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2화. 참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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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부인과 화양인들은 죽다 살아난 표정으로 그제야 다른 두 종족들이 순식간에 사라진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두 종족의 대제사들이 화 부인보다 뛰어났다고 해도 영선사광에는 당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오라족은 절대 그녀와 다른 화양인들이 당해낼 수준이 아니었다. 지금의 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한립에게 달려 있었다.
“한 선생님, 조심하셔야 합니다. 영선사광은 공격을 튕겨낼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신통이나 금제에 영향을 받지 않고 극독도 지니고 있습니다. 일단 공격을 허용하면 몸 곳곳으로 극독이 퍼져 제거할 수 없지요. 그래서 본 족의 실력자들도 오래전 저 사악한 빛에 적잖이 죽어나갔다고 들었습니다.”
화 부인은 영선사광을 삼키고 한립의 체내로 돌아간 은색 불새를 걱정하고 있었다.
‘극독!’
의외의 정보였다. 하지만 기왕 서령천화가 영선사광을 집어삼킬 수 있었다면 그 독을 해결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여전히 두 오라인들을 주시했다.
“영선사광을 집어삼키다니!”
검은 보호막 속의 오라왕족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꽤나 놀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하, 자네들의 신통은 흥미롭게 구경하였네. 아쉽게도 극성으로 익히지 못해 손쉽게 제압당했지만 말이야. 기습해 그들을 처치할 요량으로 여기에 온 것 같으니 나는 어서 일을 마치고 계속 요양하러 가보겠네!”
한립이 가볍게 웃으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가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놀랍게도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고 오라왕족들의 지척에 이르렀다.
그때 한립의 몸에서 금빛이 크게 번지고 금색 갑옷이 떠오르더니 그의 머리 위로 금색 광채가 유유히 빛났다. 광채의 중심에 삼두육비의 금색 법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법상의 세 머리 중 두 개가 한립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금색으로 빛났다. 한립이 괴이한 신통을 드러내자 오라왕족 뿐만 아니라 화양족인들까지 기함했다.
우웅!
검은 광채가 진동하며 형체가 왜곡되어 일고여덟 장 크기의 거대한 칼날로 변해 허공을 갈랐다.
거대 칼날은 신비롭게 금은색 뇌전을 번뜩였고 그것을 본 한립은 한 손을 들어 허공을 쥐었다. 그러자 머리 위의 금색 법상이 눈을 번쩍 뜨고 여섯 개의 팔은 한립과 똑같이 움직였다.
콰앙!
금색 거대 손이 허공에 나타나 검은 칼날과 충돌했다. 검은빛과 금빛이 요동쳤고 금색 거대 손은 검은 칼날을 허공에서 막아냈다.
이에 금색 눈동자의 오라인이 크게 놀라 수결을 맺어 전갈 하체의 독침으로 한립을 공격했다. 그녀와 나란히 선 은색 눈동자의 오라인 역시 교활한 빛을 띠고는 입을 벌려 포효했다.
이어 그녀의 머리 위로 하얀 안개가 피어올라 반짝이는 은빛 속에서 거대한 인면(人面) 지네의 허상이 나타났다. 은빛이 번뜩이고 인면 지네의 허상도 한립을 공격했다.
그러나 두 오라왕족의 연합 공격에도 한립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는 한쪽 소매를 털어 수십 개의 푸른 검들을 불러냈고 작은 검들은 푸른빛으로 변해 날아드는 금색 독침을 향해 몰려갔다.
우웅!
금색 독침에 수많은 주술 문자들이 떠다니는 것이 이번 신통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알려주었다. 그러나 푸른빛이 번뜩이자 푸른 검빛들 속에서 금색 독침이 조각조각 나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에 두 오라인은 대경실색했다. 그러나 한립은 이에 그치지 않고 손을 뻗어 회색빛의 장막을 펼쳐 인면 지네 허상이 뿜어내는 은색 기운을 막았다.
동시에 한립의 손에서 거무튀튀한 작은 산이 떠올랐다. 한립은 힐끗 인면 지네를 보고는 작은 산을 움직였고, 인면 지네 위쪽에서 파동이 일며 작은 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은 나타나자마자 미친 듯이 불어나 검은 산봉우리가 되어 인면 지네의 등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지네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쉭쉭거렸고 엄청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추락했다.
이에 은색 눈동자의 오라인이 다급히 두 손을 풍차처럼 돌려가며 법결을 맺었고 얼굴에 은색 문자가 떠올랐다.
결국 그녀는 은색 정혈을 한 움큼 토해내 은색 주술 문자로 바꿔 인면 지네의 몸속으로 흡수시켰다. 인면 지네는 있는 힘껏 머리와 꼬리를 흔들며 검은 산을 뒤집으려 했다. 그것을 본 한립은 검은 손바닥을 들어 중얼거렸다.
“무거워져라.”
이에 검은 산이 진동하며 기이한 회백색 빛을 내뿜더니 삽시간에 열댓 배로 불어나 더욱 힘껏 인면 지네를 짓눌렀다. 그러자 간신히 추락을 멈추었던 인면 지네는 결국 속절없이 떨어져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쿠앙!
경천동지할 굉음이 대전 전체를 흔들더니 대전 바닥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검은 산은 구덩이 중심에서 빙글빙글 돌았고 아래쪽 인면 지네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은색 빛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인면 지네의 허상이 사라진 순간, 멀리 은색 눈동자 오라인이 창백하게 질려 피를 토했다. 이번에는 은색 피가 아니라 검붉은 죽은 피였다.
은색 눈동자의 오라인이 중상을 입자 나머지 오라인이 그녀 뒤로 이동해 등을 내리쳤다. 그러자 은색 오라인의 몸에서 금은색 빛이 크게 일며 기색이 한결 좋아졌다.
그러나 한립은 코웃음을 치며 허공의 푸른 비검 수십 개를 동시에 날려 보냈다.
“……!”
오라인들은 두려운 기색을 보이며 서로의 어깨를 짚었고 검은 광채가 나타나 그들을 완전히 감싸 주었다.
그때 수십 개의 푸른 실들이 검은 광채 앞에 이르렀다. 한립이 속으로 수결을 맺자 수많은 비검이 모호해지며 흐릿한 허상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한립이 비검을 제련한 후 얻게 된 검령화허의 신통이었다.
검들은 검은 광채를 이리저리 돌다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 파고들었다. 이에 오라인들은 재빨리 검은 실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이미 근거리에 이른 검빛들이 그들을 놓아줄 리 없었다. 검빛들이 교차하자 참혹한 비명이 터져 나오고 두 오라인의 몸에 수많은 구멍이 뚫렸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화 부인과 화양족들은 희색을 드러냈다. 그러나 한립은 명청령안을 발동해 두 시체 옆으로 가 인근 허공을 쥐었다.
화륵!
손바닥에서 은색 화염이 일자 금색과 은색빛이 나타나 화염에 휩싸였다. 그것은 금색 지네와 은색 지네였다. 지네들은 은색 화염 속에서 꿈틀거리며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한립은 오라인들의 원신을 그대로 놔줄 생각이 없었다. 그들의 원신은 은색 화염 속에서 점점 작아지더니 빛을 잃고 푸른 연기가 되어 소리 없이 사라졌다.
한립은 오라족 왕족을 해치웠으나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물론 두 오라인이 한립의 상대가 되기에는 부족했지만 처음에 그들의 수행을 파악할 수 없었던 일이 마음에 걸렸다.
이에 한립은 그들의 시신을 주목했다. 손을 뻗자 두 구의 시신이 날아들었고 명청령안으로 자세히 살폈다.
슉! 슉!
그가 눈을 반짝이며 손짓하자 두 개의 검은 손수건이 날아올라 그의 손에 들어왔다. 고개를 숙여 잠시 살피던 한립은 손바닥을 뒤집어 검은 손수건을 챙겼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한 선배님의 은혜는 저희 화양족이 대대손손 잊지 않을 것입니다.”
화 부인은 격양된 얼굴로 백주아와 함께 다가왔다. 그러나 한립이 챙긴 검은 손수건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했다. 이번 싸움을 통해 한립이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한 존재라고 느껴 감사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 것이다.
백주아 역시 한립의 신통에 무척 감명받았다. 작은 입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를 쳐다보는 눈빛에 공경심이 가득했다. 다른 화양족 제사들도 다가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허허, 별일 아니었네! 어차피 도와주기로 한 것이니 바깥에 있는 오라인들도 처리해주지.”
한립이 그들을 훑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한립은 곧장 비검들과 검은 산을 회수해 이번에는 금빛 한 덩이를 내보냈다. 그러자 허공을 선회하더니 표범을 닮은 작은 짐승이 나타났다. 바로 표린수였다.
영수를 본 화 부인과 뱀 인간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의식으로 작은 짐승을 훑고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작은 짐승이 표출하는 영기의 압력이 화 부인보다 위였기 때문이다.
“가서 오라인들을 전부 죽이고 오너라.”
한립이 명령을 내리자 표린수가 사납게 눈을 번뜩이고는 신형이 흐릿해져 일고여덟 개의 허상으로 변해 대전 밖으로 튀어나갔다.
화 부인은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졌다가 겨우 안정을 찾았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품에서 영패를 꺼내 허공을 가리키며 주술을 외웠다.
영패가 빛을 머금고 대전을 둘러싸더니 오색 광채가 사라졌다.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나는 돌아가 쉬어야겠네. 영수는 일을 마무리하는 대로 알아서 내게 돌아올 테니 신경 쓰지 말게.”
한립이 차분히 할 말을 마치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대청을 떠났다.
“한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화양족 전체가 멸족을 당할 뻔했습니다.”
한립이 사라지고 한참 후 뱀 인간 중 하나가 탄식하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처음에 대제사께서 열양신단을 외부인에게 내어준다고 해서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대제사님의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면 위기를 넘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다른 뱀 제사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화 부인은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나를 그리 추켜세울 것은 없네. 모든 것이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자는 심정으로 한 것이니. 하늘이 우리 일족을 보우하시어 한 선생님을 보내주신 것이겠지. 주아야, 네가 보기에 한 선생님의 수행이 네 사부님과 비교했을 때 어떠한 듯싶으냐?”
화 부인의 물음에 백주아가 미간을 좁히고 한참을 고민했다.
“비록 사부님이 상족 5계의 존재이시지만 오라왕족을 이렇게 가뿐히 죽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소녀의 대답에 화 부인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옆에 있던 네 명의 제사들이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한 선생님께서 상족 고계의 존재시라면 인근 해역에서 가장 강하다는 은사 거사도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확신하기 어렵네. 수행이 비슷해도 각자가 지닌 공법이나 신통 혹은 보물에 따라 승패가 갈리게 되는 법이니까.”
부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조심히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 말에 다른 뱀 제사들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선생님께서 우리 화운도에 얼마나 머물러 계실까요? 오래 거주하실 생각은 없으실까요?”
제사 중 한 명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그것도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겠군. 당장 떠나시지는 않겠지만 내 생각에 오래 계실 것 같지는 않네. 한 선생님의 수행에 우리 같은 작은 종족에 머물러 계시겠는가.”
화 부인은 이미 생각을 해보았는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다른 뱀 인간들도 생각에 잠겼고 대전 안은 고요해졌다.
“되었네. 이 일은 차차 논의하도록 하고 일단 바깥의 전투를 마무리 짓도록 하지. 비록 오라왕족을 죽였다고는 하지만 아직 고계의 오라인들이 남아 있을 것이네. 한 선생님의 영수가 강하다고 해도 모든 오라인들을 전부 죽일 수는 없을 것 아닌가. 우리도 어서 전장으로 나가 피해를 최소화시키세.”
화 부인이 재빨리 대전을 훑으며 명을 내렸다. 그러자 화양인들은 질풍처럼 대전으로 나가 함성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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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거처로 돌아온 한립은 금제를 다시 발동하고 침상에 앉았다.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침음했다. 우두머리인 오라왕족을 죽이고 표린수까지 보내놓았으니 토성의 전투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로써 화 부인이 귀한 단약을 내준 정을 갚았으니 앞으로 반년 정도 요양하고 떠나면 될 것이다.
한립은 문득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손바닥을 뒤집어 검은 손수건을 꺼냈다. 두 오라인 왕족에게서 얻은 보물이었다. 그는 신중하게 손수건을 살폈는데 표면에 검은 주술 문자들이 반짝이는 것이 한눈에 보기에도 평범한 보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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