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9화. 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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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사라졌던 거대 요수의 몸이 다른 쪽의 푸른 장막에서 튀어나왔다. 고래 요수는 놀라 이번에는 다른 쪽으로 돌진했다.
연달아 푸른빛의 장막을 통과해 다시 장막 안에서 튀어나온 요수는 드디어 둔광을 멈추었다.
바로 그때 한립이 검진의 위력을 발동했다. 사방에서 푸른 장막이 층층이 깨져나가고 주변으로 풀냄새가 가득 피어올랐다.
마치 꽃과 풀들이 만발한 초원에 있는 기분이었다. 요수의 눈에는 이미 주변이 푸른 초원으로 바뀌어 진위를 가릴 수 없었다.
나무와 꽃, 풀들이 스산하지만 생생한 기운을 뿜어냈다. 요수가 아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다 깜짝 놀랐다. 언제부터인지 발밑에 거대한 푸른 연꽃이 둥둥 떠 있었던 것이다.
백여 장에 달하는 푸른 연꽃은 영기의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푸른 기운들이 주변에서 밀려들었고 거대한 압력이 느껴졌다.
이에 고래 요수는 꼼짝달싹 못했고 그 순간, 푸른빛이 반짝이더니 수십 마리의 푸른 구렁이들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요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반나절 후, 푸른 빛줄기가 인근 해역의 하늘을 가르며 멀어졌다. 그가 머물던 바다에는 거센 파도와 먹구름이 사라졌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했다.
평평하게 뭉개져 가라앉은 거대한 암초만이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2년 후, 화호군도 전역에 소문 하나가 퍼져나갔다. 오랜 세월 훼손되어 사용하지 못하던 전송진이 수리되고 이미 누군가 그곳을 통해 뇌명대륙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었다.
이에 모든 상족 수련자들이 크게 기뻐하며 진송진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 * *
한립은 천천히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청 안은 고요했고 아무도 없었다. 대청의 벽면에는 금제의 빛이 반짝거렸고 반원형의 석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한립은 발밑의 전송진을 내려다보다 진법을 벗어나 석문으로 걸어갔다. 두꺼운 석문은 생각보다 무척 가벼워 쉽게 열렸다.
문이 열리자 시끄러운 소리가 물밀 듯이 밀려들어와 그를 놀라게 했다.
한립은 대청 밖을 살피며 어안이 벙벙해졌다. 수천 장 크기의 거대한 광장에는 하얀 돌로 만든 건물들과 사람들이 가득했다.
대부분 다양한 갑옷을 입고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약간씩 독특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어떤 자는 귀가 토끼처럼 길었고, 또 누군가는 온몸에 검은 털이 자라나 검은 원숭이를 보는 듯했다.
또 금빛 갑옷을 입은 것처럼 전신이 금색인 사람도 있었고, 상반신은 사람의 몸이고 하반신이 뱀인 와씨족 인물들도 보였다.
그러나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은은한 녹색 피부에 창백한 얼굴을 지닌 이족인이었다.
그들은 녹색 갑옷을 입고 붉은 창을 들고 있어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어쩐 일인지 이족인들은 전부 이곳저곳에 모여 숙덕거리며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축기기나 결단기 수사였지만 원영기와 화신기 수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계 수사들은 따로 그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립은 의식으로 고계 이족들을 훑다 연허급 이족인을 셋이나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청소의 말에 따르면 거대 전송진의 반대편은 몇몇 작은 종족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소규모 환승용 성(城)이라고 했다. 그곳에 상주하는 수도자의 수는 4, 5천 명밖에 되지 않고, 수행이 높은 이가 머물러도 화신급 한두 명이 전부라고 했다.
그런데 광장에 모인 이들은 어림잡아도 몇만 명이었고 그와 동급인 수사의 수도 셋이나 된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동안 녹광성(綠光城)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의식을 퍼트려 보니 광장 위쪽으로 금제가 느껴졌고, 아무도 둔술을 펼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금공(禁空) 종류인 것 같았다.
한립은 깊게 숨을 내쉬고는 자연스럽게 군중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흠?”
갑자기 머리가 큰 이족인의 표정이 달라지며 품에서 나무판 하나를 꺼내들었다. 영기의 빛이 반짝이는 나무판에 낯선 주술문자가 떠올랐다.
“원 형, 왜 그러십니까?”
녹색 피부 이족인이 물었다.
“갑자기 상족 3계의 수사가 나타났습니다. 분명 성 내의 전송진은 각치족에 의해 이미 막혔을 텐데요. 어떻게 전송되어 온 것일까요?”
대두(大頭) 이족인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각치족이 한 곳을 빠트린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어서 그자를 찾아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봐야겠습니다.”
“모든 전송진은 제가 수차례나 직접 확인했습니다. 발동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요.”
녹색 이족인이 희색을 드러내자 대두 이족인이 나무판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그자나 찾아냅시다. 어찌 된 일인지는 알아야 할 테니까요. 원 형, 그 영광반(靈光盤)으로 위치를 찾을 수 있겠지요.”
“헤헤, 광장에 새로운 수사가 나타난 순간 이미 금제를 이용해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바로 저깁니다.”
말이 없던 붉은빛 속 이족인이 말했다. 이에 대두 이족인은 눈을 빛내며 한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머지 두 명도 마찬가지였다.
한립은 비술로 수행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단번에 연허기 수사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한립은 이족인들에게 다가가 몇 마디 묻다가 연허기 이족들이 쳐다보는 것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그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
한립은 미간이 찌푸렸다. 그러나 그들이 한립을 찾아낸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먼저 세 이족인들에게 다가갔고, 잠시 후 네 명의 연허급 수사들이 모였다.
“수사께서는 녹광성에 막 도착하셨지요. 어찌 불러드려야 할까요?”
대두 이족인이 영광반을 치우고 태연하게 물었다.
“저는 한 가(家)입니다. 이곳에는 처음 왔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난 겁니까?”
“한 수사셨군요. 아주 먼 곳에서 오셨나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각치족이 우리 천운13족(天雲十三族)을 집어삼키려 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테니까요.”
대두 거한이 한립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각치족!’
한립의 표정이 급변했다. 각치족이라면 영계를 통틀어 열 번째로 크다는 초대형 종족이었다.
“한 형, 그 일에 대해서는 천천히 설명을 해드릴 테니 어떻게 녹광성으로 전송되어 왔는지 먼저 이야기해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다른 성에서 이곳으로 통하는 전송진들은 전부 각치족에 의해 차단되었거든요.”
녹색 이족인이 참다못해 끼어들었다.
“저는 해외(海外)에서 이곳으로 전송되어 왔습니다.”
“해외요? 녹광성 같은 작은 성에 해외로 통하는 전송진이 있단 말입니까?”
그의 말을 들은 붉은 이족인이 의아하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해외 전송진이라면 두 개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에 망가져 방치되고 있었지요. 그중 어떤 것을 통해 이곳으로 오신 것입니까?”
대두 이족인도 무척 놀란 듯했다.
“화호군도입니다.”
“그곳이었군요! 제 기억대로라면 수천 년 전에 망가져 녹광성과는 진작 연락이 끊겼을 텐데요. 혹시 어찌된 일인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대두 이족인이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예, 그러지요. 간단히 말해…….”
한립은 당시 전송진이 망가진 일부터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자신의 내력에 대해서는 전혀 밝히지 않아 상대가 그를 해외 출신의 수도자로 오해하게 놔두었다.
“그렇게 운 좋게 공운정을 되찾아 전송진을 수리했습니다. 그런데 전송진의 원형을 기록해 놓은 것이 틀린 것인지, 아니면 요수의 뱃속에서 공운정이 변형을 일으킨 것인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전송진은 한 번에 단 한명밖에 전송할 수 없고, 한 번 발동하면 7일이 흘러야 다시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송진이 망가지고 말 것입니다.”
한립이 울적하게 말을 맺었다. 그 말은 그가 다시 전송진을 이용해 해외로 돌아가고 싶어도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그의 말을 들뜬 표정으로 듣고 있던 이족인들은 어두운 얼굴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니까 결국 수사께서 이용한 전송진은 당장 발동할 수 없다는 뜻이군요.”
“그러합니다.”
녹색 피부 이족인이 실망스런 기색을 비추자 한립도 한숨을 내쉬었다.
“한 수사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안이 중대하여 직접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괜찮으시겠지요?”
대두 이족인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홍 형, 이곳에 남아 다른 수사들을 감독해 주세요. 저희가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대두 이족인이 붉은빛 속 이족인을 향해 신중히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빨리 돌아오셔야 합니다.”
붉은빛 속 이족인이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고, 나머지 둘은 한립을 따라 광장 한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곧 한립이 나왔던 대청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거대 전송진이 고요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공간파동의 흔적으로 보아 얼마 전 발동되었던 것이 맞습니다.”
녹색 이족인이 의식으로 대청을 훑고 말했다. 이에 대두 이족인은 바로 전송진으로 걸어가 몇 바퀴를 돌아보고는 수결을 맺어 녹색빛을 던져 넣었다.
웅!
조용하던 전송진이 짧게 울고 하얀 빛을 반짝였다. 그 모습에 녹색 이족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희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진법은 바로 진동을 멈추었고 영기의 빛도 사라졌다.
“반대쪽 진법이 불안정해 이미 닿아 놓은 모양입니다.”
대두 이족인이 어두운 얼굴로 결론을 내렸다. 그 말에 녹색 이족인의 얼굴도 침울해졌다.
“이곳의 상황이 그렇게 위급합니까? 어찌된 일인지 알고 싶습니다.”
“수사께서도 이 작은 녹광성에 얼마나 많은 수도자들이 모였는지 보셨지요. 대부분이 인근 성에서 달아난 자들입니다. 원래 본 성의 전송진을 이용해 멀리 달아날 계획이었는데 각치족이 한발 앞서 움직여 다른 성과 연결된 전송진을 막아버렸습니다.
이제 곧 각치족 대군이 몰려올 겁니다. 그렇다면 성을 버리고 하루라도 빨리 달아나는 것이 옳겠지요. 하지만 각치족 선봉을 따돌릴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우리 같은 고계 존재들은 절대 살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대두 이족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한립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그 순간, 석문 밖에서 쿠르릉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하얀 금제의 빛이 요동쳤다. 당장이라도 전송진이 있는 대청이 무너질 듯했다.
“이,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이 정도 진동에 연허급 수사들이 영향을 받을 리 없었지만 한립을 포함한 세 사람은 안색은 급변했다. 특히 녹색 피부 이족인이 크게 놀라 소리를 높였다.
녹색 피부 이족인과 대두 거한이 시선을 마주치고 동시에 몸을 날렸다.
한 명은 푸른 빛줄기로 쏘아져 나갔고, 다른 한 명은 신형이 모호해져 그대로 사라졌다.
‘이를 어쩐다…….’
한립이 전송진을 훑고 머뭇거리다 소매를 털어 푸른빛을 날렸다.
쿠콰쾅!
푸른빛이 순식간에 전송진 진법을 난도질하고 돌아왔다. 그제야 한립은 대청을 뛰쳐나갔다.
석문을 나서자 광장은 혼란에 빠져 있었고 수도자들은 사방팔방 흩어져 몸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광장 상공에는 은은한 남색빛의 장막이 성을 보호하고 있었는데, 보호막에서 멀리 떨어진 상공에서 하얀 빛구슬들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콰쾅! 콰콰쾅쾅!
빛구슬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폭발했고 보호막은 위태롭게 흔들거리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한립은 화들짝 놀라 급히 고개를 쳐들고 명청령안을 발동했다.
그러자 고공에 떠 있는 거대 섬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은으로 만든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섬이었다.
길이가 만 장에 달하는 섬의 아래쪽에는 주술문자가 빽빽하게 새겨진 하얀 수정 기둥이 박혀 있었는데 그곳에서 빛구슬이 떨어지고 있었다.
“각치족의 거대 전함(戰艦)입니다. 각치족 대군이 이렇게 빨리 당도할 리가!”
대두 이족인이 품에서 남색 거울을 꺼내 보고는 소리를 높였다.
“이제 와서 그런 소리가 다 무슨 소용입니까. 어서 빨리 달아나야 합니다. 원 형, 이 섬에서 오래 머물러 계셨으니 몇 군데 비밀 통로쯤은 알고 계시겠지요?”
녹색 피부 이족인이 다급히 말했다.
“한 군데 알기는 합니다. 성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산으로 통하는 통로입니다. 허나 성 안에 이리 많은 수사들을 놔두고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즉시 수사들을 성문으로 집결시켜 달아날 수 있게 해야겠어요. 운이 좋으면 일부는 추격을 피해 살아남을지도 모릅니다.”
대두 이족인이 주저하다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광장 한쪽에서 날아온 붉은빛 속 이족인이 동의했고, 한립과 녹색 피부 이족인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대두 거인은 곧바로 움직였다.
그의 몸에서 노란 빛줄기가 날아올라 백 장 크기의 거대한 허상으로 변했다. 복색이나 모습은 대두 이족인과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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