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8화. 열양신단(烈陽神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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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가만히 앉아 검은 안개 속에서 눈을 감았다. 검은 안개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한립 주변을 천천히 돌다 사라졌다.
“법기가 특이하구만. 의식을 움직일 것도 없이 스스로 내용을 불어넣어주다니”
한립이 눈을 뜨며 유창하게 와씨족 언어를 내뱉었다.
“잔기술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저희 화호군도의 해역도이니 살펴보시지요!”
부인이 겸양하며 이번에는 하얀 돌조각을 던져주었다. 이번에는 돌조각이 터지지 않았고 한립이 입에서 기운을 뿜어 그것을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그의 얼굴에 미세하게 놀람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한립의 표정을 주시하던 부인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잠시 후 한립은 이마에서 하얀 돌조각을 떼어내 부인에게 던져주고는 생각에 잠겼다. 이에 부인은 눈치 있게 그를 기다렸다.
얼마 후 한립은 고개를 들며 담담히 물었다.
“그러니까 이곳이 뇌명대륙(雷鳴大陸)에서 반년 정도 걸리는 섬이란 말인가?”
“반년이요? 그건 선배님의 속도이고 저희 같은 후배들은 수십 년은 걸릴 것입니다. 가는 길이 극히 위험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부인이 화들짝 놀라 쓴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도에서 보면 화양족이 차지한 섬이 그리 많지 않더군. 나머지 섬들에는 다른 이들이 살고 있는가?”
“사실 저희가 머물 수 있는 곳은 이 화운도(火雲島) 뿐이고 가끔 식량이나 재료를 찾아 가까운 섬에 다녀오곤 합니다. 다른 섬들은 대부분 다른 강한 종족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몇몇 섬들은 선배님과 같은 상족 선배님들이 홀로 머물기도 하고요. 저희 화양족은 인근에서 그다지 규모가 큰 종족은 아니라서요.”
부인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랬구만!”
“선배님은 먼 곳에서 오신 분 같습니다. 저희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저희가 수행은 높지 않아도 도움이 될 일이 있다면 적극 도와드리겠습니다.”
“나는 확실히 인근 지역 출신은 아니네. 다른 곳에서 알 수 없는 금제를 건드려 이곳으로 전송되었지. 또한 그 때문에 문제가 생겨 이 꼴이 된 것이네.”
“비록 지금은 몸이 불편하실지 몰라도 그 수행은 제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수준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심이 어떠십니까? 저희 화운도가 그리 크지는 않아도 꽤 괜찮은 영맥을 지니고 있습니다. 선배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거처를 마련해 원기를 회복하실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이 섬에서 요양을 하라…….”
한립이 미소 지으며 긍정도 부정도 아닌 반응을 보였다. 그것을 본 부인이 마음이 급해져 서둘러 덧붙였다.
“저희 섬의 영맥은 인근의 다른 섬과 비교해도 빠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섬에 모아 놓은 영약과 영석도 선배님께 드릴 수도 있고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한립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다.
“난 함부로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닐세.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하는 것이 좋을 게야.”
부인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조급해 했다는 것을 깨닫고 안색이 달라졌다.
“휴, 선배님께서 어느 정도 예상을 하신 듯하니 더는 숨기지 않겠습니다. 너희들은 물러가 있거라!”
부인이 한숨을 내쉬며 대청에 있던 뱀 인간들에게 명을 내렸다. 그러자 하얀 장포를 걸친 뱀 인간들이 예를 취하고 대청을 나섰다. 부인은 그들이 모두 나가자 신중한 얼굴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선배님이 보시기에 제 수행이 어떠한 것 같습니까?”
“그럭저럭 나쁘지 않군.”
부인을 훑은 한립이 조용히 답했다.
“허나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저도 다른 족인들처럼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상족의 몸이 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뜻이지요.”
“자네가 말하는 상족이라 함은…….”
“화형기를 거쳐 상족의 몸을 갖춘 수도자를 뜻합니다. 본래 종족의 몸에서 벗어나 상족의 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오, 자네의 말투로 보아 정상적인 방법으로 경지에 오른 것이 아니군. 영약이나 혹은 비술을 이용해 강제로 경지를 이룬 것인가?”
“역시 고명하십니다. 진귀한 단약 몇 가지를 이용해 겨우 지금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허나 그 대가로 저는 더 이상 수도계에서 경지를 높일 수 없고 수명도 동계 상족의 절반밖에 되지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한 것은 화양족의 앞날이 풍전등화(風前燈火)이기 때문입니다.”
부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자세히 말해보게.”
“반 년 전 저희와 인접한 또 다른 와씨족 분파 첨치족(尖齒族)이 멸족을 당했습니다. 족 내의 모든 여인들은 잡아먹혀 뼈만 남았고 사내들은 실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옆의 또 다른 와씨족 분파 갈미족(蝎尾族)도 똑같은 화를 당했습니다.
인근 해역에 와씨 일족의 분파라고는 저희 세 종족이 다였는데 나머지 둘이 멸족을 당했으니 다음 차례는 저희 화양족이 아니겠습니까? 멸족의 원인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으나 한 사람의 짓은 아니고 강력한 종족이 연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멸문당한 두 종족의 대사들의 수행이 저와 비슷해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비술을 펼쳐 상족 화형기 경지로 끌어올린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이곳에 남겨두어 그 화를 대신 막게 할 생각이었구나! 내가 내 몸조차 가누지 못할까 걱정이 되지 않더냐?”
이야기를 다 들은 후 한립이 미소 지었다.
“선배님의 수행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법력과 경지가 저보다 훨씬 높으신 분이란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선배님의 부상은 저희 화양족이 지닌 요상에 특효인 ‘열양신단(烈陽神丹)’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선배님이 남아서 도움을 주신다면 이 단약을 바쳐 단시간 내로 회복하실 수 있게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
부인이 이를 악물고 드디어 자신의 패를 드러냈다.
“열양신단! 불 속성의 영단이겠구만. 내 부상은 수사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겨우 단약 한 알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네.”
“선배님 이 단약은 쌍두염교(雙頭炎蛟)의 내단으로 제련한 후 줄곧 족 내의 지화(地火)로 배양해 이미 수천 년째 이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효과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부인은 한립의 말에 일말의 희망을 보아 열심히 설명했으나 한립은 여전히 머뭇거렸다.
“저, 이렇게 하시는 것은 어떨지요. 선배님이 잠시 이곳에 머물며 열양신단의 효과가 어떤지 직접 살펴보시는 것입니다. 큰 효과가 없으면 저도 도와달라는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허나 효과가 있다면…….”
“그 열양신단이라는 것이 정말 내 부상에 차도가 있다면 화양족이 이번 위기를 넘길 수 있게 도움을 주겠네. 미리 말해두지만 적이 너무 강력한 세력이라면 그 뒤는 나도 어쩔 수 없네.”
“그거야 당연하지요! 제가 아무리 아둔해도 선배님께서 저희 종족을 위해 목숨을 걸어주시기를 청할 수야 있겠습니까.”
부인은 한립의 말에 무척 기뻐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여 이번 일을 마무리 지었다. 이후에는 주변 이족들에 대한 문답을 이어갔고 대화를 마치자 그녀는 그를 요양할 수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부인이 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흔들자 하얀 손수건 법기가 수 장 크기의 하얀 구름으로 바뀌어 한립을 의자에 앉은 채로 받쳐 날아올랐다.
하얀 구름이 대전을 빠져나가자 문밖에서 대기하던 뱀 인간들이 전부 고개를 굽히며 부인을 전송했다. 하얀 구름의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지만 금방 한립을 물 좋고 푸르른 작은 산에 데려다 주었다.
* * *
작은 산 아래에는 녹색 건물들이 모여 있는 장원이 있었다. 부인은 하얀 구름을 몰아 그 앞에 멈추고 한립을 향해 미소 지었다.
“한 선배님 이곳은 어떠십니까?”
한립은 깊게 숨을 들이마셔 농염한 영기를 느끼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은 기뻐하며 하얀 구름을 다시 움직여 장원 안으로 들어가 한립을 방 안으로 들여보내 주려했다.
그때 한립이 빙긋 웃으며 만류했다.
“수고했네. 여기서부터는 내가 알아서 들어가겠네.”
그가 몸을 일으켜 하얀 구름 위에 서더니 천천히 땅으로 내려섰다.
“서, 선배님께서는…….”
“심각한 부상이기는 하나 이제 거동은 가능한 정도가 되었네.”
“감축 드립니다. 원래 제자 몇 명을 보내 시중 들게 하려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겠습니다.”
“난 요상을 할 때 주변에 누가 있는 것을 원치 않네. 한동안 머물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군. 아까 말한 열양신단은 가능하면 빨리 가져다주게. 효과가 있다면 얼른 기운을 차려야 자네 일족을 도와줄 것이 아닌가.”
“예, 당연히 그래야지요. 다만 지화에서 꺼내는데 며칠은 소요되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며칠이야 기다릴 수 있지. 어쨌든 가능한 빨리 가져다주게. 그리고 이만 쉴 테니 돌아가 보게나.”
한립이 축객령을 내리자 부인은 홀로 하얀 구름을 타고 떠나갔다. 한립은 하얀 구름이 하늘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다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그다지 크지 않았고 나무로 만든 가구가 전부였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 곧바로 방 한쪽에 자리 잡은 침상에 올라 가부좌를 틀었다.
“잠깐 서 있었다고 그간 쌓은 법력이 또 바닥나다니. 정혈을 잃어도 너무 많이 잃었구나.”
그는 저물탁을 스쳐 네다섯 가지의 약병을 꺼내 입에 털어놓고는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전 근처가 뜨거워졌다 서늘해 졌다하며 열기와 냉기가 온몸을 타고 흐르며 몸을 보해주었다.
‘과연 만년영약으로 제련한 요상 성약들이 효과가 있어!’
곧 그의 몸에 희미한 금빛이 어리며 머리 위로 금빛 그림자가 나타나 흔들렸다.
같은 시간, 토성으로 돌아온 부인이 광장 대전 앞에서 내려섰다. 수십 명의 저계 제사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염무는 나를 따라 들어오고, 나머지는 가장 먼저 한 선생님을 발견한 이들을 불러 오거라.”
“예!”
부인의 명에 뱀 인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고 한립을 데리고 온 염무는 얌전히 그를 따라 대전으로 들어갔다.
“네가 그 분을 모셔 왔으니 어떤지 말해 보거라. 지금까지 살펴본 것이나 들은 이야기 모두 빠짐없이 이야기해야 할 것이야!”
“제자 보고 들은 바를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 제자가 항구에서…….”
염무는 아주 상세하게 한립과 동행한 과정을 이야기했다.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사소한 것도 부인은 아주 집중해서 들었다.
몇 시간 후, 처음 한립을 발견한 장한과 그 일행들이 도마뱀 요수를 타고 토성으로 들어와 대전으로 향했다. 그들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고 거의 반 시진이 지나서야 염무와 함께 대전을 나섰다.
그때 대전 상석에 앉은 부인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고민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어머니, 곤란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돌연 맑은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주아니? 언제 돌아온 것이야?”
부인이 목소리를 듣자마자 반색해 물었다.
그러자 하얀빛이 번득이고 호리호리한 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려보이는 소녀는 머리에 은빛이 반짝이는 고리들을 매달고 등 뒤로는 커다란 노란 대궁과 하얀 뼈 화살 세 개를 메고 있었다.
또 허리춤에는 검은 주머니를 차고 손에는 하얀 깃발도 들고 있었다. 특히 소녀의 뱀 꼬리는 너무 하얗게 생겨 어떤 비늘이나 문양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우리 주아가 왔구나! 몇 년간 못 본 사이에 수행이 많이 늘었어.”
부인이 서둘러 몸을 일으켜 소녀를 품에 안았다.
“저야 말로 깜짝 놀랐습니다. 어머니께서 그동안 화형기에 이르셨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수백 년간 넘지 못하던 고비를 어찌 그냥 넘었겠느냐. 연선과(煉仙果)를 복용했을 뿐이다.”
“예? 연선과를 복용하셨다고요! 그럼 수명이 크게 줄어드는 것 아닙니까?”
소녀의 안색이 급변하며 부인을 손을 끌어 맥을 짚고는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앞으로 어찌 될지 알 수 없는데 수명이 다 무슨 소용이라고. 되었다. 그런데 너의 사부님은 같이 안 오신 것이냐?”
“어머니께서 보내신 서찰을 받았을 때 사부님께서는 마침 다른 섬에 친우를 만나러 가신 참이었습니다. 혹시 큰일이 난 것은 아닌가 하여 사부님이 섬을 지키라 남겨 주신 보물 몇 가지를 챙겨 당장 날아온 것입니다. 막 대전에 들어섰는데 어머니께서 ‘한 선생’과 연관된 일을 조사하고 계시기에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네 사부께서 오시지 않았다니 정말 상황이 암담하구나.”
소녀의 말을 듣고 부인의 안색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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