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3화. 공운정(空雲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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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손가락을 뻗어 푸른빛을 번뜩였다. 그러자 대량의 정순한 영력이 스며들더니 허공에 떠올라 한 장 크기의 반투명한 물체로 변했다.
한립이 수결을 맺자 법결이 손수건으로 스며들며 한립 머리 위로 떨어져 모습을 완전히 감추었다. 한립이 놀란 눈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명청령안을 발동해 살폈다.
잠시 후,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과연!’
두 오라인들은 이 보물의 힘을 빌려 대전까지 침입한 것이었다. 명청령안의 영목 신통을 극성으로 발휘하지 않으면 손수건의 은신 효과를 꿰뚫어 볼 수 없다.
이번에 한립은 의식을 방출해 손수건을 통과해 보려했다. 하지만 의식이 검은 손수건에 닿자 짙은 안개가 잠긴 것처럼 앞으로 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가 오라왕족의 수행을 알아보지 못한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그는 법결을 발동해 검은 손수건을 집어넣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손수건은 보기 드문 보조형 보물로 은신 효과가 뛰어난 태일화청부와 거의 맞먹었다. 태일화청부는 효과는 엄청났지만 은신을 하면 움직임이 느려졌고 신통을 부림에 있어서도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검은 손수건은 사용하기가 매우 편리하고 사용자의 법력에 따라 그 능력도 달라졌다. 오라인은 수행이 낮아 그에게 행적을 들킨 것이다.
이제 할 일을 마쳤으니 눈을 감고 얌전히 요양만 하면 될 것이다. 그의 머리 위로 금빛 빛무리가 떠오르더니 그 안에 금색 법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한립은 그대로 꼼짝하지 않았다.
전투가 끝나고 며칠이 지나갔다.
그동안 화 부인은 진귀한 영약과 고계 영석 한 무더기를 그의 거처에 두고 갔고, 한립은 거처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 * *
그로부터 수개월 후, 한립은 묵묵히 공법을 운용하다 돌연 눈을 뜨고는 입을 벌려 은색 불덩이를 분출했다. 불덩이는 반짝이는 빛 속에서 은색 불새로 변했다.
한립은 서령불새를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겉으로는 다른 것이 없었으나 의식으로 훑으면 은색 화염 속에 보일 듯 말 듯 금색 실이 들어있었다.
서령천화가 영선사광을 연화해내 생긴 변화였다. 한립은 잠시 고민하다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은색 불새가 그의 머리 위를 돌더니 입을 벌려 금은색 실을 분출했다.
금은색 실은 번뜩이며 벽에 펼쳐져 있던 금제로 날아갔다. 하얀 금제의 기운이 흔들리고 금은색 실이 아무렇지 않게 벽을 통과해 빠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빛이 반짝이더니 다시 벽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금은색 실이 다시 방 안의 나무 의자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은은한 향기를 발산하던 나무 의자가 순식간에 검게 물들어 푸른 연기로 사라졌다. 극독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한립은 한숨을 쉬고는 수결을 맺어 은색 불새를 몸 안으로 불러들였다. 다시 공법을 운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바깥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청소라 합니다. 한 선배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청소?’
한립은 잠시 의아해했으나 의식을 방출해 밖의 상황을 살폈다. 정원에는 푸른 궁장 차림의 여인이 서있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점잖고 귀티가 흘렀다.
한립은 그녀가 뜻밖에도 화신 중기의 수행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잠시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수사는 누군가? 화운도의 화양인은 아닌 듯한데. 어째서 이곳을 찾아온 게지?”
“저는 화양족 백주아의 사부되는 사람입니다. 화양족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소식을 듣고 도움을 주러 급히 달려왔으나 선생께서 이미 해결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자의 말을 들으니 선생의 신통이 뛰어나고 상족 상 3계의 선배님 같다하여 인사를 드리고자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선배님께 가르침을 구하고 싶습니다.”
“자네가 그 아이의 사부라고? 알았네. 안 그래도 며칠 후에 출관해 주변 상황을 알아보고자 했으니 수사를 만나겠네.”
끼익.
청소가 답하기 전에 하얀빛을 머금고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저절로 열렸다. 여인은 차분한 얼굴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자 한쪽 침상에 한립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를 보자 그녀의 눈빛에 놀란 기색이 스쳤는데 한립의 용모가 상당히 어려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으로 그를 훑고는 공경스런 태도로 한립을 향해 예를 올렸다.
“선배님께서는 과연 상족 상 3계의 존재셨습니다. 찾아오길 정말 잘한 것 같습니다.”
“수사의 법력도 약하지 않군. 앉아서 이야기하세!”
한립은 눈에서 남색빛을 일렁이다 곧 시선을 거두었다. 청소는 침상 옆 나무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청 수사는 바람 속성 공법을 익히고 있겠구만.”
한립의 말에 청소의 안색이 달라졌다.
“어찌 아셨습니까? 이전에 제가 선배님을 뵌 적이 있던가요?”
“그건 아닐세. 그저 신법이 가볍고 보물의 기운이 바람 속성 영기를 많이 띠는 것 같아 물어본 것이네.”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러나 여인은 깜짝 놀랐다.
한눈에 상대의 수행의 고하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나 몰래 숨기고 있는 보물의 영기 속성을 분별해 내는 것은 절대 일반적인 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여인은 더욱 공경스런 태도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역시 혜안을 지니셨습니다. 선배님 말씀대로 저는 바람 속성 공법을 위주로 수련하고 있습니다. 주아에게 화호군도 해역 분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선배님께서는 다른 해역 혹은 뇌명대륙에서 오신 분입니까?”
한립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어버렸다.
“나는 인근 해역 출신도 아니고, 뇌명대륙 출신도 아니네만.”
“그 말씀은 혹시 다른 대륙에서 오신 분이란 소리십니까?”
“총명한 수사로군.”
그의 간접적인 인정에 여인은 생각이 많아졌다. 한참 후 그녀가 표정을 바로잡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다른 대륙에서 오신 선배님이라면 얼마나 신통이 대단하실지 짐작이 갑니다. 그러니 오라왕족을 쉽게 처리하셨겠지요. 다른 대륙에서 뇌명대륙으로 오시는 선배님들은 보통 저희 화호군도를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선배님께서는 인근 해역에서 만년 만에 오신 다른 대륙 수도자이십니다.”
“하하, 만년 만이라! 영광이라 생각해야겠군. 허나 내가 이곳에 나타난 것은 전부 어쩔 수 없는 일로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네.”
한립이 입 꼬리를 꿈틀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선배님께서 어떻게 이곳에 오시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아마 공법과 신통이 평범하신 분은 아닐 것입니다. 제가 최근 수련 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선배님께 가르침을 구해도 되겠습니까?”
“가르침이랄 것도 없네. 나도 뇌명대륙의 공법이 얼마나 현묘할지 관심이 있으니까 말이야. 서로 교류하면 되겠군.”
한립은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청소가 크게 기뻐하며 연달아 감사 인사를 했다. 그녀는 한립이 예의상 저렇게 이야기해준다는 것을 알았다. 수행이 차이가 나면 서로 교류한다 해도 수행이 낮은 쪽이 더 이득을 보기 마련이었다.
그녀는 수련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이나 궁금했던 것들을 이야기하며 가르침을 구했다. 청소와 한립이 익힌 공법은 크게 차이가 있었으나 사실 수도자가 수련하며 마주치는 고비와 깨달음의 문제는 비슷했다.
한립은 숨김없이 그녀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연허기 수사의 조언들은 그동안 막혀있던 그녀의 마음을 뻥 뚫어주었다.
청소는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녀도 자신의 공법을 일부 이야기해야 했다. 그리하여 한립도 새로운 공법을 접하며 얻은 점이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족히 반나절 동안 이어졌다. 한립은 여인의 마지막 물음까지 답해주었고 청소는 눈을 감고 깨달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한립을 향해 대례를 올리며 감사 인사를 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덕분에 저는 수십 년의 수련 시간을 아낄 수 있었습니다.”
“아닐세. 이것도 자네의 기연이겠지! 나도 수사에게 물어볼 것들이 있으니 거래라고 해두세.”
한립이 차분한 얼굴로 청소를 보았다.
“무엇이든 하문하시면 알고 있는 내에서 성심성의껏 대답해드리겠습니다.”
“특별한 것은 아니고, 이곳에 원거리 전송진이 있는지 묻고 싶군. 다른 대륙으로 갈 수 있는 전송진 말일세.”
“전송진! 원래 머물던 대륙으로 돌아가시려 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몸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니 이곳에서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네. 보통 수도자들이 기거하는 곳에는 원거리 전송진이 갖춰져 있는 것으로 아네만.”
“맞는 말씀이지만 선배님을 실망시켜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곳에 전송진이 없다는 뜻인가?”
청소가 쓴웃음을 짓자 한립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수천 년 전에는 저희 화호군도에도 뇌명대륙으로 통하는 전송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해역에서 온 거대 요수의 공격을 받아 전송진을 지키고 있던 고계 수도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전송진도 망가졌지요. 그래서 이 주변 해역은 철저히 고립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오라인들도 정체를 드러내고 와씨족 분파를 공격한 것이겠지요.”
“전송진을 수리할 방법이 없겠는가?”
“재료만 갖추어지면 당연히 수리할 수 있지요.”
“청 선자의 말은 재료를 구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겠군?”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그가 지니고 있는 재료들만 해도 방대하니 희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재료들은 괜찮은데 유독 전송진을 구성하는 핵심 재료인 공운정(空雲晶)이 너무 귀해서 문제입니다. 유일하게 뇌명대륙의 몇몇 광맥에서만 생산되는 광물이라 이곳에서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공운정?”
한립은 태어나서 처음 듣는 재료의 이름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전송진은 심오한 진법이라 각 대륙마다 독특한 양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사용되는 재료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한립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질 때쯤 청소의 한 마디가 그를 일깨웠다.
“그러니까 공운정이 그 바다요수에게 삼켜졌다는 말인가? 게다가 그 요수가 인근 해역에서 살고 있고?”
“예, 그렇습니다. 당시 바다요수는 만조를 이용해 전송진으로 돌진해 한입에 삼키고 말았지요. 공운정도 그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백 년 전부터 어떤 이유에서인지 남부 심해에 요수가 출몰하기 시작했지요.
당시 바다요수를 발견했던 상족 열댓 명 중 단 두 명만이 살아남았고 나머지는 전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후 수십 년간 인근 해역 수사들이 전송진을 다시 발동하기 위해 수차례나 수사들을 모집해 요수를 죽이려 했지만 워낙 신통이 강하고 교활해 잡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수사들이 많을 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수사들의 인원이 적거나 누군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면 귀신같이 찾아와 공격했으니까요! 그 때문에 적잖은 수사들이 당했습니다.”
“대체 어떤 신통을 지녔기에 그렇게 상대하기 어려운 것인가?”
한립은 의아한 얼굴로 요수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았다. 일반적으로 바다요수가 아무리 수행이 높아도 여려 수사들이 힘을 합쳐 사냥하면 당해낼 수가 없었다.
“어떤 요수인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변이 바다요수로 보입니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고래를 닮았는데 자유자재로 크기를 늘렸다 줄였다 하고 태생적으로 수둔술에 능해 순식간에 바다 속에서 천리를 이동하지요.
아무리 수사들이 모여 요수를 막다른 곳으로 몰아도 수둔술을 사용해 포위를 뚫고 달아나 가둘 방법이 없습니다. 게다가 요수가 굉장히 난폭해 저희 해역에서 1인자로 불리는 은사 거사를 제외하면 아무도 혼자서는 상대할 엄두도 못 냅니다.”
여인이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자 한립의 희색도 많이 사라졌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공운정이 아직 그 바다요수의 체내에 멀쩡히 있을 거라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작 연화되었을 수도 있는데 말이야.”
“그건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공운정은 공간 속성을 지니고 있어 똑같은 공간 속성을 지닌 힘으로 공격하지 않으면 절대 부술 수 없으니까요. 그 바다요수의 속성이 비교적 복잡하지만 공간신통은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이 점은 오랜 세월 추적해왔기에 확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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