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7화. 대제사(大祭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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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경이 지나 섬과 가까워졌을 때 갑자기 마른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며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기상변화에 한립은 흠칫 놀랐지만 골주들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진 못했다.
뱀 인간들이 탄 배의 아래 부분에 소형 진법이 나타나 하얀빛으로 배를 보호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뱀인간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파도가 거세져 작은 배를 사이에 두고 두 세장 높이의 거대한 파도가 철썩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하얀 보호막 덕에 배가 뒤집히거나 이족인들이 사망하는 일은 없었지만 이전처럼 나아가지는 못했다.
한립은 갑작스런 변화에 여인들을 살폈는데 얼굴이 조금 굳었을 뿐 당황하거나 겁에 질린 표정은 아니었다.
‘다른 수가 있는 모양이구나.’
과연 그의 예상대로 작은 배들이 위험천만한 상황에 고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섬에서 우윳빛 빛기둥이 솟구쳐 먹구름으로 올라갔다.
쿠르릉.
동시에 먹구름이 진동했고 하얀 빛기둥에 흩어져 백여 장 크기의 구멍이 뚫렸다. 파도는 여전했지만 해수면의 바람이 잦아들어 뱀 인간들은 열심히 노를 저어 빠르게 나아갈 수 있었다.
잠시 후 골주들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작은 항구에 정박했다. 한립은 가마를 타고 섬에 상륙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먹구름에 뚫렸던 구멍이 사라지고 강한 파도가 일었다. 한립은 섬에서 방출한 빛기둥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의식이 회복되지 않았지만 빛기둥 속의 영력이 굉장히 혼잡한 것으로 보아 강력한 신통을 지닌 존재가 나선 것은 아니었다. 아마 진법이나 법기가 영석의 힘을 빌려 방출한 빛기둥일 가능성이 컸다.
이런 정도의 빛기둥은 그에게 별 것 아니었지만 이족인들이 사는 외진 섬에서는 신기하게 여겨질 것이다.
한립은 다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는데 열중했다. 연안을 따라 돌로 만든 낮은 건물들이 보였고 높이가 백 장에 이르는 거대한 돌기둥도 하나 있었다.
돌기둥 아래의 작은 목조 건물에 뱀 인간들이 사는 듯했다. 그때 석조건물 중 하나에서 일고여덟 명의 뱀 인간들이 걸어 나왔다.
가장 앞선 이족인은 풍만한 몸매를 지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장한과 일행들이 멘 짐들을 보고 미소 짓다가 한립을 보고 멈칫했다.
그때 장한이 빠르게 달려가 예를 취하고 그 간의 일을 보고했다. 뱀 여인은 그 말을 듣고 한립을 살피더니 놀란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신형을 번득이며 한립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그러나 여전히 알아 들을 수 없어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도 상대는 포기하지 않고 예닐곱 가지 언어를 시도했다.
그녀가 마지막 언어를 내뱉었을 때 한립의 표정이 달라졌다. 바로 비령인의 언어였다. 여인은 떠듬거리며 익숙하지 않은 어투로 비령인의 말을 했다.
“비령어를 할 줄 아는가?”
“상족(上族) 대인께서 비령어를 할 줄 아신다니 다행입니다. 저는 화양족(火陽族)의 보조 제사(祭祀)인 염무라 합니다. 상족 대인을 제가 어찌 칭해야 좋을까요?”
여인은 한립이 비령어를 알아듣자 기뻐하며 바로 예를 취했다.
“한 선생이라 부르면 되네. 화양족? 처음 듣는 이름인데 이곳이 어느 해역인지 알 수 있겠는가?”
“화양족은 와(媧)씨 일족의 아주 작은 분파로 한 선생님께서 저희 종족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하신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상족 신분의 대인께서 저희 화양족을 찾아 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겨우 보조 제사의 신분이라 인근 해역과 상족의 일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한 선생님을 직접 대접할 자격도 못되고요. 괜찮으시다면 대제사님께 모셔다 드릴 테니 이야기를 나눠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화양족 염무가 차분히 설명했다.
“대제사!”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의 뱀 여인을 살폈다. 희미하게 영기가 느껴지는 것이 연기기 정도였지만 수도자임에는 틀림없었다. 보조 제사의 수행이 이렇게 낮으니 대제사의 수행도 그다지 높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에 한립은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수락에 여인은 한시름을 놓았다.
그녀가 볼 때 눈앞의 상족인의 기운은 너무 이상했다. 영기의 압력으로 봐서는 그녀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의식으로 훑으며 수행을 헤아릴 수 없었다. 이런 괴이한 일은 대제사님이 처리하는 것이 합당했다.
여인이 장한 등에게 분부를 내리며 한 손으로 허리춤을 스쳐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서 놀랍게도 새하얀 영조가 나타났다. 앵무새를 닮은 새는 두 눈이 화염처럼 붉었다.
여인은 새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는 이상한 소리를 내고는 날려 보냈다. 그러자 영조가 하얀 빛으로 변해 섬 깊숙이 날아갔다.
“대제사님께 고했으니 이제 저희 성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염무가 웃음을 띠고 말했다.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렸을 뿐 반대하지 않고 두 눈을 감았다. 그의 묵인에 염무는 뱀 여인들을 대동하고 작은 돌길을 따라 섬 중심으로 향했다.
몇 리를 이동한 후에 염무는 허름한 건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몇몇 남녀 화양족들이 열댓 마리의 짐승을 기르고 있었고, 헛간에는 새까만 식물로 엮은 검은 가마가 놓여 있었다.
염무가 다가가자 뱀 인간들이 다가와 공손히 안부를 물었다. 이에 염무가 담담한 어투로 대답해주고는 검은 가마를 가리켰다.
조금 놀란 뱀 인간들이 한립을 보고는 연달아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헛간으로 갔다. 그들은 곧 검은 가마를 두 도마뱀 요수 위에 묶고 또 다른 세 마리를 함께 끌고 왔다.
이렇게 한립은 뱀 여인들의 세심한 손길 하에 검은 가마로 옮겨졌고 두 여인이 그 앞에 앉아 도마뱀 요수를 몰았다. 나머지는 각자 한 명씩 도마뱀 요수에 올라탔다.
뱀 여인들은 다리가 없었기에 각 요수마다 물통 형태의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들의 꼬리를 넣어두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일행은 다시 길을 재촉했다.
도마뱀 요수는 많이 요동치기는 했지만 달리는 속도가 꽤 빨라 겨우 두 시진 만에 흙으로 만든 허름한 토성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십여 리에 달하는 성벽은 진흙으로 만들어졌고 성문 안의 건물들도 대부분 흙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가마 창문을 통해 한립은 성문을 지키는 열댓 명의 뱀 인간들을 훑어보았다.
병사들은 사내보다 여인이 더 많았고 다들 특이한 재질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은빛 장창을, 등 뒤에는 은색 표창과 단창을 꽂아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다.
염무가 성문 앞에 도착하자 성문을 지키던 병사 중 하나가 웃으며 다가와 인사를 했다. 염무 역시 그녀를 보고 반갑게 인사하고는 신중한 얼굴로 뒤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병사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 병사들에게 손짓해 길을 열어주었다. 길이 열리자 염무는 다시 도마뱀 요수에 올라타 검은 가마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토성 안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길이 유난히 넓었다. 길 양쪽으로는 많은 뱀 인간들이 거닐고 있었는데 사내들은 전부 건장했고 여인들도 몸이 탄탄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병장기를 지니고 다니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것을 보고 한립은 생각에 잠겼다.
와씨족(娲氏族)은 처음 들어보았으나 모든 족인들을 병사로 키우고 있는 것과 여성의 비율이 남성보다 월등하게 높다는 것이 시선을 끌었다. 길을 거니는 이들을 대충 훑어보아도 뱀 여인들이 사내들보다 두 배는 되었다.
그리고 하반신도 차이가 있었는데 연한 노란색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하얀색과 검은 색이 많았다. 노란색은 낮은 지위의 자들이고, 나머지 색깔은 지위가 있는 자들일 것이다. 그 외에도 다른 색도 약간씩 존재했지만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마뱀 요수가 평범한 돌길을 지나 나무와 진흙으로 만들어진 전당 앞에 멈춰 섰다. 건물 벽에 다양한 색의 조개껍데기가 장식처럼 붙어 있었다.
하지만 한립의 시선을 끈 것은 전당이 아니라 전당 앞 광장에 있는 물건이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원추형 물체는 높이가 열댓 장에 달했고 표면이 기괴한 문양으로 뒤덮여 희미하게 하얀빛을 반짝였다.
그 주위로 하얀 장포를 입은 남녀 뱀 인간들이 서서 손에서 영기의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한립은 그들이 무언가를 들고 원추형 물체 아래에 박아 넣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알록달록한 것이 영석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얀 장포를 입은 남녀들은 염무와 마찬가지로 수도자였지만 수행은 그녀보다 못했다. 하얀 장포 무리는 염무와 가마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다가왔다.
한립은 뱀 여인들에 의해 가마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져 그들이 가져온 대나무 의자에 앉았다. 한립은 차분히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대화의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하얀 장포를 입은 뱀 인간들이 염무를 공손히 대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전당에서 하얀 장포를 입은 두 무리의 뱀 인간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천천히 한립을 향해 다가왔고 그것을 본 염무와 광장의 뱀 인간들은 즉시 양쪽으로 갈라져 길을 내주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를 붉은 장포를 입은 자가 걸어왔다. 그는 평범한 용모를 지닌 부인이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두 다리가 있었다. 한립은 의아했으나 더욱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그녀에게서 원영의 기운이 풍겼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의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주위의 뱀 인간들은 축기기 사내 한 명을 제외하면 거의 연기기 수준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원영기 수사가 나타나니 신기했다.
붉은 장포의 부인은 한립을 훑고는 무척 놀란 듯 했으나 그런 내색을 지우고 서둘러 다가왔다.
“화월이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부인은 한립에게 예를 올리며 능숙하게 비령어로 말했다.
“자네가 화양족 대제사인가?”
“예, 그렇습니다. 저와 함께 대전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그러지. 안 그래도 물은 것이 많이 있다네.”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희는 어서 선배님을 대전 안으로 모시거라.”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자 부인은 밝게 웃으며 곁에 선 여인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녀의 분부에 뱀 여인들이 재빨리 나와 조심스럽게 대나무 의자를 들고 대전으로 향했다.
잠시 후 한립은 소박하게 꾸며진 대청에 자리를 잡았다. 안에는 그와 붉은 장포 부인만이 자리했고 나머지 뱀 인간들은 전부 양쪽에 서 있었다.
“거동이 불편하신 것 같은데 몸은 괜찮으신지요? 제게 직접 제련한 기혈단(氣血丹)이 있는데 필요하시면 내어드리겠습니다.”
“되었네. 수련하다 사소한 문제가 생겨 그런 것이니 시일이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 질 것이네.”
한립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거절했다.
“하하, 그러시군요. 그럼 궁금하신 것이 있으시면 하문하십시오. 제가 아는 범위에서 성심성의껏 답하겠습니다.”
“오, 그럼 일단 이곳이 어느 해역인지, 인근에 내가 알만한 유명한 수사가 있는지 알고 싶네만.”
그의 물음에 부인은 약간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지만 사실대로 답했다.
“이곳은 화호군도(火瑚群島)이옵고 주변에 그다지 유명한 수사는 없습니다. 기껏해야 저와 비슷한 수행을 지닌 정도이지요.”
“화호군도? 인근 해역도를 갖고 있는가?”
낯선 지명에 한립은 미간을 좁히며 다시 물었다.
“예,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와씨족의 문자로 되어 있으니 일단 저희 종족 언어를 습득하신 후에 지도를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는 게 좋겠구나.”
한립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 의식을 몸 밖으로 방출할 만큼 회복되진 않았지만 옥간의 내용을 살피는 것은 가능했다. 부인이 미소를 머금고 품에서 새까만 돌조각을 꺼내 한립에게 던졌다.
돌조각은 옥간과 비슷한 물건이었다. 그는 입을 벌려 푸른 기운을 방출해 그것을 이마에 대고 내용을 확인했다.
펑!
그런데 돌조각이 폭발하며 검은 안개가 한립을 둘러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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