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5화. 치열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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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수많은 요수들과 싸운 한립도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괴물이 내뿜는 요력이 강하지 않아 연허 후기 정도였다.
대략 상황을 파악한 한립은 청소의 외침에 72자루의 푸른 검들을 불러냈고 비검은 수십 개의 푸른 실로 변해 튀어나갔다.
쉬쉬쉬쉬쉭!
정련을 마친 비검의 속도는 번개처럼 빨라 순식간에 회색 그림자 앞을 빼곡히 메웠다. 괴물 나방도 한립의 빠른 공격에 미처 방어 태세를 갖추지 못했다.
푸른빛을 번뜩이며 회색 그림자를 통과한 푸른 실들이 거대 나방의 몸을 스쳤다. 그러자 회색 그림자가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추었고 동시에 포효소리도 끊겼다.
푸른 실이 거대 나방의 육중한 몸을 빙빙 감아 푸른빛을 발산했다. 그러자 괴물 나방은 단번에 산산조각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한립은 희색을 드러내기 보다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더욱 경계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청소와 검은 치마 여인은 그것을 보고 서둘러 한립을 향해 다가오며 소리쳤다.
“선배님, 조심하십시오. 저 괴물은 아무래도 불사의 몸을 지닌 것 같습니다.”
“불사의 몸!”
한립은 순간 움찔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회색 그림자 속에서 이변이 벌어졌다. 조각났던 괴물 나방의 잔해가 하나로 뭉쳐져 회색빛을 반짝이며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에 한립은 속으로 검결을 외웠고 주변을 선회하던 수십 개의 비검들이 푸른 실로 변해 날아갔다.
크하아아아!
그러나 이번에는 괴물도 괴성을 지르고 날개를 흔들어 무형의 파동을 방출했다.
퍼펑! 퍼퍼펑!
무형의 파동에 휩쓸린 푸른 실들이 부르르 몸을 떨더니 다시 비검으로 돌아와 분분히 푸른 빛덩이로 폭발했다.
무형의 파동이 어떤 괴이한 신통을 지니고 있는지 청죽봉운검이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두 여인은 그것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괴물 나방과 조금밖에 거리를 벌려두지 못했는데 다시 괴상한 포효소리가 들린다면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립은 비검이 터져나가도 놀라지 않고 다시 수결을 맺어 먼 곳을 가리켰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흩날리던 비검 조각들이 돌연 맑은 소리를 내며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비검들은 기이한 빛을 반짝이고 수많은 푸른 실로 변해 괴물 나방을 다시 조각조각 잘라냈다.
비검의 검령화허 신통이었다. 이에 여인들은 깜짝 놀랐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속도를 높여 한립 가까이로 도망쳤다.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괴물이 너무 강력하니 어서 피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청소가 길게 숨을 토해내고는 한립을 향해 말했다.
“그대들은 알아서 하게. 나는 저 괴물에 조금 흥미가 있어서 말이야. 어떻게 죽여야 할지 살펴볼 것이네.”
“저 선배님, 저 요수가 갑자기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는 모르나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심지어 은사 거사께서도 저 요수의 손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일단 철수했다가 대책을 세워 처리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검은 치마 여인도 그를 말렸다. 한립의 놀라운 신통을 보긴 했으나 아직 그가 괴물 나방을 이길 수 있으리라 확신하지 못했다.
“안심하게! 내 저것을 죽이지는 못해도 내 한 목숨은 지킬 자신이 있으니.”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
멀리서 회색빛이 번뜩이고 괴물 나방이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두 번이나 죽임을 당해서인지 괴물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사자 머리의 포효 소리는 더욱 커졌고, 두 날개를 펄럭이는 속도도 엄청났다.
동시에 인근 하늘로 괴성이 울리고 파동이 층층이 일어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는데 비검들은 파동을 만나 폭발해 가루처럼 부서졌다. 그러나 괴물 나방은 그것을 보고도 날갯짓을 멈추지 않았다.
포효 소리가 울리 퍼지자 청소와 검은 치마 여인의 안색이 순식간에 붉어지고 체내의 기혈이 요동쳐 당장이라도 피부를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립은 범성진마공의 위력을 끌어올려 무탈했다.
그는 두 여인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번개처럼 허공을 두 번 내리쳤다. 그러자 손바닥에서 금빛이 번뜩이고 금빛 빛기둥 두 줄기가 여인들의 체내로 흡수되었다.
청소와 검은 치마 여인은 즉시 몸 안의 기혈이 천천히 가라앉은 것을 느꼈다. 혈색도 처음보다 한결 나아져 한립에게 연신 감사인사를 보냈다.
“요수의 포효소리가 괴이하고 영향을 미치는 범위도 넓으니 수사들은 먼저 가보게.”
한립이 손을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괴물 나방을 중심으로 그 주변이 왜곡되고 있었다. 이런 괴현상이 괴물이 방출하는 포효 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날갯짓이 만들어낸 무형의 파동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두 여인은 한립이 떠날 생각이 없자 그를 향해 예를 올리고는 바로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이번에는 쉬지 않고 백리를 날아가 그대로 얼음 섬을 벗어났고 그제야 안정을 찾았다.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두 여인은 마음이 걸리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청 수사, 저분이 말씀하시던 한 선배님이십니까?”
“그분이 아니면 누구시겠습니까. 한 선배님께서는 은사 거사와 동급의 존재시지만 신통은 훨씬 강력하신 듯합니다.”
“아무리 신통이 뛰어나도 저 괴물의 상대가 될까요? 영수 은광사(銀光鯊)와 힘을 합친 은사 거사께서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화를 당하시지 않았습니까. 구렁이 머리 쪽은 사자 머리 보다 더욱 강력합니다. 한 선배님께서 굳이 그곳에 남으신 이유를 모르겠어요.”
검은 치마 여인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건 저도 모르겠지만, 한 선생님께서 포효 소리를 듣고 멀쩡하신 것을 보면 남다른 신통을 지니신 것이 분명합니다. 저 괴물 나방을 죽이지는 못하셔도 빠져나오시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예요! 저희는 여기서 잠시 기다리지요. 만일 상황이 틀어지면 모든 상족을 모아 강력한 진법을 설치한 다음 저 괴물을 상대해야 할 것입니다.”
청소는 한립을 꽤나 믿는 듯했지만 여러 상황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웠다.
“맞습니다. 저런 요물을 상대하려면 진법의 힘을 빌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입니다. 아무리 많은 인원을 모아봐야 저 포효소리 한 번이면 다들 죽어나갈 것 아닙니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저 괴물이 지금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한 달만 늦게 이런 일이 벌어졌어도 이곳에 모인 수사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몰살당했을 게 아닙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그나저나 요물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청소는 멀리 괴물 나방이 있는 곳을 응시했다.
* * *
한립의 비검들은 무형의 힘에 의해 더 쪼개질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 났다. 그러나 그는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조소했다.
눈앞의 괴물은 연허 후기의 존재이고 신통도 비범했으나 법체쌍수를 하고 익힌 한립이 두려워할 대상은 아니었다.
그가 수결을 맺자 그의 몸에서 금빛이 크게 번지며 머리 위로 금색 빛무리가 떠올랐다. 빛무리 속에 삼두육비의 법상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여섯 개의 손을 움직여 수결을 맺었다.
금색 법상은 멀리 괴물 나방을 향해 여섯 개의 팔을 휘둘렀다.
푸푸푸푹!
금색 빛기둥 여섯 개가 번뜩이며 사라져 모호하게 왜곡된 회색 그림자로 쇄도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여섯 개의 금색 빛기둥이 방향을 틀어 괴이하게도 괴물 나방의 몸을 비켜나간 것이다.
“…….”
한립은 그것을 보고 멈칫하더니 소매 속에서 검은 손을 꺼내 허공을 향해 던졌다. 그러자 회색 기운이 뿜어져 나가 뭉쳐 회색빛의 장막으로 변해 날아갔다.
원자신광은 날아가면서 더욱 크기를 키웠고 나중에는 하늘을 가릴 듯 커졌다. 괴물 나방이 그것을 보고 청록색 눈을 번뜩였다. 두 날개에서 뻗어 나오던 무형의 파동들이 한순간 방향을 틀어 전부 전방의 회색 기운을 향해 몰려들었다.
콰콰쾅!
무형의 파동과 회색빛이 충돌해 굉음이 울렸다. 이에 한립은 손가락을 움직여 검은 그림자를 불러냈다. 바로 원자신산이었다.
괴물 나방도 거대한 산의 등장에 순간 움찔했다가 곧이어 괴성을 질렀다. 그러자 무형의 파동이 응결해 반투명한 빛기둥을 만들어 산 아래를 노리고 날아갔다.
무형의 파동이 한립의 비검들을 산산조각냈던 것을 생각하면 빛기둥의 위력도 엄청날 것이다. 웬만한 법기나 보물들은 닿자마자 터져나갈 것이다.
만일 원자신산에 주춧돌을 녹여 넣기 전이었다면 반투명한 빛기둥을 막아낼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겠지만 현재 원자신산의 강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르러있었다.
쿠릉!
산 아래에서 회백색 빛이 반짝이고 빛기둥이 둔중한 폭음을 내며 폭발했다. 눈부신 빛이 가시고 빛기둥은 사라졌지만 산의 밑 부분은 아무런 균열도 없이 멀쩡했다.
이에 괴물 나방이 깜짝 놀라 연이어 파동을 날렸지만 산봉우리는 유유히 하강했다. 검은 산봉우리가 거대 나방을 눌러 으깨버리기 직전 돌연 사자 머리가 흐릿해지고 눈을 감은 구렁이 머리로 바뀌었다.
녹색 구렁이가 눈을 번쩍 뜨더니 금빛 눈동자로 서늘하게 검은 산봉우리를 노려보았다.
쉬익!
구렁이 머리가 음산한 소리를 내며 날개를 펄럭였다. 회색 가루가 퍼지고 괴물의 몸이 가루에 뒤덮였다. 강력한 신통을 부리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딜!’
멀리서 그것을 확인한 한립은 재빨리 수결을 맺어 법결을 발동했다. 그러자 검은 산봉우리가 빠르게 하강해 회색 가루를 내리찍었다.
꽈앙!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검은 산봉우리는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허공에 멈춰 섰다. 이에 한립은 깜짝 놀랐다. 원자신산의 무게를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연허기에 이르기 전에는 그 산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연허기에 이르러 범성진마공으로 육체를 강화한 다음에야 겨우 산의 무게를 버티는 정도였다.
그런데 눈앞의 괴물 나방이 원자신산을 막고 있었다. 한립이 경악해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머리 위의 금빛 법상의 팔을 현란하게 움직였다.
금색 기운이 흘러나와 금빛 덩어리들로 변하더니 금빛 광풍으로 변해 날아갔다. 금빛 광풍 속의 무수히 많은 바람의 칼날이 회색 가루를 난도질했다.
퍼퍼퍼퍼펑!
둔탁한 소리가 연달아 들려오며 바람의 칼날이 무언가에 충돌했는데 그 뒤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에 한립이 법결로 재촉하자 금빛 광풍이 회색 가루를 날려 숨겨져 있던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루가 흩어지자 괴물 나방은 이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육중한 괴물의 몸이 어두운 녹색 비늘로 덮여 있었고 강철과 같은 구렁이 꼬리가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몸 양쪽에 굵은 팔뚝이 자라나 원자신산을 받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한립은 괴물이 이런 괴력을 지녔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괴물은 원자신산을 받치고도 아직 여유가 있어 보였다.
이에 한립은 눈빛이 서늘해지며 괴물 주변에 흩어져 있던 비검들을 번뜩여 푸른 실로 쏘아 보냈다. 그런데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변신한 후에 괴물의 불사의 몸이 사라졌다는 직감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비검으로 괴물을 처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괴물을 향해 날아들던 푸른 실들은 괴물 나방이 분출한 투명 방패에 막혀 가까이에 다가가지 못했다. 그 모습에 한립은 난색을 표하며 다른 술법을 쓰려는데 거대 나방이 팔뚝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검은 산봉우리가 괴물의 힘에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이어 수많은 수정 방패들이 동시에 빛을 번뜩이며 갈라져 한 덩어리로 뭉쳐졌다.
멀리서 보면 새하얀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보였다.
너무 강렬한 빛에 한립도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명청령안을 발동해 눈을 번쩍 떴다. 하얀빛은 너무 강렬해서 영목 신통을 발휘한 그조차 두 눈이 타는 것처럼 괴로웠다.
하지만 덕분에 하얀 빛의 장막 속의 상황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입 꼬리가 꿈틀했다.
거대 괴물 나방은 그가 눈을 감은 찰나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전투 경험이 풍부한 한립이 상대에게 기습할 기회를 줄 리 없었다. 나방이 사라진 것을 깨달은 순간 한쪽 소매를 털어 해골 머리를 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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