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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34화 (691/2,000)
  • 934화. 끝까지 쫓다

    *

    주인을 잃은 은색 뇌전은 힘없이 사라지고 하얀빛 속 인영은 멀쩡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한 손에서 금빛을 뿜어 도마뱀 영수를 조각내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후훗.”

    갑자기 얇은 가죽 속에서 이족인의 득의양양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말라비틀어진 몸이 갑자기 부풀어 오르고 더듬이 이족인과 똑같이 생긴 자가 나타났다.

    이족인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살피며 기이한 웃음을 흘렸다. 그가 한 손을 들어 하얀빛 속 인영에게 손짓했다. 하얀빛이 천천히 다가와 사그라지고 그 안의 인물이 정체를 드러냈다.

    그는 바로 각치족의 영 씨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은 꼭두각시처럼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혈리혼대법(化血離魂大法)이 역시 대단하구나! 모든 피를 연화시키기 전에 다시 펼칠 수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 그렇지 않았으면 강적을 상대할 때 유용하게 쓸 수 있을 터인데.”

    이족인이 눈앞의 중년인을 보며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그는 곧 저물탁에서 온갖 잡다한 물건들을 쏟아내고는 의식으로 내용물을 훑었다. 그러나 진귀한 물건들이 몇 개 보이기는 했지만 그가 찾는 물건은 없었다.

    그는 다시 푸른 기운으로 쏟아 놓은 물건을 회수하고는 품에서 두 장의 부적과 몇 가지 작은 물건들을 찾아냈다. 이족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두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초록빛이 정수리에서 반짝이고 반투명한 인영이 떠올랐다. 그러자 이족인은 바람 빠진 가죽 공처럼 다시 쪼그라들어 바닥에 떨어졌다.

    반투명한 인영은 오래 허공에 남아 있지 않고 그대로 중년인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중년인이 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감았다 뜨자 온몸에 초록빛이 흘렀다.

    한참 후 중년인은 길게 숨을 토해냈고 눈빛은 이전보다 더 또렷해 보였다.

    한립보다 한참 전에 출발한 녹색 피부 이족인은 모호한 그림자가 되어 땅을 펄쩍펄쩍 뛰어날 듯이 이동하고 있었다. 둔술을 펼칠 수 없었기에 아직도 녹광성 수 백 리 밖을 지나는 중이었다.

    녹색 피부 이족인은 이 점이 가장 걱정스러웠지만 자신이 지닌 은닉 비술을 믿었다. 성족급이 아니면 일반적인 각치족은 그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일행과 헤어진 후부터 끊임없이 옥갑 속 물건의 정체를 유추하고 있었다.

    그가 오매불망하던 만묘단과 바꿀 수 있을 물건이라면 얼마나 대단한 보물이라는 소리인가. 만일 옥갑을 열어 볼 수 있다면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묵록인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와 멀지 않은 땅속에 보라색 그림자가 소리 없이 따라붙어 그를 감시했다. 시간이 흘러 보라색 그림자는 관찰을 마쳤는지 갑자기 보라색 실로 변해 묵록인 발밑으로 이동했다.

    그 순간 묵록인의 두 발이 땅에 닿았다.

    콰쾅!

    땅이 터지고 굉음이 울렸다. 거대 손 한 쌍이 새빨간 빛을 머금고 녹색 피부 이족인의 발목을 붙들었다. 묵록인은 깜짝 놀랐지만 재빨리 전신의 기운을 일으켜 둔술을 펼쳐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발목을 잡은 두 손이 강철처럼 단단해 움직일 수 없었다. 묵록인은 두 발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는 안색이 급변하며 입을 벌려 거대 손을 향해 하얀빛을 내뿜었다.

    탱!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작은 비검이 튕겨나갔다. 그러나 거대 손은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다. 묵록인이 기겁해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더욱 강력한 신통을 부리려 했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코웃음 소리가 들리고 거대 손에서 요사스런 붉은빛이 퍼져 묵록인을 뒤덮은 것이다. 붉은빛은 엄청난 고온으로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오며 묵록인은 붉은빛 속에서 그대로 타들어 갔다.

    * * *

    같은 시각, 울창한 숲 근처에서 각치족 연허급 수사 두 명이 허공에 멈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네 마리의 교룡들은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정말 눈치가 빠른 자입니다. 접근하자마자 기운을 감쪽같이 감추었어요. 우교들도 찾아내지 못한다면 어찌해야 할지.”

    각치족 한 명이 조급한 기색을 드러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상대는 어차피 우리와 동급인 데다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인근에 숨어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시간을 끌며 대인들이 오시기를 기다리면 그만 아닙니까.”

    또 다른 이가 차분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 방법밖에 없을 듯하군요.”

    그들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커다란 밀림 속에 대두인이 어두운 얼굴로 숨어 있었다. 그는 기이한 회색 피풍의를 입어 기운이 전혀 새어나가지 않았다.

    * * *

    어느 산맥 위를 희미한 빛줄기가 빠르게 날아갔다.

    둔광 속에는 비늘 갑옷으로 온몸을 뒤덮은 악어 머리 이족인이 전력을 다해 달아나고 있었고 그 뒤로는 각치족 연허급 수사 두 명이 비차를 타고 몰래 따라오고 있었다. 비차 뒤에는 네 마리의 우교들도 멀리서 그들을 따라갔다.

    * * *

    녹광성을 중심으로 연허급 이족인들은 전부 각치족 고계 수사의 추적을 받고 있었다. 한립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고공에서 의아한 눈빛으로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우교 두 마리가 태일화청부로 허상화 된 그를 찾아내지 못하고 수십 장 아래에서 맴돌고 있었다. 이에 한립은 눈빛이 사나워졌다. 성가신 영수들을 없애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화신급 존재인 우교 두 마리는 그의 상대가 되지 않지만 그는 겨우 녹광성을 천여 리 밖에 벗어나지 못했다. 각치족에 정말 합체급 수사가 있다면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걸리고 말 것이다.

    그는 고민을 거듭하며 살심을 가라앉히고 신형을 날려 조용히 사라지려 했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한립이 막 열댓 장을 날아가는데 갑자기 보랏빛이 반짝이고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필 이 시점에 태일화청부가 효력을 다한 것이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두 머리의 우교들이 그의 존재를 감지하고는 기쁨에 차 한립을 향해 거세게 날아들었다.

    한립은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곧바로 수결을 맺어 수정 날개 한 쌍을 불러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괴상한 교룡을 보며 그는 코웃음을 쳤다. 평범한 소리였지만 우교들의 귀에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우교는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은 엄청난 두통을 느끼며 갑자기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때 한립은 두 날개를 펄럭여 청백색 뇌전 속으로 사라졌다가 추락하는 우교 옆에서 나타났다.

    푸른 검빛이 날아가 우교를 한 바퀴 돌자 금색 교룡의 몸뚱이가 둘로 갈라졌다. 혼백조차 검빛에 당해 달아나지 못했다.

    한립은 즉시 방향을 틀어 푸른 실로 변해 이번에는 나머지 우교 옆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손이 우교의 몸을 건드리자 오색 화염이 나타나 교룡의 몸을 얼음덩이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손끝에서 금색 뇌전이 튀어나가 우교를 산산조각냈다. 녹색 빛덩이가 달아나려다 금빛 뇌전을 맞고 흩어졌다. 한립은 순식간에 두 마리의 우교를 참살했다.

    그는 바로 푸른 빛줄기로 변해 허공을 갈랐다. 이제 더는 기척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각치족에 합체급 수사만 없다면 이미 천 리를 날아왔으니 그를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라 여긴 것이다. 만약 합체급 수사가 있다면 이미 태일화청부가 효력을 다하는 순간 위치를 들켜 다시 숨어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빨리 달아나는 것이 최선이었다.

    우교들이 추락하는 순간 각치족의 노인과 중년인은 동시에 한립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인의 발밑에는 수북하게 잡다한 물건들이 쌓여 있었고 한 손에는 옥갑을 들고 있었다.

    “흐음.”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한립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침음했다. 그리고 발밑의 물건들과 옥갑을 회수하고는 붉은빛으로 변해 날아올랐다. 중년인 역시 할 일을 마치고 다른 목표를 향해 날아가는 중이었다.

    한립이 있는 방향을 연신 돌아보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방향을 틀지 않고 원래 목표를 향해 속도를 높였다. 곧 다른 수사를 찾기 일보직전인데 이제 와서 방향을 틀기가 아쉬웠던 것이다.

    일단 이쪽을 처리하고 가도 늦지 않았다. 다행히 각치족 고계 수사가 한립을 추격하는 것을 미루었다.

    한립은 우교들을 죽이고 놀라운 속도로 반 각 정도 날아가다가 뒤를 돌아보고 표정이 달라졌다. 하늘 끝에서 붉은빛이 반짝이며 붉은 둔광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붉은빛은 금방 거리를 좁혀와 순식간에 백여 장 밖에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립보다 속도가 배는 되는 것 같았다. 한립은 둔광 속 인물을 훑고는 흠칫 놀랐다.

    ‘합체급 수사가 아닌가!’

    합체 초기라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한립은 재빨리 상황을 판단하고 평정을 되찾았다.

    한립은 날개를 펄럭이며 푸른 실로 변해 더욱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속도가 거의 배로 빨라져 그를 뒤쫓는 붉은 둔광과 거의 맞먹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인근 하늘에서 사라졌다.

    그를 쫓아오는 붉은 빛줄기는 각치족의 도 씨 노인이었다. 천현라반으로 손쉽게 위치를 알아내 쫓아왔는데 한립은 그가 다가가기도 전에 엄청난 속도로 멀어졌다.

    그것을 본 노인은 내심 놀라웠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상대의 수행이 높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했다.

    노인이 붉은빛을 북돋우며 그 뒤를 바짝 뒤쫓았다. 한립과 노인은 마치 유성우처럼 하늘을 가르며 천여 리를 벗어났다. 그러나 뒤쪽의 붉은빛은 아직도 푸른 실을 따라잡지 못했다.

    이에 태연하던 노인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가 둔술에 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의식으로 훑으니 상대는 상족 7계의 존재였다. 그런데 자신이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은 반쯤 합체급에 가까웠고 전투 경험도 풍부했다. 그는 돌연 둔광을 멈추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보라색 부적을 꺼냈다. 갑자기 보라색 안개가 폭발적으로 퍼져 주변을 뒤덮었다. 이에 붉은 둔광을 주시하던 한립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당장 둔광을 멈추고 푸른빛 속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상대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보라색 안개가 꿈틀거리다 흩어지더니 노인이 어느샌가 종적을 감추었다.

    한립은 곧바로 의식을 방출해 주변 수십 장을 살폈다. 그러나 도 씨 노인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한립은 재빨리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남색빛을 일렁였다. 그래도 주변은 텅 비어 있었고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한립은 정말 가슴이 철렁했다. 안 그대로 합체급 수사인데 은신술이 이렇게 뛰어나면 그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립도 평범한 수사는 아니었기에 곧바로 둔광을 일으켜 다시 푸른 실로 변해 달아났다. 상대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모르는 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상대가 자신을 추격한다면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는 푸른 실로 변해 백 장을 소리 없이 돌파해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한립은 날아가면서도 명청령안을 이용해 주위를 살폈다. 잠시 후 그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땅속 깊은 곳에서 보라색 인영이 아무렇지 않게 이동하고 있었다.

    바로 보라색 안개 속에서 사라졌던 각치족 노인이었다. 어떤 신통을 썼는지 보라색 안개로 순간이동을 하고 수십 장 아래 지하에서 그를 은밀하게 쫓고 있었다.

    한립도 이제야 그것을 알아챘다. 명청령안을 이용해도 모호하게 보이는 상대의 은신술이 정말 대단하기는 했다. 게다가 토툰술도 비범해 흙 속을 허공보다 더 빨리 돌파하고 있었다.

    땅속은 그의 걸림돌이 되지 못했고 붉은빛이 지나는 곳마다 노란빛의 점들이 흘러나와 붉은빛으로 흡수되었다. 한립이 전력을 다해 날고 있음에도 지하의 붉은빛은 조금씩 거리를 좁혀 왔다.

    이에 한립은 무척 놀랐으나 멈출 생각은 없었다. 이에 괴이한 둔술을 펼치며 그를 따라가고 있는 도 노인은 답답해졌다. 그가 방심한 사이 따라잡을 줄 알았는데 즉시 전력을 다해 달아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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