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920화 (677/2,000)
  • 920화. 오갑수(烏甲獸)

    *

    형태가 없는 의식의 힘이 두 명의 한립을 조심스럽게 공격했다. 그러나 두 명의 한립은 반응이 완전히 달랐다. 눈을 감고 있는 쪽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반응이 아예 없었다.

    소녀는 의식을 방출한 순간, 상대가 죽은 사람처럼 의식 파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이것은 상대가 비술을 사용해 의식을 철저히 숨기고 있거나 아니면 혼백이 담기지 않은 텅 빈 육체일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헛, 이런!’

    갑자기 소녀의 안색이 급변하며 입술을 덜덜 떨었다. 소녀의 의식이 은밀히 상대에게 접근하는데 갑자기 거대한 소용돌이에 빨려가듯 통제할 수 없었다.

    이에 소녀는 깜짝 놀라 급히 비술을 거두고 의식을 회수해 다행히 아무런 이상 없이 되돌아왔다. 소녀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때 눈을 뜨고 있던 한립이 그녀를 향해 웃는 듯 마는 듯한 묘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화 부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열양신단의 약효와 복용법에 대해 설명을 마쳤다. 그리고 별다른 말없이 인사를 하고 혼비백산해 있는 딸아이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제혼, 너도 참. 어째서 갑자기 어린아이를 놀린 것이더냐?”

    그때 두 눈을 굳게 감고 있던 한립이 화 부인과 소녀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는 눈을 뜨고는 방의 금제를 다시 발동했다.

    “주인님! 계집아이가 간도 크지 않습니까? 겨우 결단기 수행으로 감히 주인님의 의식을 시험해 보려고 하다니요.”

    제혼이 웃음을 흘리며 답하더니 새까만 작은 원숭이로 변했다. 제혼은 천연성에서 지능이 발달한 이후 다양한 경전을 읽으며 지식과 경험을 쌓아 이제는 ‘한립’으로 변신해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작은 원숭이가 한립의 어깨 위로 올라가더니 옥함을 한립에게 들어올렸다. 이에 한립은 미소 지으며 더 이상 무어라 하지 않았다.

    한립이 옥함을 받아들자 옥함이 저절로 열렸다. 붉은 기운이 돌고 뜨거운 기운이 물씬 풍기는 것이 마치 화로 옆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한립은 기뻐하며 자세히 단약을 살폈다. 붉은 기운 속에 구슬 하나가 광채를 띄며 그의 시선을 끌었다.

    “이것이 열양신단이라는 것이로구나! 과연 특이하군.”

    그가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가져가자 뜻밖에도 구슬은 붉은 화염을 분출해 그의 손을 휘감았다.

    평범한 수사였다면 괴이한 화염에 화상을 입었겠지만 한립의 몸은 이 정도 화염에는 끄떡없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구슬을 들어 올렸다. 제혼도 그의 어깨에 앉아 새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한립은 단약을 살피고 생각에 잠겼다. 화 부인의 말에 따르면 이 단약은 불 속성이 너무 강해 그대로 복용하면 몸 안에서 처리하기가 복잡하다고 했다. 상성이 맞지 않는 사람은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고 저계 수사들은 몸이 불타오를 수도 있다고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다량의 한기(寒氣)를 지닌 보조 단약을 같이 복용해 화기를 누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립은 억지로 단약의 속성을 누르는 것이 아까웠다. 그래서 그는 입을 벌려 은색 구슬을 분출했다. 서령천화였다.

    주먹 크기의 은색 불새로 변한 서령천화가 그의 주변을 날아다녔다.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리고 손끝을 튕겨 붉은 구슬을 천천히 날려 보냈다. 그러자 은색 불새가 맑은 소리를 내며 붉은 구슬로 쇄도하더니 은색 화염으로 열양신단을 휘감았다.

    * * *

    한립의 거처에서 빠져나온 화 부인과 소녀는 하얀 구름을 타고 빠르게 이동했다.

    “의식에 손상을 입은 것은 아니겠지?”

    “괜찮습니다, 어머니. 그저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소녀가 멋쩍게 웃어보였다.

    “괜찮다면 됐다. 보아하니 한 선생은 확실히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구나. 열양신단을 내어드린 것이 다행이야.”

    “네, 구체적으로 알아낸 바는 없지만 확실히 한 수가 있는 분 같았습니다. 문제는 어머니의 원기가 크게 상해 수명이 줄어든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하하, 나는 대제사이다. 수명이 줄어든다 해도 그것으로 우리 종족을 위기에서 구할 수만 있다면 만족해야겠지. 그간 대대로 대제사들의 희생과 비호가 없었다면 우리 화양족이 오늘날까지 유지될 수 있었겠느냐? 역대 대제사 중 제명대로 살다 돌아가신 분은 얼마 없다.

    이제 그 일은 되었으니 어서 돌아가 다른 준비를 하자꾸나. 한 선생께서 하루빨리 신단의 효과를 봐야 이 위기에서 우리를 구해주실 터인데…….”

    “허나…….”

    소녀가 두 눈이 붉어지며 반박하려 했으나 화 부인은 더 이상 이 일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은지 구름의 속도를 높였다. 하얀 빛덩이로 변한 구름이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한립이 요양하는 동안 화운도의 경비는 어느 때보다 삼엄해졌다. 섬에 거주하는 뱀 인간들은 더 이상 섬 바깥으로 재료나 식량을 구하러 떠나지 않았고 십여만 명의 족인들은 전부 토성으로 결집했다.

    성에 설치해둔 금제들은 전부 발동되어 보잘것없어 보이던 토성의 흙벽은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 빛의 장막으로 둘러싸였다. 또한 수천 명에 달하는 정예 병사들이 전부 무장을 하고 수시로 성 안을 순찰했다.

    성 중심에는 화양족 제사들이 모두 모여 화 부인과 소녀의 명을 받아 대전에서 심신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대전 안은 현묘해 보이는 오색빛의 장막이 펼쳐져 있었고 그 기운의 원천은 광장 중앙의 원추형 법기였다.

    경계를 강화하자 토성에는 이전과 다른 긴장감이 흘렀다. 대전의 화 부인과 소녀가 제사들과 기운을 비축하고 있는데 사내의 목소리가 결계를 넘어 대청을 울렸다.

    “화 수사, 내 단약을 연화하고 출관하였네. 금제를 열어주게.”

    한립이었다. 그 말을 듣고 다른 제사들은 약간 놀란 듯했으나 화 부인은 희색을 드러냈다. 솔직히 상대가 약조를 이행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한 것이다.

    그러나 멸족의 위기를 두고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외지인을 믿어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화 부인은 기뻐하며 한 손을 저어 붉은 원반을 꺼냈다. 그러자 대전을 보호하던 오색 기운이 반짝이고 균열을 만들었다. 물론 몇 호흡 만에 균열은 사라지고 오색빛의 장막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대전 문밖에 금빛이 번뜩이고 누군가 괴이하게 날아들며 차분히 걸어 들어왔다. 푸른 장포를 입은 청년의 얼굴에는 영롱한 빛이 어렸다.

    한립은 보름 전과 비교해 안색이 확연히 달라졌다. 열양신단의 덕을 본 것이다.

    “한 선생님께서 도움을 주고자 찾아와주셨군요! 법력은 어느 정도 회복하셨는지요?”

    화 부인이 몸을 일으키며 직접 그를 맞이했다. 주아도 불편한 얼굴로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열양신단이 요상에 좋기는 하나 부상이 심한 탓에 7, 8성밖에 몸을 회복하지 못했네. 남은 부분은 단약에 의지해 치유하기보다는 시간이 약이라고 생각하고 있네. 허나 그대들의 적이 너무 강하지 않다면 힘을 보태기에는 충분할 것일세.”

    화 부인은 한립이 열양신단을 복용하고도 다 회복하지 못했음을 듣고 미세하게 표정이 달라졌다가 그의 자신 있는 언사에 마음이 편해졌다.

    대전 안의 화양족 제사들이 그에 대해 속닥거렸지만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화 부인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자 예의상 몇 마디를 나눴을 뿐이었다.

    그때 화 부인이 숙연한 눈빛으로 대청 안을 둘러보자 낮게 속닥거리던 제사들은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대전 안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바로 그때 한립은 자신을 살피는 시선을 느끼고 두 눈을 떴다. 백주아가 몰래 그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한립과 눈이 마주치자 소녀는 두려운 기색을 보이며 바로 시선을 돌렸다. 지난번 단약을 주러왔을 때의 일이 꽤 인상 깊게 남은 듯했다. 한립은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눈을 감았다.

    열양신단은 서령천화로 불 속성 영기를 흡수해 손쉽게 연화시킬 수 있었다. 화 부인이 단약의 효능에 대해 과장한 것은 아닌지 정혈과 의식의 손상마저 짧은 시간 내에 상당 부분 회복되었다.

    단약으로 효과를 보았으니 한립은 약조를 거스를 생각은 없었다. 그의 수행은 연허기에 이르렀고 강력한 신통을 몇 가지 갖고 있어 부상당했다 해도 충분히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도착하고 반나절도 되지 않아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쿠릉!

    토성의 사방팔방에서 굉음이 울렸다. 거대한 괴물이 토성을 맹렬히 공격하는 소리 같았다. 대청 안에 앉아 있던 화양족 제사들이 긴장된 얼굴로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 부인은 냉정한 얼굴로 눈썹을 끌어올렸다.

    “다들 어찌 그리 당황하는 것인가! 우리는 진작 대비를 마쳤다. 금제가 층층이 세 겹이나 둘러싸여 있으니 상대가 아무리 세력이 커도 단번에 성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할 것이다. 일단 적의 정체를 파악하고 대책을 수립한다.”

    화 부인은 일족의 우두머리로서 위엄을 발휘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한립도 눈을 떴지만 무척 태연해보였다. 산전수전 다 겪어온 그가 이 정도 전란에 당황할 리 없었다.

    그때 화 부인이 소매를 털어 붉은 영패를 꺼내 대전 중앙을 비추었다. 영패에서 붉은 빛이 튀어나와 대전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우웅!

    바닥에서 붉은 기운이 반짝이며 진법이 나타나 화염에 불타올랐다. 이에 화 부인이 손에 들고 있던 영패가 빛을 번뜩이더니 한 장 크기의 수정구슬로 뭉쳐져 화염 속에서 천천히 회전했다.

    하얀 장포의 뱀 인간들이 몰려들어 진법 바깥에 자리 잡았다. 그들은 주술을 읊으며 법결을 수정 구슬로 던져 넣었다. 진법의 불길이 더욱 거세게 타오르고 수많은 불꽃들이 불뱀으로 변해 붉은 수정으로 튀어 올랐다.

    그러자 수정 구슬 표면이 번뜩이더니 화염 속에서 생생하게 바깥의 상황을 비춰주기 시작했다.

    토성 곳곳에는 무장한 뱀 인간들이 빠르게 성벽으로 올라가 방어전을 펼칠 준비를 했고 몇몇 도마뱀 요수를 부리는 뱀 인간들은 성문 근처로 몰려들었다.

    다들 살기 가득한 모습으로 순식간에 수천 명의 뱀 인간들이 일사분란하게 정해진 위치로 이동했다. 그것을 본 한립의 눈빛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진법과 구슬의 효과가 만롱주와 비슷하지 않은가.’

    소규모 분파에 불과한 화양족이 이런 물건을 지니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성벽 바깥을 비추어라!”

    화 부인이 명을 내리자 제사들은 다시 법결을 던져 넣었고 수정 구슬이 모호해지며 성벽을 비추었다.

    저녁 무렵이라 황혼이 지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전 안에 있는 이들은 숨을 죽이고 주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땅이 울리더니 쿠르릉 거리던 소리가 멈추었다. 제사들은 깜짝 놀라 안색이 달라졌다.

    어두워진 하늘에 엄청난 크기의 검은 비늘 갑옷을 입은 소 모양의 괴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소 괴물들의 등에는 집채만 한 광주리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 수많은 인영들이 빼곡하게 타고 있었다.

    소 괴물들은 거대했지만 천천히 걸어와 기척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저건 오갑수(烏甲獸)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저 위에 탄 자들은…….”

    뱀 인간 중 하나가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렸다.

    “오라족! 말도 안 됩니다. 와씨족에 의해 멸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어찌 나타났겠습니까.”

    “맞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수만 년 전에 멸종된 오라족이 쳐들어오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대전 안의 뱀 인간들은 의견이 분분했으나 오갑수가 가까워지며 등에 탄 이들이 선명하게 비춰지자 다들 난색을 표하며 입을 다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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