. 이어서 거검은 날아드는 삼색 거대 손을 향해 허공을 갈랐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아 전혀 위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콰쾅!

    그런데 삼색 거대 손이 아무런 조짐도 없이 돌연 둘로 갈라져 폭발했다. 거검은 천천히 방향을 틀어 노인을 조준했다.

    도 노인의 안색이 달라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노인은 오색빛의 검을 보고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입을 벌려 붉은빛의 비검을 분출했다. 비검이 나타나는 순간 붉은빛으로 변해 오색빛의 검으로 쇄도했다.

    그 모습에 콧방귀 소리가 허공에 울리더니 오색빛의 검이 천천히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붉은빛이 우뚝 멈춰서 새빨간 비검의 원형을 드러내고는 그대로 추락해버렸다.

    “……!”

    노인은 비검이 손상을 입자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의식과 연계되어 있었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오색빛의 검도 연달아 두 번을 베어내자 눈을 찌르던 밝은 빛이 훨씬 암담해졌다. 검신의 주술문자들도 적잖이 흩어져 얼마 남지 않았다.

    휘이이익!

    노인이 길게 휘파람을 불자 사방을 난도질하던 풍화의 힘이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삼색빛이 크게 빛나며 고풍스런 삼색 갑옷이 노인의 몸에 나타났다.

    삼색 갑옷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철통같이 노인을 방어했고, 두 눈이 있는 자리만 투명한 수정으로 남겨놓아 앞을 볼 수 있게 했다. 이어 노인의 두 손에 고풍스런 거검 한 자루가 생겨났다.

    노인은 두 손으로 거검을 쥐고 횡으로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놀라운 살기(煞氣)가 퍼져나갔다. 푸른빛의 장막 속에서 이를 지켜보던 한립이 눈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는 지금 검진이 흡수한 천지원기를 이용해 간신히 청원자의 ‘원기검호(元氣劍葫)’ 신통을 펼치고 있었다. 이 신통은 환술로 만들어낸 호리병박에 72개의 검기를 심어 천지원기로 배양하는 위력이 무궁무진한 원기(元氣)의 검이었다.

    원기검호의 위력이 대단한 만큼 소모되는 천지원기의 양도 실로 어마어마했다. 겨우 두 번 베었을 뿐인데 검진이 흡수한 천지원기중 절반이 사라졌다.

    그러나 상대가 이전의 위력을 보고 대비를 마쳤다면 이번에야 말로 죽은 목숨일 것이다. 원기의 검은 전부 천지원기와 법력의 양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한립은 이번 일격에 남은 힘을 전부 털어 넣을 작정이었다. 그는 냉소하며 한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푸른빛의 장막에서 연꽃들이 빙글빙글 돌며 빛기둥으로 변해 공중의 빛의 검으로 쏘아져나갔다.

    우웅!

    푸른빛이 하늘을 뒤덮자 장막은 더욱 얇아져 부들부들 떨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별안간 허공에 72개의 청죽봉운검들이 조금 어둑해진 모습으로 자리를 지켰다.

    한립이 검진을 유지하는 영력 전부를 원기의 검에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검진의 비호가 없어졌기에 한립의 신형도 고공에서 나타났다.

    빛의 검은 대량의 영력을 흡수하고 배로 커져 검신이 무척 또렷해 보였다. 빛깔도 기존의 다섯 가지 색깔 중 푸른색의 비중이 훨씬 컸다.

    “베어라!”

    한립의 손끝이 도 노인을 가리키자 빛의 검이 천천히 움직이며 허공을 갈랐다. 이에 도 노인도 크게 기압을 넣었고 수중의 고풍스런 검으로 빛의 검 방향을 갈랐다.

    귀를 찌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며 한 줄기 가느다란 수정빛과 굵은 삼색 검기가 동시에 나타나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그리고 가느다란 수정빛이 삼색 검기의 표면을 스치고 종적을 감추었다. 그리고 삼색 검기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버렸다. 그것을 본 노인은 곧바로 들고 있던 검으로 앞을 막았다.

    챙!

    맑은 충돌음이 울렸고 노인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방패 역할을 한 거검의 표면에 사선으로 푸른빛이 생겨나며 검신 절반이 소리 없이 미끄러졌다.

    거검은 두 동강이 났고, 거검 바로 뒤에 있던 금색 깃발은 바르르 떨다 눈부신 금빛을 폭발하며 조각나 떨어졌다.

    이에 노인은 무표정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그가 입고 있는 삼색 갑옷은 다행히 아무 손상도 입지 않은 것 같았다.

    “…….”

    한립이 동공을 수축하고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소매 속에서 조용히 손을 움직였다.

    “이번 공격에 이름이 있는가?”

    갑옷 속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의 질문에 한립은 움찔했다.

    “있습니다. 원기의 검을 상대해 본 소감이 어떠신지요?”

    “흥, 확실히 만만치 않구나. 노부도 완전히 막아낼 수 없었으니 말이야.”

    그런데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삼색 갑옷 중간에 희미하게 푸른 선이 생겨나더니 멀쩡해 보이던 갑옷이 푸른 선을 따라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갑옷이 떨어지는 순간 노인의 커다란 팔 한쪽도 매끄럽게 잘려 나갔다. 그의 어깨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와 주변을 피로 물들였다.

    그러나 노인은 잘려나간 어깨를 보고서도 인상을 찡그리지 않았다. 그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잘려나간 어깨를 털어냈고 떨어졌던 팔이 쉭! 하고 다시 돌아와 상처 부위에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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