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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33화 (690/2,000)

933화. 천현라반(天玄羅盤)

*

“하아, 저는 그저 홍멸 그 아이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노인이 생각에 잠겨 있다 애석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 아이가 화월족과 우리 각치족의 피를 모두 지녔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게다가 수사의 염계(炎系)라던데 도 형과 연관이라도 있는 아이였습니까?”

“영 형께 우스운 꼴을 보입니다. 사실 홍멸은 저의 아주 먼 후인 벌 되는 아이였습니다. 어쩌다 그 아이를 찾아 지금까지 천운의 여러 종족들 틈에서 숨어 살게 하였지요. 재능이 뛰어난 편이라 언젠가 제 수준에도 이를 거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염계 일족의 장로들은 그 아이가 첩자의 신분을 벗는 대로 비술을 이용해 완전히 각치족 신분을 되찾아 주려했었지요.”

“허허, 도 형 그리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우리가 흉수를 찾아 도륙을 내주면 되는 일 아닙니까. 혹시나 다른 이들에게 들킬까 그 아이 몸에 표식을 남겨 두지 않은 것이 아쉽습니다. 그래서 전함의 대부분을 방출했으니 곧 찾아낼 수 있겠지요.”

중년인이 미소를 머금었다.

“장로님들께서 친히 천현라반(天玄羅盤)을 내려주신 것은 그들이 절대 도망가지 못하게 하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다만 걸리는 점은 그 물건이 한 개가 아니고 만고족 인물의 수중에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급한 마음에 상대가 물건을 훼손이라도 한다면 큰일 아닙니까. 반드시 온전히 물건을 회수해 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셨는데요.”

“그건 저도 걱정입니다. 우리가 전함에서 아직 나서지 않은 것도 목표를 특정한 후에 빠르게 제압하기 위해서인데 말입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 물건이 누구에게 있는지 홍멸이 표식을 남기면 우리가 나서기로 되어 있었는데 말입니다. 홍멸이 죽어 물건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으니 문제입니다.”

노인의 걱정에 중년인도 미간을 좁혔다.

“골치가 아프기는 하지만 해결 못할 문제도 아닙니다. 아무리 대군이 쳐들어와 상황이 급하다고 해도 그런 보물을 수행이 낮은 자에게 넘겼을 리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분명 상족 중상계 수사에게 넘겼을 것입니다. 물론 성족이 존재한다면 분명 그자의 손에 있을 테고요.”

노인이 천천히 상황을 분석했다.

“그렇다면 추적할 대상은 크게 줄어드는 군요. 상족 중계는 우교(羽蛟)에게 맞기면 될 것이고 상 3계의 존재들은 우리가 친히 나서 봅시다.”

중년인도 흔쾌히 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섯 명의 대장 중 전함 수비를 위해 둘만 남기고 전부 출동해야 합니다. 지금쯤이면 저계 이족인들의 처리가 끝나갈 테니, 천현라반이 고계 수사들의 위치를 쉽게 찾아낼 수 있을 테지요.”

마지막으로 노인이 중얼거렸고 중년인은 눈을 빛내며 생각에 잠겼다.

* * *

그때 녹광성 인근에는 거대 쌍두 독수리와 통나무배의 은색 갑옷 병사들이 곳곳을 샅샅이 수색하고 있었다.

아직 성에 숨어 있던 이족 수도자들은 십중팔구는 들켜 도륙을 당했고 은신술이 뛰어난 소수만이 마음을 졸이며 버티고 있었다.

몇몇 고계 수도자들은 벌써 하늘 너머로 종적을 감췄으나 날개가 달린 금색 교룡이 바짝 추적해 이미 잡혔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갑옷 병사들과 쌍두 독수리가 성 주변만 돌아다니고 지원을 나갈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우교’라 불리는 날개 달린 교룡을 믿고 있는 듯했다.

쌍두 독수리와 갑옷 병사들은 땅 속과 깊은 산속을 가리지 않고 수색했고 가끔 한 두 개의 빛줄기가 숨어 있다 빠르게 날아올랐다. 그러면 주변의 쌍두 독수리와 통나무배들이 몰려들어 달아나려는 이족 수도자를 사살했다.

그때 한립은 벌써 녹광성과 7, 80리 밖을 날고 있었다. 화월족 첩자와 상당히 격렬히 싸웠지만 조용히 펼쳐둔 춘려검진 덕분에 영기의 파동이 밖으로 퍼져나가지 않았다.

심지어 화월인이 마지막에 청동 종을 울려 내보낸 음파도 춘려검진의 현묘한 위력에 전부 흡수당했다. 그래서 녹광성 지척에서 전투가 벌어졌음에도 각치족 대군의 눈길을 끌지 않고 무사히 달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립은 화월인의 원신을 멸한 다음 바로 옥갑과 빨간 단환을 챙겼고, 그 후에는 시체를 말끔히 태웠다. 보물과 검진을 챙긴 그는 태일화청부를 이용해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한립과 동급 존재라도 그를 찾기 무척 어려울 것이다. 물론 도처에서 수색중인 각치족 병사가 그를 발견할 확률은 더욱 낮았다. 이렇게 한립은 수차례 쌍두 독수리와 통나무배를 지나쳐 유유히 녹광성에서 멀어졌다.

대두인과 녹색 피부인은 한립이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도 몸을 숨기고 달아나야 해서 그리 멀리는 가지 못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수백 리 내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런 생각을 하며 한립은 병사들이 가장 적은 방향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 그는 녹광성에서 수백 리 떨어진 곳에 이를 수 있었는데 육안으로는 어떤 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태일화청부를 거두지 않았다. 각치족 인물들이 특수한 비술이나 보물을 써서 주변 천 리를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립의 이런 조심스런 태도도 전부 헛수고였다. 그가 녹광성에서 멀어지는 동안 은색 섬에서 여섯 개의 검은 그림자가 떠올랐다.

그중 두 명은 대전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도 씨 노인과 영 씨 중년인이었고, 나머지 넷은 모습은 다르지만 어느 정도 신분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나침반을 닮은 금색 보물을 지니고 있었는데 나침반 표면에 기괴한 모양과 금빛 주술 문자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나침반의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신중하게 지켜보았다.

“됐다, 드디어 가장 강한 존재들을 찾아냈다. 너희는 둘씩 나뉘어 각각 한 명씩 추적하고, 나머지 둘은 우리가 처리하도록 하겠다. 반응 강도로 보아 그들은 상족 상 3계의 존재일 것이다.

그러니 무턱대고 공격하지 말고 우리가 나머지 둘을 처리하고 합류할 때까지 기다린다.

주의할 것은 그들이 무언가를 훼손하려고 하면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교를 각각 두 마리씩 붙여 줄 터이니 절대 실수 없도록!”

노인이 나침반에서 시선을 떼고 냉랭히 분부를 내렸다.

“예!”

“전부 위치를 기억했으면 바로 움직인다. 가장 가까운 자가 벌써 수백 리를 달아났다.”

네 명은 연달아 고개를 숙였고 도 노인이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은빛 섬에서 금빛이 반짝이고 열 마리의 금색 우교들이 날아올라 그들의 머리 위를 선회했다.

노인이 손짓하자 네 명의 사람들과 여덟 마리의 우교들이 어딘가로 날아갔다. 우교 두 마리만이 얌전히 자리를 지켰다. 수하들을 보내고 노인은 다시 나침반을 확인했다.

바늘은 천천히 이동하다 어딘가를 가리키며 움직이지 않았다. 바로 한립이 날아가고 있는 방향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나침반이 이쪽 방향을 가리킬 때 보이는 반응이 돌연 강해졌다 약해졌다 들쑥날쑥합니다. 강할 때는 어떤 방향보다 강하고 약할 때는 아주 미미합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노인은 나침반이 또 바르르 떨며 반응을 보이자 의심스런 눈길을 보냈다.

“특별한 보물을 지니고 있어 천현라반의 감응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법력이 강한 자가 스스로의 수행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중년인이 침음하다 답변을 내놓았다.

“그렇겠지요. 전자는 그렇다 치고 후자라면 절대 놓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시지요, 일단 우교 두 마리를 보내 이 자의 실력을 가늠해 보고 그동안 다른 쪽을 처리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도 형의 생각대로 하시지요. 일이 잘 풀리면 반나절이면 상황이 끝날 것입니다.”

노인의 제안에 중년인이 허허 웃음을 흘렸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일갈하자 남은 우교 두 마리가 허공을 선회하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노인과 중년인도 곧바로 빛줄기로 변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중 하나는 도중에 하얀빛을 반짝이다 점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고, 다른 하나는 십여 리를 날아가다 펑! 하고 터져 보라색 구름으로 변해 사라졌다.

곧 구름마저 흩어지고 허공은 텅텅 비었다.

* * *

언덕 위 상공, 누런 얼굴에 더듬이 한 쌍이 솟은 이족인이 도마뱀 영수를 타고 저공비행을 하고 있었다.

도마뱀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은은하게 뿜어내는 노란 기운이 아래쪽 토양과 색깔이 똑같았다. 은밀하게 숨어서 이동하는 도마뱀과 이족인을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족인은 영수를 타고 날아가면서도 수시로 뒤쪽을 살폈다.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는 연허 초기로 대두인 일행의 눈을 피해 녹광성에 숨어 있었던 고계 수사였다.

더듬이 이족인이 어떻게 대두인의 감시를 피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괜히 수행이 높은 자들과 어울려 각치족의 주의를 끌고 싶지 않았다. 그는 성문을 개방해 저계 수사들이 떠나는 동안 조용히 그 틈에 섞여 성에서 빠져나왔다.

지금은 녹광성을 천여 리나 벗어났고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충분히 안전한 상황이었으나 웬일인지 표정은 시종일관 어두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들고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속한 심매족(心魅族)은 뇌명대륙의 소규모 종족으로 위기를 직감하는 희귀한 신통을 지니고 태어났다. 그리고 이런 직감 때문에 그는 경계심을 늦추지 못하고 사방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수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그는 타고 있던 도마뱀을 멈추게 했다.

더듬이 이족인의 새빨간 눈동자가 주의 깊게 사방을 살폈다. 육안뿐만 아니라 그의 더듬이도 이리저리 굽어지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쉐액!

그때 갑자기 허공에서 하얀빛이 터져 나오며 그 안에서 누군가 뛰쳐나와 검기를 날렸다. 금빛이 무성한 검기가 요란하게 빛나며 더듬이 이족인을 노렸다.

그러나 이족인도 미리 경계하고 있었기에 순식간에 검은 방패를 불러냈고, 방패가 진동하며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의 3색 보호막을 펼쳤다.

그리고 그가 타고 있던 도마뱀이 불현듯 몸을 털고 일어나 검은 그림자로 변했다. 검은 그림자는 꼬리를 휘두르며 하얀빛 속의 인물을 향해 녹색 액체를 분사했다.

그러나 하얀빛 속의 인물은 검은 방패를 그대로 지나쳐 순식간에 3색 보호막을 잘랐다. 검은 방패는 소리 없이 두 조각이 나 떨어졌고 이족인의 표정은 미세하게 달라졌다.

웅!

금빛 검기와 3색 보호막이 만나 굉장한 빛을 뿜었다. 그리고 녹색 액체와 도마뱀의 두툼한 꼬리가 하얀빛 속 인영에게 날아들었다. 하얀빛 속 인영은 몸이 흐릿해지며 허상처럼 변해 두 가지 공격을 그냥 지나쳤다.

“저런 신통이!”

이에 깜짝 놀란 이족인이 은색 부적을 꺼내 들었다. 당장이라도 부적을 발동할 생각 같았다. 바로 그때 더듬이 이족인 뒤쪽으로 가볍게 바람이 불며 보일 듯 말 듯한 인영이 나타났다.

반투명한 몸은 영기의 파동이 느껴지지 않아 정말 유령 같았다. 그러나 더듬이 이족인은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했고 부적을 은색 뇌전으로 바꿔 정면의 강적을 상대하기에 바빴다.

콰르릉 콰쾅!

천둥소리가 울리고 은색 뇌전이 폭발해 하얀빛 속 인영이 매몰되었다. 은색 뇌전은 어떤 신통을 지녔는지 작열하는 열기에 주변 온도가 급상승했다. 그러나 뒤쪽의 반투명 인영은 놀라기는커녕 비웃으며 갑자기 초록빛으로 변해 앞으로 쇄도했다.

그 순간 이족인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금색 검기까지 막아냈던 3색 보호막이 뒤쪽의 인영이 변한 초록빛에는 바로 뚫려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더듬이 이족인은 열댓 장까지 치솟았다가 고통 속에 온몸을 비틀며 추락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피와 살이 말라붙어 땅에 떨어졌을 때는 얇은 가죽만 남아 나풀거렸다.

심지어 원신도 빠져나오지 못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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