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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921화 (678/2,000)

921화. 적

*

오갑수에 탄 이들은 전부 여인들로 검은 갑옷에 머리를 어깨까지 기르고 손에는 각종 병장기를 들고 있었다. 오갑수가 무릎을 꿇자 여인들이 뛰어내렸다.

한립은 그들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여인들의 하반신이 지네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 개의 가느다란 다리를 가진 하반신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이족 여인들은 훈련이 잘되어 있는지 순식간에 대열을 이뤄 움직였다. 그중 지위가 있어 보이는 이족 여인이 앞으로 나와 토성을 향해 미소 짓더니 순식간에 입이 귀까지 찢어져 날카로운 이빨과 뱀의 혀를 드러냈다.

그 모습에 화양족 족인들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한립 역시 조금 놀라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저들이 오라족이면 또 어떠한가? 어차피 패잔병일 뿐이다. 와씨족이 수만 년 전 그들의 뿌리를 뽑았다면 우리도 저들을 물릴 칠 수 있다. 다른 두 종족은 저들에게 기습을 당해 멸족의 화를 입었지만 우리는 만반의 대비를 했으니 저들이라고 어쩌겠는가.”

화 부인이 서늘하게 코웃음을 치며 구슬을 향해 손을 흔들자 붉은 빛이 반짝이며 구슬 주위의 불길이 사라져 진법이 운용을 멈췄다. 뱀 인간들은 그녀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는지 허리를 굽히며 동조했다. 두려움을 어느 정도 이겨내고 용기를 낸 것이다. 그것을 본 한립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 화 부인의 코웃음은 사실 모종의 정신력을 이용한 비술이었다. 굉장히 은밀한 비술이라 대연결을 익힌 그만이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작스런 적의 존재에 겁에 질렸던 저계 제사들이 말 한마디로 의지를 북돋을 리 없었다.

“적의 정체를 알았으니 그에 맞게 대응하면 그뿐. 너희는 네 무리로 나누어 성의 네 문을 감독한다. 오라족 제사들이 성으로 들어오는 것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누구든 적을 앞두고 물러서는 자는 본 족의 규율에 따라 징벌하겠다.”

화 부인이 몸을 일으키며 엄숙하게 명했다. 그러자 뱀 인간들이 분분히 일어나 명을 받들고 대전을 나섰다.

이제 대전 안에는 화 부인과 소녀 그리고 한립을 비롯한 뱀 인간 네 명이 전부였다. 네 명의 뱀 인간들은 결단 초기의 수행을 지녀 족 내에서 화 부인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자들이었다.

한립이 뱀 인간들을 훑고는 시선을 거두는데 그 순간 엄청난 고함소리가 들리고 폭음이 연달아 울렸다.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나 봅니다.”

화 부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화 수사께서는 나서지 않을 요량이신가?”

“굳이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제 추측이 맞다면 오라족 수장이 직접 저를 찾아올 테니까요.”

“오, 어째서 그런 추측을 한 것이지?”

“와씨족과 오라족은 오랜 원수지간입니다.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지요. 금제가 아직 뚫리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성 내로 침입하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은신술이 무척 뛰어나니까요. 그리고 그들은 지위가 가장 높은 자를 먼저 제거하고 남은 저계의 적들을 살육하는 것을 즐깁니다.”

“그렇구만!”

한립은 턱을 쓰다듬으며 무언가 생각하다 그녀가 깜짝 놀랄만한 말을 했다.

“그렇다면 수사 옆에 숨어 있는 자는 화양족에서 숨겨놓은 인물은 아니라는 뜻이군.”

“예? 그들이 벌써 이곳에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립은 거대 손으로 인근의 나무 기둥을 낚아채려 했다.

쉭!

거대 손이 다가가자 검은빛이 튀어나와 스무 장 밖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둔광 속에서 오라인이 나타났다. 화 부인과 나머지 화양족인들은 오라인을 보고 크게 놀라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파앗-

화 부인은 손바닥을 뒤집어 새빨간 돌 방망이를 꺼냈고, 나머지 뱀 인간들은 은색 칼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소녀는 어느새 등에 멘 노란 대궁을 들고 하얀 뼈 화살 하나를 활시위에 걸쳤다.

한립에게 걸려 억지로 모습을 드러낸 오라인은 옅은 보라색 피부에 두 눈이 은색으로 빛났다. 그녀는 조금 놀란 듯했으나 곧 무표정한 얼굴로 한립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기운이 이상하군요. 와씨족은 아닐 테고, 어느 상족인입니까? 자목족(自目族)입니까? 아니면 천환족(千幻族)입니까?”

오라인은 한립을 뇌명대륙의 영목신통을 지닌 이족인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에는 신경 쓰지 않고 한립은 시선을 대전 한쪽의 그림자로 옮기며 비검을 날렸다.

쉐액!

작은 푸른색 검이 전광석화처럼 날아가 대전 구석의 그림자를 갈랐다.

펑-

그림자 속에서 검은빛이 솟아올라 검과 교전하더니 그림자 하나가 떠올랐다. 한립은 남색빛이 일렁이는 눈으로 작은 검이 푸른빛을 크게 방출해 검은빛을 부수고 새로 나타난 검은 그림자를 베려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속도가 매우 빨랐으나 검은 그림자도 만만치 않은 자인지 신형을 틀어 검은 실로 변해 튀어나갔다. 검은 실이 번쩍이자 순간 열댓 장 밖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작은 검도 푸른 실로 변해 그 뒤를 쫓자 모두가 놀랐다. 검은 실은 위기를 피했다고 생각해 멈추려다 푸른 실이 쫓아오는 것을 보고는 다시 튀어나갔다.

푸른색과 검은색 실이 앞뒤로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며 추격전을 벌였다.

슉! 슉! 하는 파공음이 대전을 울렸다.

그들을 보며 뱀 인간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돌연 앞서 달아나던 검은 실이 모호해지더니 일고여덟 줄기로 불어나 사방팔방으로 날아갔다. 그것을 보고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리며 손짓했다. 그러자 푸른 실이 우뚝 멈춰 그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여러 실로 달아났던 검은 실도 대전 위에서 하나로 응결되더니 금색 눈동자를 지닌 오라인으로 변했다. 그녀는 사납게 한립을 노려보았다.

“오라왕족의 특징인 금색 눈동자! 역시 다른 두 종족의 대제사들은 당신의 손에 당했군요!”

화 부인은 상대의 눈동자를 보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흥, 내가 직접 나섰으니 당신 일족의 명운은 여기까지입니다.”

금안 오라인이 조소하며 날카롭게 답했다. 그때 처음에 나타났던 오라인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금안 오라인 옆으로 이동했다. 두 여인을 보는 한립의 눈이 가늘어졌다.

‘흠…….’

두 오라인은 몸에 괴이한 빛이 둘러싸고 있어 그의 강대한 의식으로도 수행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보아하니 상대는 이보로 몸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화 부인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백주아가 노란 대궁을 당겨 뼈 화살을 날렸다.

쉐액!

노란색과 하얀색이 뒤섞이며 빛의 화살이 튀어나가 몸을 떨었고 동시에 똑같이 생긴 화살들이 허공을 뒤덮으며 두 오라인을 공격했다.

소녀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선공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그것을 본 부인이 흠칫 놀라 이를 악물고 붉은 방망이를 흔들어 새빨간 불의 교룡을 분출했다. 이에 뱀 인간들도 은색 칼날을 휘둘러 도광(刀光)으로 허공을 갈랐다.

화양족 전부가 힘을 합쳐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각종 영기의 빛이 두 오라인을 뒤덮었다. 그러나 오라인들은 한 손을 들어 검은빛을 폭발적으로 방출했다.

검은빛들은 두 덩이의 검은 광채로 변해 빙글빙글 오라인의 주변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콰콰쿵! 쿠릉!

여러 공격이 검은 광채 인근에서 폭발하며 굉음이 진동했다. 검은 광채가 갈라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검은 광채 속에서 금색과 은색의 기이한 빛이 흘러나오며 두 광채가 폭발적으로 커져 하나로 합쳐졌다.

그러나 검은 광채는 금색과 은색의 기이한 빛을 품고 쏟아지는 화살과 뱀 인간들의 은빛 도광, 심지어 화 부인이 쏘아 보낸 불 교룡까지 전부 흡수해버렸다.

엄청난 기세의 공격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검은 광채 속에서 두 인영이 냉랭한 눈빛을 보냈다.

“영선사광(靈漩邪光)! 설마 영선사광을 수련하다니!”

화 부인이 그것을 보고 가슴이 철렁해 공격을 멈추었다. 그때 오라인들은 서로 한 손을 잡고 나머지 한 손을 펼쳐 화 부인과 소녀를 향해 금은색 가느다란 실을 쏘아 보냈다.

“어서 피해야 해. 억지로 막아서선 안 돼!”

부인이 크게 놀라 다급히 소녀에게 경고를 보내며 하얀 빛줄기로 변해 자리를 피했다. 이에 소녀도 재빨리 피하려 했지만 이제 막 금단을 이룬 터라 한발 늦고 말았다. 이에 금은색 실이 순간이동을 하듯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뼈 화살을 날려 보냈고 파공음이 울리며 황백색 빛이 크게 번졌다. 화살은 굵은 빛기둥으로 변해 날아드는 실을 막으려 했으나 황백색 빛기둥이 움찔하더니 괴이하게도 그대로 튕겨 되돌아왔다.

“아……!”

소녀의 반응이 아무리 빨라도 이렇게 근거리 공격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이에 그녀는 무의식중에 대궁으로 앞을 막았다.

조금 전 자신이 쏘아 보낸 화살의 위력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튕겨 되돌아온 빛기둥에 맞는다면 육체는커녕 혼백도 구할 수 없어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그녀의 귓가에 화 부인의 고함소리가 들려왔으나 소녀는 대궁을 든 채로 빛기둥의 열기에 휘말렸다. 소녀는 희망을 버리고 두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겼고 소녀는 푸른빛 속으로 사라졌다.

콰르르릉!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소녀가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고는 열댓 장 밖으로 물러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빛기둥은 그녀가 있던 자리를 스쳐 대전 벽으로 날아가 금제와 충돌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하아.”

그것을 보고 소녀가 한숨을 내쉰 순간, 다시 옷깃이 당겨지며 다른 곳으로 이동을 했다. 그제야 소녀는 고개를 돌렸고 등 뒤에는 한립이 그녀의 옷깃을 쥐고 담담하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첫 번째 공격이 실패하자 금은색 실이 그대로 방향을 틀어 또 소녀를 노렸던 것이다. 소녀가 한립과 공격을 피하는 동안 화 부인 역시 금은색 실에 쫓기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원영기 수행을 지녀 둔술 속도가 빨랐고 거기다 다른 네 명의 화양족 제사들이 은색 도광으로 금은색 실을 공격해 틈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상대의 공격을 튕겨 내다니 흥미롭구나!”

한립이 중얼거리며 소녀의 옷깃을 놓아주었고 회색 기운이 소녀의 앞을 막았다. 그러나 금은색 실은 회색 기운 속에 영향을 받지 않고 그대로 통과하려 했다.

그 모습에 소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러나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오색의 화염이 회색 기운 뒤에 나타나 금은색 실을 막았다. 그러자  실의 속도가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느려졌다.

이에 한립은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금은색 실이 갑자기 대량의 빛을 뿜어내며 다시 원래의 속도를 되찾고 오색 화염을 벗어나 소녀를 노렸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소녀는 두려움에 떨었으나 금은색 실은 아무런 징조도 없이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지더니 갑자기 그녀 뒤에 있던 한립 앞에 나타났다.

번개보다 빠른 속도였다.

‘어딜!’

한립은 순간 놀랐으나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그대로 입을 벌렸다.

펑!

한립의 입에서 은색 불구슬이 튀어나와 금은색 실과 충돌했다.

잠시 후 원자신광과 오색한염도 막지 못했던 금은색 실이 은색 화염 속에서 천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츠츳! 거리며 녹아 둥그렇게 뭉쳐졌다.

은색 화염은 활활 타올랐고 작은 불새가 품고 있던 금은색 덩어리는 눈에 보이는 속도로 녹아내려 나중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은색 불새는 날개를 펼쳐 맑은 소리를 내며 홀연히 사라졌다가 화 부인 앞에 나타나 그녀를 뒤쫓고 있던 금은색 실을 꿀꺽 삼켰다.

펑!

폭음이 울리고 은색 불새가 그 자리에서 폭발해 은색빛의 점으로 사라졌다. 그때 한립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검은 광채 속의 두 오라인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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