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1화. 옥갑 속의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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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두인이 심호흡을 하고 품에서 세 개의 하얀 옥갑을 꺼냈다. 옥갑에는 새빨간 부적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이 안에는 우리 천운13족이 매우 중시하는 물건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우리 만고족(万古族)에 무사히 전달해 준다면 생각지도 못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각치족에게 붙들릴 위험에 처한다면 잡히기 전에 옥갑을 없애는 것이 좋습니다. 괜히 이 일로 추혼술을 당할지도 모르니까요.”
대두인은 말이 끝나자마자 옥함을 세 수사들에게 날려 보냈고, 수사들은 얼떨결에 옥함을 건네받았다.
“원 형, 도대체 이 안에 든 물건이 무엇이기에 이러십니까?”
붉은빛 속 이족인이 옥갑을 들고 궁금해 했다.
“어떤 물건인지는 밝힐 수 없으나 제가 한 가지는 장담하지요. 이 물건을 만고족의 장로들께 전달하기만 하면 통령(通靈)급 꼭두각시 혹은 동급의 다른 보물과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대두인이 길게 숨을 내쉬며 진지하게 약속했다.
“통령급 꼭두각시요?”
역시나 녹색 피부 이족인이 먼저 소리를 높였다. 한립은 처음 들어보는 소리라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붉은빛 속 이족인도 눈빛이 흔들렸다.
“원 형, 농담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만약 만묘단(万妙丹)을 내달라 하면 내어줄 거란 말입니까?”
“만묘단은 통령괴뢰(通靈傀儡)보다 희소하지요. 그건 장담할 수는 없지만 장로께서 허락하실 가능성이 7, 8할 정도라 보시면 됩니다.”
녹색 이족인의 물음에 대두인이 주저하다 신중하게 답했다. 그의 솔직한 대답에 녹색 피부 이족인은 그를 더욱 신뢰하는 듯했다. 그는 말없이 들고 있던 옥갑을 꽉 쥐었다.
한립은 의식으로 옥갑으로 안을 살피려다 실패했다. 옥갑에 붙은 금제 부적들이 의식을 차단하는 듯했다.
“그리고 당부드릴 것은 옥갑을 열어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억지로 열어보다 무슨 사단이 나도 저를 원망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대두인이 다른 이들의 생각을 읽고 경고했다.
“옥갑에 강력한 술수라도 부려 놓으셨나 봅니다.”
녹색 피부 이족인이 가볍게 코웃음 쳤다.
“옥갑 속의 물건은 우리 천운13족에게 무척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부적 몇 장만 부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세 분이 각치족의 추격을 벗어나시고 제가 펼쳐 놓은 술수를 이겨낼 자신이 있다면 열어보셔도 괜찮습니다.”
대두인이 음산하게 미소 지었다.
“우리가 이것을 전달하고 보상받을 수 있을지 어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만일 만고족 장로들께서 모른척하시고 물건만 회수하시면 어찌합니까.”
한립이 조용히 핵심을 찔렀다. 그 말을 들은 붉은빛 속 이족인과 녹색 피부 이족인도 비슷한 우려를 드러냈다. 그 말에 대두인이 미간을 좁히며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우리 만고족을 믿지 못하겠다면 다른 천운13족에게 넘기셔도 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른 종족들은 이 물건을 만고족 만큼 중시하지 않으니 그 보상의 수준은 턱없이 떨어질 것입니다. 적어도 만묘단 같은 신단(神丹)을 얻을 생각은 버리시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대두인의 말에 녹색 피부 이족인과 붉은빛 속 이족인이 생각에 잠겼다. 한립도 옥갑 속 물건이 무엇일지 무척 궁금해졌다.
“그렇게 중요한 물건을 어찌 직접 가져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맡기십니까?”
붉은빛 속 이족인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제가 이 물건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각치족이 녹광성을 포위했습니다. 보잘것없는 작은 성에 이렇게 빨리 들이닥칠 이유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각치족 쪽에서 무슨 소문을 듣고 보물을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제가 물건을 지니고 움직인다면 너무 위험하겠지요.”
대두인이 숨김없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각치족이 이 옥함 속 물건을 노리고 들이닥친 거란 말입니까?”
녹색 피부 이족인이 놀라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한립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저 제 추측일 뿐입니다. 이런 부탁을 여러분에게 드리는 것도 만일을 대비한 것이고요.”
“알겠습니다. 원 형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이것은 제가 잠시 맡아두지요.”
붉은빛 속 이족인이 먼저 결심하고 영기의 빛을 반짝여 옥함을 집어넣었다. 녹색 피부 이족인도 흔들리는 눈빛으로 잠시 고민하다 옥갑을 허공에 던져 기다란 초록색 혀로 감아 삼켰다. 오직 한립만이 손에 옥갑을 쥐고 있었다.
“한 형께서는 아직도 우려되는 바가 있으십니까?”
“원 수사께서는 제 신분도 모르시면서 이것을 넘겨주셨습니다. 저를 어찌 믿으시는지 궁금합니다.”
“하하, 비록 수사께서 어떤 종족인지는 모르겠으나 각치족이 아닌 것만은 확실합니다. 수사의 신통이야 해외에서 바다 요수들을 죽이며 지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요.”
“수사께서 이리 저를 믿어 주시고, 비밀 통로를 공유해주셨으니 도와드리겠습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옥갑을 저물탁 속으로 집어넣었다.
‘통령괴뢰’와 ‘만묘단’이 어떤 보물인지는 모르지만 연허급 존재들이 보물로 여기는 거라면 굉장히 진귀할 것이다. 그리고 옥갑만 전달하면 엄청난 보물로 바꿔준다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들은 각치족 추격병 속에 합체급을 넘어서는 존재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다만 정말 이걸로 보물을 교활할지는 차후에 생각할 문제였다.
“좋습니다. 기왕 세 분께서 모두 수락을 하셨으니 어서 흩어져 달아나지요. 추격병들이 다른 수사들을 쫓고 있으니 지금이 달아날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한립이 옥갑을 집어넣자 대두인이 호쾌하게 말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 갑자기 쇠로 만든 팽이를 불러냈다.
한 척 크기의 팽이는 대두인이 수결을 맺자 곧 서너 장으로 커졌고 대두인은 노란빛을 번뜩이며 팽이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지! 제가 알기로 각치족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13종족의 장로들 대부분이 운성(雲城)에 모여 있다고 합니다. 우리 만고족과 몇몇 종족의 대장로께서도 그곳에 머물 예정이라 하니 몇 개월 후 모두 운성에서 다시 뵙기를 고대하겠습니다.”
“운성!”
녹색 피부 이족인과 붉은빛 속 이족인의 표정이 달라졌고, 한립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운성이라는 이름은 청소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지만 자세하게 떠오르는 바는 없었다.
하지만 해역도를 챙겨왔으니 찾아가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거대 팽이가 빙글빙글 돌아 검은 빛을 남기고 땅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두 분도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저는 이만!”
녹색 피부 이족인은 각치족 추격병들이 꺼려지는지 곧바로 포권을 하며 말했다. 그는 신형이 모호해지고 피부가 투명하게 변해 허공에서 사라졌다.
‘저게 무슨 둔술이란 말인가!’
깜짝 놀란 한립은 눈동자에서 남색빛을 번뜩이며 주위를 훑었다. 그러자 멀리에서 무형의 인영이 열댓 장을 뛰어 넘는 것이 보였다.
“허허, 묵록족(墨綠族)의 은닉비술입니다. 일단 시전하면 수행이 더 높은 수사이거나 특수한 신통을 익힌 자가 아니면 존재를 감지하지 못하지요. 단점이 있다면 날아오르지 못한다는 것과 속도가 느려진다는 것뿐입니다.”
한립이 가만히 먼 곳을 응시하자 붉은빛 속 이족인이 가볍게 웃었다.
“아, 은닉비술이란 것이 참 신기합니다.”
녹색 피부 이족인은 풀쩍풀쩍 뛰어오르며 벌써 저 멀리 수풀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한 형께서도 떠나셔야지요? 그런데 그 전에 한 가지 제안이 있습니다.”
“제안이요?”
“어차피 천운13족 출신도 아니신데 위험을 무릅쓰고 물건을 배달하려 하십니까. 그러니 원 형이 내어준 물건을 제게 주시지요.”
“옥갑 속 물건을 원한다는 말입니까?”
한립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예, 옥갑 속 물건에 흥미가 가서요. 그리고 어차피 하나를 갖고 가는 김에 제가 수사의 노고를 덜어드리고 싶어서 말입니다.”
붉은빛 속 이족인의 목소리가 순간 서늘해졌다.
“제가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해외 출신이라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보물이 아무리 탐이 나도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을 텐데요.”
붉은빛 속 이족인이 키득거렸다.
“지금 저와 싸우시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지요. 시간을 끌다 각치족에게 쫓겨 포위당할 수도 있습니다.”
한립의 목소리와 표정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붉은빛 속 이족인은 한립의 말에 인상을 찡그리더니 한 손을 뒤집어 투명한 병을 꺼내 들었다. 병 안에는 은은하게 금빛을 내는 단환이 들어 있었다.
“한 수사, 그것을 갖고 만고족에게 간다 해도 기껏해야 만묘단 한 알을 얻을 뿐입니다. 제게 그만한 단약은 없지만 그와 비슷한 금혈환(金血丸)이 있습니다. 이 단약도 수사가 상 3계 고비를 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니, 이것과 수중의 옥갑을 바꾸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붉은빛 속 이족인이 한립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거래를 청했다.
“금혈환.”
한립의 동공이 미세하게 수축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지만 의식으로 훑으니 작은 병에서 풍기는 약향이 만만치 않았다.
“빨리 결정을 내리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각치족 추격병들이 언제든 쫓아올 수 있을 테니까요.”
한립이 관심 있어 하자 붉은빛 속 이족인이 기뻐하며 결정을 재촉했다.
그러나 이족인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한립 발밑에 있는 검은 그림자가 이전보다 가늘어져 푸른 실로 변해 흙 속으로 사라졌다.
“수사께서 어느 종족의 분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 화월족처럼 구분하기 쉬운 종족이 어디 있다고요. 알면서 물어보십니다.”
한립의 뜬금없는 질문에 이족인이 순간 움찔했으나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런가요? 저는 수사께서 각치족 인물이라 제 옥갑을 원하나 했습니다. 옥갑을 챙긴 후 저를 공격할 심산은 아닐까 해서요.”
한립의 눈빛이 묘해졌다.
“정신 나가신 것 아닙니까? 저는 누가 봐도 화월족 사람인데 어찌 각치족에 투신했겠습니까!”
붉은빛 속 이족인이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수사께서 정말 화월족인지 아닌지는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허나 당신이 누각에 홀로 남아 다른 수작을 부린 것은 부인하지 못하시겠지요? 그러지 마시고 제가 수사의 노고를 덜어드릴 테니 옥갑을 넘기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저도 어차피 갈 길, 하나를 들고 가나 두 개를 들고 가나 상관이 없어서요.”
한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색이 급변한 붉은빛 속 이족인은 벌써 두 손으로 수결을 맺고 있었다. 새빨간 빛이 빙글 돌아 하늘 높이 솟구쳐 사라지더니 이족인의 신형이 모호해지고 붉은빛 속에서 똑같이 생긴 허상 세 개가 나타났다.
허상은 전부 뒷짐을 쥐고 무표정한 얼굴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립은 상대가 이렇게 요란하게 움직이는데도 꼼짝 않고 입꼬리를 꿈틀하며 박장대소했다.
“과연 계략이 대단하십니다. 우선 영력을 방출해 각치인들을 불러 모으고 싸움을 벌여 저를 이곳에 묶여 두실 요량이시군요?”
태연한 한립의 태도에 붉은빛 허상이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내가 조각상 꼭두각시에 흔적을 남긴 것을 어떻게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다른 이들을 소환했으니 달아날 생각은 버리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얌전히 옥갑을 넘겨주시면 살려 보내주겠습니다.”
중간 허상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각치족이 신호를 받았으니 순식간에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조금 전 방출한 것이 이것입니까?”
한립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돌연 한 손으로 허공을 쥐자, 그의 손바닥 위로 붉은 빛덩이가 괴이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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